2화. 문자로 온 주소를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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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이 찍어준 문자로 온 주소를 보니 가본 적 없는 동네였다. 몇 번 버스를 타야 되더라? 하영은 머리를 긁적이며 정류장의 버스 노선표를 눈이 빠지게 들여다보았다. ‘밤중에 이게 무슨 짓…’ 하영은 새삼 한숨이 나왔다. 아무 보상도 없이 이런 고생을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때문에 내일 학교 매점에서 아름에게 씨앗호떡이라도 뜯어내겠다고 생각했다. 버스로 환승까지 해가며 도착한 곳은 정류장에서 멀지 않은 빌라 뒤편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터벅터벅 걸어가다 보니 아름이 나무 밑에 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며 보자니 아름은 목도 안 아픈지 빳빳이 위를 올려다보며 두 발을 동동거리는 중이었다. “호떡 사줘.” “신하영!” 아름이 굉장히 반가운 얼굴로 하영에게 다가들었다. 하영은 흠칫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아름은 그런 것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한발 더 다가가 하영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내려줘.” 아름이 가리킨 곳은 3층 높이의 단풍나무 위였다. 보기에도 아찔한 높이에 용감한 고양이가 있었다. 완전히 어두워진 시간이라 나뭇가지와 단풍잎은 실루엣만 남아있었다. 그나마 고양이가 개순이처럼 흰 털이라 보인다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드높은 단풍나무의 거의 꼭대기까지 올라간 고양이의 패기에 하영은 박수를 보냈다. “박수는 왜 쳐. 내려달라니까? 빨리…” “…있어봐. 나보고 어떻게 해달라는 거야?” 하영은 사실 이쯤에서 드는 말도 안되는 의심을 꺼내봐야 했다. ‘얘는 나의 무얼 믿고 저 높은 곳에서 울어대는 고양이를 내려달라고 하는 거지?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평범한 고등학생이 가지 많은 단풍나무를 타고 3층 높이까지 올라갈 거라고 보통 생각하나? 그러나 하영에게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아름이 안다는 가정은 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 그래, 의심할 것도 없었다. “뭐… 올라가 볼게.” 그새 빌라 뒤의 어둠에 눈에 익어 나무가 약간은 뚜렷해졌다. 하영은 단풍나무의 낮은 가지를 잡았다. 그리고 줄기 중간쯤에 발을 턱 올렸다. 그러나 위를 올려다보자 앞으로의 일이 깜깜했다. 그때 뒤에서 아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무 탈 줄 알아?” 어정쩡한 자세로 아름을 돌아본 하영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안 타 봤는데.” “그런데 지금 뭐 해? 나뭇가지가 빽빽해서 사람이 들어갈 공간도 없고 가늘어서 꼭대기까지 가지도 못할 걸. 그리고 저기까지 간다 해도 어떻게 삐삐를 안고 내려올 건데?” 아름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착 가라앉아 있었다. 어쩐지 탓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영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나무에서 손을 떼고 돌아섰다. 그의 목소리도 훨씬 가라앉아 있었다. “그럼 어쩌라는 건데.” 아름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하영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사실 어두운 탓에 알 수 없게 보이는 것인지도 몰랐다. “바보같이 나무 안타도 넌 할 수 있잖아.” “뭔 소리야? 사람 불러놓고 헛소리 할거면 애초에 119를 부르던지.” 애써 목소리를 태연하게 눌렀지만 말 내용은 완전히 동요해 있었다. 하영은 자신의 바보스러움에 짜증이 솟았다. 아름이 왜 이토록 자신을 당황하게 하는지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늦은 시간에 고양이 때문에 불러봤자 안올 것 같았어.” “해보지도 않았네. 사랑하는 고양이가 위험에 처한 주인 치고는 책임감이 바닥이잖아?” “그렇게 말하지 마.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 119보다 네가 먼저 생각났을 뿐이야.” 아름의 목소리는 화를 내고 있었지만 약간의 울음이 섞여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또 공격적인 말투를 쓴 것이 하영은 미안했지만 지금은 다른 것들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하필 오늘 같은 날일 게 뭔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양심이 찔리는 일을 낮에 했었다. 그리고 하필 연아름일 건 또 뭔가. 잘 알지도 못하는, 가끔 의미없이 투닥대기나 하던 성격 나쁜 애였다. 둘은 한참을 그자리에 서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하기보다도 머릿속이 너무 어지러웠다. 그런 상태로 한참이나 침묵이 이어졌다. 고양이의 불안한 울음소리가 위에서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아름이었다. “나 알아. 네가 혼란스러운 것 같으니까 돌리지 않고 말할게. 너 날 수 있는 거 알아. 너… 새잖아.” “아, 그래. 내가 말했던가?” 무심하게 내뱉는 말투와는 달리 하영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말고, 신하영. 그동안 아무한테도 말 안했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건 나한테 무척 당연한거야.” ‘그동안’ 이라는 아름의 말투를 감안해서 오늘 낮에 하영을 본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하영은 몇 년동안 비행은 물론 집 밖에서 날개를 펼친 기억도 없었다. “어떻게 알았어?” 하영은 결국 네 말을 다 인정한다는 뜻이 되는 질문을 해버렸다. 그것은 아름이 단순히 ‘날 수 있는 걸 알아.’가 아닌 ‘새’라는 단어를 쓴 것에 기인하기도 했다. 동시에 하영은 가족들과 찬희를 떠올렸다. 이걸 모두가 알면 듣게 될 말은 뻔했다. ‘미쳤냐?’ ‘너 죽고싶냐?’ ‘잘 한다, 잘 해.’ 아름은 약간 주저하다가 곧 결심한 얼굴로 말했다. “네가 원하면 궁금한 거 다 얘기해줄게. 그러니까… 지금은 나부터 도와줘. 부탁이야, 하영아.” 야옹거리는 울음소리는 처음보다 가늘어져 있었다. 하영은 날개를 꺼냈다. 뭔가 결심을 한 것은 아니었다. 우물쭈물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 아름이 나지막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영의 등뒤로 새의 날개가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아름은 마음속으로 예쁘다고 생각했다. 날개는 그대로 감싸면 하영의 몸을 다 가릴 만큼 크고, 희고, 반투명했다. 하영의 등, 그러니까 하영이 입은 티셔츠 위의 날갯죽지는 더 투명했고 날개 끝의 깃털로 갈수록 선명해졌다. 입체 영상을 연상시켰지만 그러기엔 말도 안되게 세밀하고 사실적이었다. 아니, 애초에 눈앞에 보이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한 뭉텅이의 바람이 후욱 밀려오는 바람에 아름은 눈을 감아야 했다. 팔로 얼굴을 가렸다가 다시 눈을 떠보니 하영은 단풍나무의 끝에 가 있었다. 고양이를 천천히 안아드는 하영을 지켜보면서 아름은 1초 간격으로 주위를 경계했다. 곧이어 하영이 땅에 발을 딛자 아름은 한걸음에 그에게 다가갔다. “삐삐야…” 하영의 품에 안긴 고양이는 아직 긴장이 덜 풀린 상태였다. 아름은 고양이를 건네받아 쓰다듬으며 다친 곳이 없나 살폈다. 그러다가 가만히 지켜보는 하영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날개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고마워, 신하영.” 하영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가도 되지?” “어? 잠깐만… 지금 가게?” 하영은 피곤한 얼굴로 돌아서서 멀어졌다. 아름은 그를 소리쳐 부르려다가 그만두었다. 대신 등뒤에 대고 한번 더 말했다. “정말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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