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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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열기가 바야흐로 무르익어갈 즈음에 야진국의 시찰단은 북으로부터 남까지 서오 경도를 향해 내려오던 그날, 저 멀리까지 불빛들이 환하게 비추고 있는 서오 황성의 길가는 저 멀리 천국까지 향해있는 듯 화려했다. 한 마리의 웅장한 용이 되어 꿈틀대며 구불구불 길게도 이어져 있었다. 그 속을 쭉 비집고, 밤하늘 아래 흐르는 물결은 황성을 에둘러 빙글빙글 돌았다. 성 중의 길가에 각종 상인이 즐비했으며 왁자지껄 시끄러웠다. 야진국의 시찰단은 며칠의 고난 행군을 한지라 이미 기진맥진해 있었는데 데리고 다니던 낙타마저 혀를 내빼고 숨을 게걸스레 쉬고 있었다. 동행한 무녀는 낯선 광경에 고향 생각이 났는지 혼자 훌쩍이고 집사가 이를 보고 또 남사스럽다며 가차 없이 매질하기도 했다. 이와 동시에 암살단에 체구가 다소 왜소한 남자애 한 명이 눈에 뙨다. 그는 지금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는 검은 천을 풀어 헤치며 금빛 머리칼이 보였다. 분명 밤중이었지만 머리칼은 유난히도 빛깔이 감돌았다. 그리고 짙은 동공이 인상적인 두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녀의 울음소리가 차차 줄어들었다. 대오를 이끌던 영사가 뒤돌아 금발의 소년을 힐끗 보았지만, 두려운 마음을 숨기고 다시 머리를 돌렸다. 감히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야진국은 서역에 있는 작은 나라로서 본래대로라면 서오에 울린다 큰 연관을 맺지 않는 나라였다. 그러나 하늘은 항상 예상치 못한 변고를 선사해 주어 끝끝내 두 나라를 하나의 운명 속에 집어넣는데. 3년 동안의 폭설로 인해 황막 위에는 곳곳이 얼어 죽은 가축들이 무더기로 나왔고 결국 굶주림에 허덕이다 약탈의 길을 걷게 된 야진국이었다. 또한, 그렇게 두 나라는 서로의 운명을 부딪치게 된다. 태생에 신력을 지녔다고 하는 야진국의 사람들은 약탈에 능했다. 난폭했고 잔인함이 피에 녹아들어 있던 이들이었는지라. 그러나 그들이 상대하고 있는 나라는 다름 아닌 서오의 사람들은 백 년 이래 길고 긴 장성을 쌓아 외부의 침략에 준비하고 있었다. 게다가 견고한 성벽에 이어 백 년의 강산을 지키고 있는 무가 출신의 설씨 가문도 떵하니 자리를 잡고 있어서 두 나라의 교전은 예상외로 치열했다. 전쟁은 오랜 시간 지속하였다. 많고도 많은 전력이 소비되었고 전쟁으로 피바다가 되어서야 드디어 서오 대장군 설림의 아들인 설강은 대군을 무찌르고 마지막 승리를 쟁취하게 된다. 그 뒤 야진국은 한보 뒤도 밀리다 못해 서오의 종속국으로 입지가 하강하고, 오늘날까지 오게 된 거였다. 그리고 설강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훗날 표기장군의 벼슬을 하게 되었다. 그는 소년 장군이요, 의기양양했고 수년간 변강에서 연마한 의지로 굳건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거친 피부와 더불어 칼집을 비집고 나온 보검처럼 날카로운 기류가 항상 주변을 맴돌기도 했다. 이 또한 많은 문인에게 창작의 공간을 내어주는데. 밤길을 재촉하여 적군을 불사 질렀다는 둥 대군을 무찌르고 명예와 승리를 이룩했다는 둥 얘기들이 많았다. 당연히 이런 설화들은 여인들의 환심을 엄청나게 샀지만 정작 당사자 본인은 되려 여색을 멀리하는 사람이었으니 아직 혼사가 결정 나지 않았고 집안의 애간장만 녹이고 있던 터였다. 말이야 쉽지 변화무쌍한 전장에서는 방심할 틈이 없었다. 한 치의 실수로도 일생의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는 곳, 또한 전장이었으니. 그래서 여색을 멀리하기는 하지만 혼사에 대해서는 설강도 진중한 면이 있었다. 이내 타인에게 혼사를 부탁하게 되는데. 설강은 아버지를 따라 말을 타고 봉현 문을 서서히 지났다. 그리고 그만 말에서 내려오는데 순간 멀리서부터 비춰오는 강렬한 등불의 빛에 눈이 부셔놓았다. 붉은빛이 비춰오는 곳은 멀찍이 떨어진 궁궐, 검푸른 밤하늘 속을 찢어놓듯 등불은 배경과 한몸이 되어 남다른 존재를 과시하였다. 궁중의 하인들이 저마다 등불을 들고 큰 우산을 치켜세운 채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 수가 어마어마했다. 그 모습은 흡사 장엄한 교룡이 거리를 누비는 것 같았다. 그 기세가 워낙에 컸는바 설강은 맘속에 어느덧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그런 기세가 무섭지도 않았는지 손가락으로 집으면서 묻는 것이었다. “저건 누구의 의장대입니까? 참 대단한데요?” 궁중의 하인들은 어느새 멀리 떨어진 설강을 보아냈는지 이내 머리를 숙이고 인사를 하는 거였다. “저건 강보제희란다.” 강보제희? 설강에게 있어 결코 낯선 이름이 아니었다. 사방을 누비고 다니는 방랑시인한테서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변강에 유배를 온 사람들 중 태반은 강보제희의 화를 사서 전하한테 3대 죄명으로 그런 곳에 멀리 보내지게 된 것이었다. 하여튼 그런 곳까지 유배를 온 사람이라면 가족은 물론 후대들까지도 수난의 운명을 달리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과거에 급제한 훌륭한 인물이라 해도 그녀의 욕심을 피해 가기 어려웠는데. 한때 부둥켜안고 꽤 두터운 친분을 가지고 있던 병부시랑의 아들인 강하임도가 있었다. 성품이 온화하고 사달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이었건만 제희의 한마디 칭찬에 전하는 곧장 그를 제희옆에 붙여두었던 것이었다. 제희가 과연 무슨 학문을 하겠다고 굳이 과거 출신인 강하익이 옆을 배반할 정도일까? “궁중의 창밖으로 보이는 인간 , 저 중에 꽃을 알아보는 자들이여. 인간세상의 제일의 상을 타파한다더라, 과연 그건 제희뿐이니.” 그래서 과연 그 연유가 무엇일까? 그냥 공주님의 거만함일 뿐이었다. 하지만 거만한 것치고는 용모가 참 아름답다고는 하더라. 심지어 일류의 시인조차 남몰래 칭찬하는 걸 봐서는 말이지. 설강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귀족 여인네한테는 관심이 없었지만 제희만큼은 워낙에 명성이 큰지라 궁금하기는 했다. 하나 아쉽게도 그런 생각을 부모님에게 말씀드려 봤더니 웬걸 무슨 귀신이라도 만난 거 마냥 둘은 펄쩍 뛰면서 한사코 설강을 막아 나섰는데. 행여나 강하익과 같은 처지에 놓일까 봐 마음을 졸이고 있던 거였으니. 그로써 설강은 진짜로 강보제희와 단 한 번도 만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궁궐에 들어온 이상 반드시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설강은 되려 흥미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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