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도망갈 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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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헙! 아~ 네. 괜찮아요. 아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제 입에서 나오는 짧은 외마디 비명을 가까스로 제 손을 들어 틀어 막으며 그를 대면했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별 생각없이 사랑니 치료를 받기 위해 찾은 치과의 의사가 엘리베이터의 그 남자일 줄이야. 적잖이 당황한 지은의 얼굴은 저도 모르는 사이 새빨갛게 변했고 떨리는 목소리는 애처롭기까지 했다. "파란구두 보고 알았어요." 남자가 지은의 파란구두를 손으로 가리키며 빙긋이 웃었다. "아. 색이 참 선명하긴 하죠. 하하하" 조금 전, 연수의 말대로 이 남자도 이 구두가 꽤 인상적이긴 했나보다. 이건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한동안은 높은 굽이 있는 구두보다는 낮은 신발로 바꿔 신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발목이 접질렸다면 갈수록 통증이 더할테고요. 그냥 두지 마시고 냉찜질이라도 하면 도움이 될 거에요." "아. 네. 그래야죠." "지금 발목은 불편하지 않으세요?" 빨리 이 어색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이 남자,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아. 네. 괜찮아요. 저는 그럼 이만." 서둘러 인사를 끝내고 진료실을 나서려는 순간,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지은을 붙잡았다. "설마 다른 치과로 가실 건 아니죠?" "네? 뭐..." 세상에, 이런 귀신 같은 사람이 있나? 갈 길을 잃은 듯 방황하는 지은의 큰 눈동자가 이리저리로 움직였다. "치석제거도 잘 끝냈고, 두 번 정도면 되니까 이틀 뒤에 꼭 내원해 주세요." "아. 그게 사실은 근처에 일이 있어서 왔던건데. 회사랑 거리가 좀 멀기도 하고..." 급히 핑곗거리를 만들어 냈다. "저희 병원 목요일은 저녁 늦게까지 진료 합니다. 제일 마지막 시간으로 예약잡고 가시면 되겠네요." "아..." 그저 머릿속이 새하얘진 지은은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몰라 멍하니 그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김선생님, 이 환자분 목요일 마지막 시간으로 예약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한지은님. 접수대에서 예약 도와드릴게요." 정말이지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돼 버렸다. "그럼 조심히 가시고, 꼭. 그.날. 뵙.겠.습.니.다." 빙긋이 웃으며 그렇게 힘을 줘 말하고는 다른 진료실로 자리를 옮겨 가버렸다. '하아. 어떡하지. 나 일진이 왜 이렇게 사나운거야? 저 의사가 아까 그 남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렇게 민망하고 불편한데 여길 또 어떻게 와?' 지은은 이 위기를 어떻게 모면할까 싶어 진료실을 나서는 것도 잊고 서 있었다. "한지은님, 접수대로 가시면 다음 예약 도와드릴게요." "아. 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이 이랬을까? 조금이라도 더 나은 핑곗거리를 찾아내야 했다. "목요일 6시40분 진료예약 해 드리면 될까요?" "아. 그게 마지막 진료인가요?" "네. 이선생님 진료는 일곱시까지에요." "아. 아무래도 목요일 일곱시까지는 좀 힘들것 같은데... 제가 일정맞춰서 다시 전화드려도 될까요?" 지은이 한껏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아... 이 선생님이 오늘 꼭 예약하고 가시라고 하셨는데..." "일단 진료비 먼저 계산할게요." 지은은 화제를 바꾸며 지갑을 열었다. "그럴까요?" 지은의 카드를 받아 진료비 결재를 시작했고, 그렇게 모든 게 지은의 시나리오대로 끝나는 듯 했다. "그럼, 다시 연락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몸을 돌리는 순간, "설마 이렇게 도.망.가려는 건 아니죠?"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분명 조금 전에 다른 진료실로 들어가는 걸 봤었는데, 언제 온 건지 제 바로 등 뒤에 다시 그 남자가 서 있었다. "도. 도. 도망이라니요? 마지막 진료가 6시40분이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그날그 시간은 좀 빠듯할 것 같아서요." "아~ 그래서 다른 치과로 가시겠다?" 아예 접수대 한쪽에 제 몸을 기대서며 말을 했다. "아니. 뭐. 그렇다기 보다는..." 별 뽀족한 핑곗거리가 떠오르지 않던 지은이 머뭇머뭇거리며 말을 흐렸다. "그럼 그냥 토요일 진료 받으세요? 오전오후 모두 진료 있으니까 오히려 그게 더 편하시겠네요. 그건 가능하시죠?" 확답을 받고난 후에야 진료실로 가려는 모양인지, 다시 한번 더 머뭇거리는 지은을 지켜 보고 섰다. "하아. 그냥 저 목요일 저녁에 진료 받을게요. 목요일로 예약부탁 드려요." 일단 이 어색한 상황부터 모면하고 보자 싶어 예약을 부탁했다. 전화로 예약취소하는 것쯤이야 일도 아닐테니까. "그럼 조심히 가시고 목요일에 뵙죠." 그는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다 들은 후에야 미련없이 돌아서 진료실로 들어갔다. ***** 축 쳐진 어깨를 하고 진료예약을 끝낸 지은은 서둘러 치과를 나섰다. 정말 그 의사 말대로 신발이 벗겨질 때 발목이 접질렸던 건지, 좀 전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했던 찌릿한 통증이 발목을 휩쓸고 지나갔다. "하아. 