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강제로 구매하게 된 회귀 패키지
임안은 스물네 살, 자신의 24살이 되던 해 생일날 죽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거의 10년 가까이 짝사랑했던 남자 우재영이 자신의 절친과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상심한 그녀는 지방으로 교육봉사를 떠났다.
주유를 위해 버스가 잠시 멈춘 지 얼마 되지 않아, 때마침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다.
산길은 미끄러웠고, 도로는 움푹 팬 곳이 많았다. 버스는 위태롭게 흔들리더니, 커브 길에서 그대로 계곡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이대로 얼굴도 알아볼 수 없게 죽어,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 묻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희끄무레한 새벽, 한 줄기 빛이 그녀에게 닿았다. 구조대 사이로, 있어서는 안 될 남자가 나타났다.
박찬영.
내가 좋아하는 우재영의 라이벌.
그가 대체 왜 여기에?
다음 순간, 박찬영은 구조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장비도 없이 질척이는 진흙탕 속에서 그녀의 시신을 찾기 시작했다.
임안은 그의 눈가에 핏빛이 서린 것을 보았다. 칠흑 같은 눈동자는 광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신을 발견한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시신을 끌어올린 그에게 감사하며 죽어서라도 복을 빌어주려는 찰나였다.
"박, 박 사장님!"
날 파내 주신 건 감사해요!
그런데!
그는 감히 그녀의 시신을 멋대로 가져가 버렸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저, 저는 아직 토끼 같은 자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위로는 모실 부모님도 계신다고요! 우리 아빠가 와서 시신을 확인하게 해 줘요!"
【소리쳐 봤자 못 들어요. 당신의 목소리는 안 들린다고요.】
"으응? 누구세요?"
【회귀 패키지 구매를 환영합니다! 저는 당신의 전담 상담원 001입니다! 고객님께서는 생전에 10,000점의 선행 포인트를 달성하셨고, 24살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시스템에서 자동으로 회귀 패키지를 구매해 드렸습니다!】
알았다. 시스템이라는 게 다 그렇지 뭐.
이제 회귀해서 임무를 수행하라는 거겠지.
"그래서, 지금 제가 뭘 하면 되죠?"
【고객님께서 구매하신 회귀 패키지는 매달 포인트로 연장 결제가 필요하며, 임무를 수행하면 포인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현재 고객님의 포인트가 0점이므로, 시스템에서 자동으로 최적의 공략 대상을 매칭해 드렸습니다. 공략 대상을 따뜻하게 잘 돌봐주면 포인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신용도를 유지하고 연장 결제를 제때 하시면 추가 보상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 제 공략 대상은 누구죠?"
【바로 고객님의 짝사랑 상대, 우재영의 원수인 박찬영 님입니다.】
!!??
"박찬영이라고요? 제 시신을 멋대로 가져가서 제 무덤 앞에서 춤을 추려고 했던 그 박찬영 말인가요? BW 그룹의 그 무서운 사장 박찬영 말이에요? 그 미친 사이코같던 박찬영 말인가요?"
"제가 이 임무를 하고 싶지 않다면요?"
【전 세계 블랙리스트에 등록되어 영원히 무의식 상태로 빠지게 됩니다!】
"그럼 평생 요금을 내야 하는 건가요? 그럼 저는 평생 박찬영이랑 엮이는 거잖아요?"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박찬영의 호감도를 높이면 됩니다. 호감도가 10,000점에 도달하면 본 회귀 패키지 평생 회원권을 얻게 됩니다!】
젠장!
정말 고맙네요!
이렇게 된 거, 어서 빨리 박찬영을 찾아서 임무를 시작하고 호감도를 높여야겠다!
과거 임안은 박찬영이 BW 그룹의 사장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는 자수성가하여 회사를 설립한 후, W & O 그룹과 사사건건 경쟁했다.
언론에서는 두 회사의 오랜 악연을 파헤쳐 박찬영이 W & O 그룹 회장의 사생아이며, 어린 시절 버려져 온갖 멸시를 받다가 결국 자수성가하여 W & O 그룹에 복수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쏟아냈다.
박찬영은 사업 수완이 뛰어나기로 유명했고, 그가 마음만 먹으면 어떤 회사든 소리 소문 없이 무너뜨릴 수 있다고 했다.
사람들은 그가 W & O 그룹을 빈껍데기만 남겨둔 채 곧 이사 자리에 오를 우재영을 괴롭히려 한다고 수군거렸다.
임안은 박찬영과 직접 접촉한 적이 없었고, 그에 대한 정보는 언론에서 만들어 낸 이야기가 전부였다.
고아원에서 자랐고, 어머니는 내연녀였으며, 아버지는 감옥에 갔다.
불행한 어린 시절은 그의 마음을 뒤틀리게 했다.
그는 천재와 미치광이의 경계에 서 있는 기인이었다.
임안은 박찬영에 대한 정보를 정리하고 나서 후회했다.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그녀의 시신만큼은 그와 직접 만났다!
만약 그녀의 남자 친구가 그녀의 시신을 안고 갔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박찬영과 몇 마디 나눠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그런 감정이 생긴단 말이야?
결국 임안은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라고.
그녀는 이 이상한 남자를 공략해야 하는 건가?
박찬영은 여자를 싫어한다던데... 설마 날 죽이지는 않겠지?
