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비 오는 날에 우산을 써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아요.
강유영이 창원에 도착한 날은 입추였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나올 때의 맑은 하늘이 무색하게도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장대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아가씨, 앞이 황각로예요! 여 길 공사 중이라 차가 못 들어가니까네, 요 내리세요."
기사 아저씨의 사투리는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유영은 멍하니 추측하며 간신히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감사합니다, 기사님."
유영은 가방에서 휴대폰과 떠나기 전 민서가 건네준 우산을 꺼냈다. 휴대폰 페이로 결제하고 우산을 펴 차에서 내렸다. 그때 휴대폰이 방전되어 꺼져버렸다.
기사는 차를 출발시키며 창밖을 흘낏 보았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긴 생머리에 흑요석 같은 눈동자를 가진 예쁜 소녀가 검은 우산을 받고는 서서 두리번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길을 모르는 것 같았다.
마음씨 좋은 기사는 창문을 내리고 물었다.
"아가씨, 다른 데서 친척 집에 오는 길인가배? 데리러 오는 사람 없어?"
비는 점점 더 거세졌고,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유영은 창원에 처음 온 터라 아는 사람도 없어 경계심이 들었다.
그녀는 우산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가 데리러 와요. 금방 도착할 거예요."
"그럼 다행이네."
기사는 안심했다. 역시 그렇겠지. 이렇게 예쁜 아가씨를 누가 혼자 다니게 하겠어.
그때, 멀리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유영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분간하기 전에 큰 소리로 외쳤다.
"오빠, 여기야!"
기사는 그 모습을 보고 차를 출발시켜 떠났다. 유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림자는 점점 가까워졌고, 그녀와 비슷한 또래의 남자였다. 그는 우산도 없이 빗속을 그대로 걸어와 온몸이 비에 젖어 있었다. 마르고 다소 말라 보였지만, 걸음걸이는 침착하고 굳건했다.
유영은 길 한가운데 서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저, 죄송한데 황각로는 어떻게 가나요?"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유영은 그제야 남자의 눈동자가 매우 검고 아름답다는 것을 알았다. 빗물이 그의 매끄러운 턱선을 따라 끊임없이 흘러내렸지만, 초라해 보이기는커녕 마치 영화 속에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주인공처럼 비장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빗속에서 임서훈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진흙탕 속에서도 깨끗한 흰색 운동화였다.
가늘고 곧은 다리 라인이 아름다웠고, 새하얀 치마는 바람에 따라 살랑살랑 흔들렸다. 맑은 눈동자와 흰 이를 가진 소녀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심지어 손에 든 수수한 디자인의 검은 우산마저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녀의 분위기는 주변의 황량하고 지저분한 풍경과 어울리지 않았다.
아마도, 부잣집에서 뛰쳐나온 아가씨일 것이다.
거절당할까 봐 걱정하는 듯 소녀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제가 여기 처음 와서 길을 몰라요. 게다가 휴대폰 배터리도 없어요. 좀 도와주시겠어요?"
서훈은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가씨의 말투는 매우 예의 바르고 다급해 보이는 모습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따라와."
서훈은 성큼성큼 앞서 걸어갔다. 도로는 보수 공사 중이었고, 바닥은 온통 진흙탕이었다. 유영은 신발에 진흙이 묻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진흙 바닥을 디뎠다.
서훈은 한참을 걸어간 후 뒤에서 인기척이 없는 것을 깨달알았다. 뒤돌아보니 아가씨는 그에게서 2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마치 바닥이 뜨거운 듯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주저하고 있었다.
한참을 지켜보던 그는 마침내 아가씨가 신발에 진흙이 묻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가씨, 그건 진흙이지 염료가 아니에요."
소년의 맑은 목소리에는 약간의 짜증이 섞여 있었다. 그는 그녀가 유난을 떨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서울에서는 감히 아무도 유영에게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천 리 밖 창원에 있었고, 그에게 부탁할 것이 있었다.
그녀는 화를 참으며 말했다.
"저는 유영이라고 해요, 강유영."
유영은 자신이 화를 잘 참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원래 화를 잘 참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억지로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서훈은 비웃듯 그녀에게 물었다.
"유영이라, 수영이라도 잘하나봐요? 아니면 사주에 물이 부족한건가?"
매우 진지한 말투였지만, 비웃는 기색이 역력했고, 알 수 없는 반항기까지 느껴졌다.
유영은 남아 있던 참을성마저 바닥을 드러냈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영을 할 줄은 알지만, 점쟁이에게 사주를 본 적이 없어서 물이 부족한지 아닌지는 모르겠네요. 하지만 지능은 정상이라 비 오는 날 우산을 쓴다는 거랑 쓰레기는 주울 먹을 게 못된다는 건 알죠."
마지막 말은 임서훈을 겨냥한 말이었다.
빗속에 서 있던 서훈은 아무런 표정 없이 얼굴에 흐르는 빗물을 닦아냈다.
"이리 와요."
그의 목소리는 빗물처럼 차가웠다. 칠흑 같은 눈동자에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살기가 서려 있었다.
유영은 자신이 강한 상대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단지 아버지가 첫사랑과 결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집을 나왔을 뿐, 여기서 목숨을 잃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도망칠 확률을 계산하고 있을 때, 서훈은 세 걸음을 두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유영의 손에서 우산을 빼앗았다.
"너..."
키 차이 때문에 소년은 고개를 숙여야 그녀와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아까 나 욕할 때는 당당하더니, 이제 와서 겁먹었어?"
도망은 글렀고, 싸움은... 강유영은 우산 손잡이를 쥔 그의 길고 가는 손가락을 따라 근육질 팔뚝을 바라보았다. 아마 싸워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태연하게 부인했다.
"저 욕 안 했는걸요."
"이 아가씨는 능글맞게 구는 것도 잘하는군요."
서훈은 코웃음을 치고는 우산을 든 채 성큼성큼 앞서 걸어갔다.유영은 비를 피하기 위해 신발에 진흙이 묻는 것은 신경 쓰지 않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는 무심코 그의 다른 손에 들린 물건을 보았다. 검은 비닐봉지로 싸여 있었지만, 모양을 보니 단번에 식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가 황각로예요. 몇 번지 찾으세요?"
유영은 그의 물음에 뒤돌아보며 대답했다.
"224번지요."
임서훈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강유영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반사적으로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가 황급히 우산 아래로 물러났다.
"왜 안 가요?"
그녀는 소년이 눈을 내리깔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없이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다.
유영이 물었다.
"224번지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서훈은 못 들은 척 다시 걸음을 옮겼다. 유영은 인상을 찌푸리며 황급히 그를 따라갔다.
잘생기면 다야! 인상은 무섭고, 말은 밉게 하고, 사람 말도 잘 안 듣고. 정말 싫다.
그녀는 이 만남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기를 바랐다.
곧 서훈은 그녀를 데리고 낡은 철문 앞에 멈춰 섰다. 그는 손가락으로 문패를 가리켰다.
"여기가 224번지예요."
유영은 속으로는 그에 대한 온갖 나쁜 평가를 쏟아내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정중하게 말했다.
"고마워요."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려고 했다. 오래된 자물쇠는 그 세월만큼 비바람을 맞은 탓에 녹슬어 작동하지 않았고, 그녀는 한참을 낑낑거렸지만 열리지 않았다.
서훈은 참을성이 부족해서 그 모습을 보고 짜증이 났다. 그는 유영에게 우산을 건넸다.
"잡아요."
유영이 우산을 받아드는 순간, 그는 비닐봉지에서 식칼을 꺼내 자물쇠를 향해 강하게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