일단 1층에 내려서 구두부터 하나 사야겠네. 망신 당하고, 돈 쓰고 이게 무슨 일이야. 정말." 급한데로 플랫슈즈 한 켤레를 사서 갈아신은 지은은 인터뷰가 있는 한옥갤러리로 향했다. 지은은 나름 튼실함을 자랑하는 중견 건설업체인 사보팀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는 7년차 대리. 평소라면 홍보부가 있는 종로 사옥으로 출근을 했을 테지만, 오늘은 홍대에 있는 한옥갤러리에서 예정된 인터뷰가 있었다. 한옥갤러리는 자회사로 운영되고 있는 곳으로 한옥 관련 사진과 그림이 전시되는 곳이자, 공연장이 있는 곳. 이 추구하는 풍경을 살려 만든 한옥에 지어진 복합문화공간이었다. "어, 한 대리. 오랫만이에요." 한옥갤러리에 도착하자 마자 갤러리 담당자인 송지안 팀장이 지은에게 인사를 건넸다. "송 팀장님! 잘 지내셨어요? 오랫만에 뵈요." "인터뷰시간보다 많이 일찍 왔네요." "네. 인사도 드리고 작품 전시된 것 먼저 둘러보고, 인터뷰하려고요. 혹시 최우진 작가님 도착하셨어요?" "아직이요. 아마 약속 시간 맞춰서 오실 것 같아요. 인터뷰 위치랑 작품 먼저 볼래요?" 송팀장이 갤러리 쪽으로 움직이면서 말을 건넸다. "네. 저 작품 먼저 둘러볼게요. 보내주신 이메일로 보기는 했는데 직접 작품으로 보는 거랑은 또 다르잖아요." "거의 전시 준비는 끝났어요. 갤러리로 들어가 봐요. 작가님 오시면 모셔 갈게요." "네. 감사합니다." 지은은 2월 14일부터 새롭게 선보일 캘리그라피전 준비가 한창인 전시실로 들어섰다. 다음주 발렌타인데이를 시작으로 화이트데이까지 '인연'이라는 주제로 캘리그라피와 담백한 수묵화의 맛을 살린 그림이 함께 전시될 예정이었다. 손글씨의 멋과 자유분방함이 가득 담긴 작품들은 한옥이 주는 공간적인 아름다움과 더불어 그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잊지 못한 당신과의 인연으로 인해 많이 아팠고 또, 행복했습니다 <인연 - 반쪽의 모습으로 찾아와 나를 완벽하게 채워주는 사람 <우리 모두가 소중한 인연입니다. 작품 한 편, 한 편을 지날 때 마다 지은은 뭔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 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지은 대리님?" 지은이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작가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최우진 작가님! 전화드렸던 한지은입니다." 지은은 명함을 건네며 첫인사를 나눴다 "일찍 오셨나봐요. 저도 약속시간 보다 조금 일찍 나왔는데." 지은보다 세 살 위인 최 작가는 지은의 예상과 달리 훤칠한 키에 서글서글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네. 작가님 작품 이메일로 받아보면서 갤러리에 전시되면 어떤 느낌일지 참 궁금했거든요. 다른 사람들에게 선보이기 전에 저 혼자 이곳을 독차지해 보고 싶었습니다." "하하하." 우진이 멋쩍게 웃었다. "작품 하나 하나가 너무 아름다워요. 아침에 개인적으로 좋지않은 일이 있었는데 작가님 작품을 보다보니 다 잊게 되네요. 정말 제게 선물 같은 작품입니다." "하하하 과찬이세요. 좋게 말씀해 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지은의 찬사에 더 입꼬리를 올리는 우진이었다. "작품을 보는 동안 머릿속으로 그렸던 작가님은 조금 무거운 이미지였는데 제가 잘못 짚었네요. 괜찮으시면 가장 처음으로 하신 작품이 어떤건지 여쭤도 될까요?" "제 첫 번 째 작품은 이 겁니다." 우진은 작품이 있는 곳으로 지은을 데리고 갔다. <인연이 더해지면 사랑이 찾아 옵니다. "인연이 더해지면 사랑이 찾아온다! 예쁜 말이네요. 일단 같이 둘러보면서 말씀 나누고 앉을까요?" "좋습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레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고 유머러스한 최작가의 답변과 함께 지은 역시 좋은느낌을 안고 인터뷰를 마무리 했다. "벌써 약속드린 시간이 훨씬 지났네요. 오늘 인터뷰 너무 감사합니다." "사실 많이 간장했었는데 한대리님께서 편하게 잘 이끌어 주셔서 저도 기분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사람좋은 웃음을 지으며 우진이 말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찾으실 것 같아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얘기를 나누며 지은은 인터뷰 노트를 덮고 녹음기를 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점심시간인데 한대리님 약속 없으시면 같이 식사 하시겠어요? 친구녀석이 잠깐 오기로 했는데 괜찮으시면 식사, 같이해요" "아, 아닙니다. 저도 사무실 들어가봐야 해요. 친구분이랑 편하게 식사하세요." 갤러리를 나서던 지은과 우진은 다음을 기약하며 인사를 건냈다. "최우진 작가님!" 그때 누군가 지은의 앞 쪽에서 우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지은은 저도 모르게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끄응! 그 누가 나쁜 일이 변해 복이 된다 했던가. 분명 나쁜 일을 겪었으니, 좋은 일이 찾아오는 건 아니더라도 그저 평탄하게 흘러가야 하는 게 당연한 것이거늘. 기분 좋게 마친 인터뷰를 시작으로 뭔가 좋은일만 가득할 것 같던 기분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왠지 오늘 하루가 꼬이고 또 꼬일 것만 같은 그런 느낌. 어떻게 해야 오늘 이 머피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지은은 고개를 푹 숙인채 앞을 향해 걸었다. '제발, 이 위기만 무사히 넘기자.' '지나가라. 빨리 지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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