"001! 지금 환불해도 되나요? 아직 패키지 새 거예요! 한 번도 안 썼어요!"
【죄송합니다. 이미 패키지를 사용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즐거운 회귀 되세요!】
————
"임안! 너 아직도 여기 있었어? 경기 시작하려고 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안은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그녀의 절친이자 짝사랑 상대인 우재영과 결혼할 예정인 최수아였다.
최수아와 우재영의 약혼은 부모님의 뜻이라고는 하지만, 임안은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다.
"무슨 경기?"
최수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 단번에 무슨 상황인지 눈치챘다.
"아! 너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지? 네가 좋아하는 우재영이 나가는 장거리 달리기 시합 말이야! 너 걔한테 물 주러 가려던 거 아니었어?"
장거리 달리기?
아, 생각났다.
고등학교 1학년 개학식 때, 우재영은 학생 대표로 나가 연설을 했고, 임안은 그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녀는 그 후로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밀하게 그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임안은 고등학교 1학년 10반, 우재영은 고등학교 1학년 5반이었기 때문에 둘이 마주칠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러다 운동회 때, 그녀는 우재영이 5,000m 경기에 출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원봉사자로 지원했다. 그와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서였다.
과거 우재영은 결승점에 거의 다다랐을 때 옆 사람과 부딪혀 넘어졌다.
임안은 그를 부축해 양호실로 데려갔고, 그 덕분에 그와 가까워질 수 있었다.
아, 지난 일을 떠올리니 감회가 새롭네!
【띠링! 임무 알림: 운동장에서 박찬영을 교실로 데려오기】
최수아는 임안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가긴 가는 거야?"
"가야지!"
【현재 남자 5,000m 달리기 경기가 진행 중입니다. 트랙으로 이동하여 임무를 수행하고 포인트를 획득하세요!】
"트랙이라고? 설마 박찬영이 고등학교 때 5,000m 경기에 참가했던 거야?"
당시 우재영에게만 정신이 팔려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9월 말, 여름의 끝자락에 남아 있던 열기가 아직 공기 중에 떠다녔다.
임안은 먼저 우재영을 찾은 다음, 박찬영의 위치를 확인했다.
붉은색 고무 트랙 위에서, 키가 비슷한 두 소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고 있었다. 다른 선수들과는 제법 큰 차이를 보이며.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모두 "우재영, 파이팅!"을 외치고 있었다.
"박찬영은 고등학교 때 이렇게 조용한 학생이었나? 인기가 우재영의 반도 안 됐던 거야?"
하지만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 박찬영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그가 어느 반이었는지도 몰랐다.
우재영 옆에서 달리는 소년은 헐렁한 회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땀을 너무 많이 흘려 겉에 입은 빨간색 운동 조끼 앞부분이 흠뻑 젖어 색깔이 더 진해 보였다.
그는 지금 조금 뒤처져 우재영 뒤에서 달리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임안이 트랙 밖에서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자, 벽돌색 트랙에 고정되어 있던 그의 시선이 불쑥 앞쪽으로 향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임안은 조금 당황해서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100m 결승선을 앞두고 두 사람 모두 속도를 높였다.
잠깐만!
우재영과 부딪힌 사람이 박찬영이었던 건가?
그녀는 과거 그 일 때문에 우재영과 부딪힌 사람을 속으로 탓했었다!
그녀는 그 사람이 마지막에 우재영의 트랙을 침범해서 그가 넘어졌다고 생각했었다.
"우재영! 파이팅!"
"우재영! 파이팅!"
두 사람이 결승선에 점점 가까워지자, 임안은 결승선에 서서 두 사람의 발을 주시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때였다.
"조심해!"
"으악!"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두 사람이 동시에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의 트랙 쪽으로 쓰러진 것이다!
순식간에 여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두 사람을 에워쌌다.
최수아는 임안의 손을 잡아끌더니 그녀를 밀었다.
"뭐 해, 임안! 얼른 가서 네 짝남 일으켜 줘! 지금이 기회야!"
임안은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갔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우재영의 상태를 묻고 있었다.
천천히 일어서고 있는 박찬영에게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소년은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다른 손으로 무릎을 잡은 채 힘겹게 일어섰다.
그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표정은 차가웠다.
무릎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몇 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임안은 분명 '독종'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박찬영을 오해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과, 그가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오히려 그가 조금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후끈 달아오른 공기는 숨쉬기조차 힘들게 했고, 고무 트랙은 세 시의 태양에 달궈져 역겨운 냄새를 풍겼다.
그 냄새는 증발하는 땀 냄새와 뒤섞여 구역질을 유발했다.
박찬영이 아직 완전히 일어서지 못한 채 비틀거리고 있을 때였다. 뜨겁게 달아오른 그의 팔에 갑자기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동시에 상큼한 과일 향이 풍겨 와 주변의 역겨운 냄새를 몰아냈다.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하얗고 작은 손이 그의 팔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는 발그레한 작은 얼굴이 보였다. 긴 속눈썹 아래로 반짝이는 눈은 걱정스러운 듯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임안.
반에서 제일 예쁜 여자애.
그는 영문을 몰랐다.
임안은 박찬영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하며 무언가 말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박찬영은 차갑고 어두운 눈동자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저기... 괜찮아...?"
【띵! 001입니다. 호감도 -1점 감소했습니다.】
"뭐야! 아직 말도 안 끝났는데! 왜 벌써 호감도가 깎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