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자신의 얘기를 한다는 걸 용케 예감이라도 했는지 순간 제희는 연거푸 재채기해댔다. 그 재채기에 화들짝 놀라버린 하인은 그만 몸이 비틀거렸고 손에 들려있던 차를 제희의 팔에 부어버렸다.
“소... 소인, 큰 죄를 지었습니다!”
하인은 빠릿빠릿하게 무릎을 꿇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어도 최아한테 그런 실수를 했으니 그 후과는 불 보듯 뻔했다. 최아는 눈을 홉뜨면서 조용히 머리를 조아리는 하인을 보다 입을 열었다.
“왕비를 모시던 자라고 해서 눈여겨봤더니만, 어찌 이런 경망스런 실수를 한다는 말이냐? 뭣들 하지? 어서 끌고 나가지 않고?”
그녀는 슬며시 찻잔을 들어 한 모금 홀짝 하고 눈 끝으로 앞에 있는 남자를 보면서 미간을 구겼다.
“왜요? 맘이 언짢아서 그래요?”
그녀 앞에 앉아있던 사람은 강하익이었다. 방울 소리를 연신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같은 공간 아래 서로 거리를 두고 앉아있는 남자를 보며 최아는 한숨만 가볍게 내쉬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그런대로 찻잔을 내려놓은 최아는 계속 강하익의 빼어난 외모를 감상하고 있었다.
야진국과의 전쟁은 예상과 달리 너무 오래 지속되었었다. 그 바람에 이미 인내심을 상실한 사람 속은 대신들을 한 번이고 두 번이고 연달아 꾸짖었었다. 그러나 결국은 고대하던 승리를 떠안게 되었고 어렵게 가져온 승리인지라 그동안 겪었던 고생을 반드시 보상받겠다는 생각에 야진국에게 으름장을 놓으려 하던 참이었다. 그 결과 연회를 궁에서 가장 넓은 곳인 적성각에서 주최하려 하였다. 적성각에서 내려다보면 수려한 강산의 풍모가 한눈에 안겨오는데 야만적인 야진인들의 기세를 눌러놓기 딱 좋았다.
그러나 이런 연회에 최아가 관심 없을 것을 미리 염두에 둔 알 길이 강하익까지 불러온 것이었다. 비록 당사자인 강하익 본인은 연회에 대해 하나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냥 묵묵히 있을 따름이었다.
최아는 넋이 반쯤 나가 있는 강하익을 보다 재미가 덜했는지 손에 들려있던 구련환을 만지작거렸다. 그걸 뺐다 다시 맞추고, 또다시 뺐다 맞추고를 반복하다 문뜩 강하익 손에 잡혀있던 책에 눈길이 갔다.
“부황께서 과거 급제의 자격을 박탈했다고 하던데?”
강하익은 수중에 잡혀있던 춘추를 그만 내려놓고는 맑은 눈으로 최아를 바라보았다. 강하익으로 놓고 말하자면 무관의 부친을 두고도 정작 자신은 학문에 열중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학문으로 닦아진 품성은 무를 연마하는 사람들의 거친 성질과는 사뭇 다른 기질이 있었다. 뭐라고 할까... 아마 울창한 대나무숲 속을 흐르는 개울물이라고 하면 적당할 것이다. 그래서 종종 타인에게 부드럽고 우아한 감상을 주게 했다.
“네.”
강하익은 대답이 짧았다.
이 모든 원흉인 최아 앞에서조차 이 정도로 담담한 모습을 보이다니. 그자가 되려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정교한 화장이 칠해진 두 눈은 서서히 아래로 향해지고 점차 강하익의 구겨진 옷 결에 눈이 갔다. 그리고 그 위에 매달아 있는 장신구까지.
옛사람들은 왕왕 자신의 결함을 뭔가에 자기 자신에게 경고한다고 했다.
‘역시... 이 남자도 그런 것인가?’
그자가 입꼬리가 슬며시 귓가에 걸리더니 무슨 생각이라도 들었는지 가볍게 한마디 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얘기야. 어차피 부황께서 앗아간 그 명분 도로 다시 되돌려 줄 때가 있을 터니, 그냥 지금은 좀만 참으라고.”
비록 정확히 무슨 뜻으로 하는 얘기인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강하익도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거만하고 제멋대로인 여자를 싫지는 않았어도 그녀를 있는 그대로 용납하기는 어려웠기도 했고. 둘만의 분위기가 차차 가라앉고, 차가워진 공기속에서 강하익은 내려놓았던 춘추를 도로 집어들고 재차 학문에 매진하였다. 그리고 최아는 어느새 고개를 돌려 시선을 저 멀리 내던졌다.
그 시선도 채 닿지 않을 멀리서, 야진의 시찰단은 육속 적성각에 입장하기 시작했다.
대오의 첫 무리에서 걸어가던 어여쁜 미소년은 반쪽 얼굴을 어둠 속에 가린 채 마치 늑대무리라도 경계하듯 계속 좌우로 살폈다. 그 눈빛 속에는 무려움보다 강인함이 서려 있었고 그 강인함은 짙은 갈색이었다. 하지만 유난히 눈에 띄었는지 옆에서 동행하던 사형의 나무람을 들었고 소년도 그만 고개를 숙였다. 반쯤 가려진 얼굴이었지만 소년은 이를 악물고 있다는 걸 쉬이 보아낼 수 있었고 손은 어느새인가 허리쯤에 차여진 곡도를 만지고 있었다. 적성각 내부는 대낮같이 등불이 밝았다. 그 앞으로 현란한 폭죽들이 하늘 위로 있었고 일행은 드디어 자리에 착석하게 되었다.
연회는 그렇게 시작하게 되었다.
최아는 황제폐하 아래쪽에 착석하였다. 표정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웃음이 그려져 있었다. 웃는 듯 마는 듯 그 속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똑똑...
그리고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소란스러워지는 궁중에서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그러다 나지막이 들리던 소리가 돌연 멈춰진다.
최아는 희미한 웃음을 걷어 들이고 뭔가를 주시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야진국의 왕자는 인파 속에서 순간 자신에게 쏘아대는 의문의 시선을 포착하게 된다. 어둠 속에서 나직이 들리는 늑대의 으르렁 소리와 같았다. 저 눈빛은...! 분명 느낄 수 있었지만 흐릿하기만 했고, 소년은 지금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