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서 대필. 반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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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마야. 몸이 단단하구만.’ 석후에 품에 안긴 수린은 잠깐 사이에 황홀함을 느껴버렸다. “너 누구야.” 석후가 자신에게 딱 붙은 수린을 떼어내며 물었다. “아... 저는 서수린이라고 합니다. 그쪽은... 공석후씨죠? 하하. TV에서 종종 봤습니다. 와 역시 실물은 더 끝내주시네요!! 베리 굳!” 한 발짝 떨어져 석후의 몸을 아래부터 위로 쭉 훑은 수린이 양손으로 엄지 척을 날렸다. “서.. 뭐시기. 당신 뭔데 여기 있는 거야.” “아... 서수린 입니..다. 하하. 아 저는요.” 수린은 자신을 작가라고 소개해도 될지 고민됐다. 석후는 그새 팔짱까지 끼고 노려보았다. “문 앞에서 뭐해? 누구...” 때마침 석후를 찾아온 매니저 진원이 문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안녕하세요. 저는 서수린이라고 합니다. 공석후씨 자서전 대필하기로 한...” “아하! 작가님이셨구나. 안 그래도 대표님한테 오늘 오실 거라는 얘기 들었어요. 반갑습니다. 석후랑 벌써 인사 하신 거에요?” 진원이 반갑게 악수를 건넸다. “... 하아... 공민준.” 석후는 좀 전보다 더 표정이 어두워진 채 스튜디오를 홱 나가버렸다. “하하. 저 자식이 참. 손님을 앞에 두고. 이해하세요. 공석후 까칠하기로 유명하잖아요.” 진원이 민망한 듯 웃었다. “아. 네...” ‘까칠이 아니라 예의를 밥 말아 먹은 싸가지구만.' “작가님. 방금 속으로 공석후 싸가지 없다 생각하셨죠? 하하하.” 속마음이 들리기라도 하는 건지 진원이 콕하고 정곡을 찔렀다. “네? 니요. 딸꾹.” 수린은 당황한 나머지 딸꾹질을 했다. “풉. 작가님. 표정 참 못 숨기시네요. 공 스타 눈치 엄청 빨라요. 자서전 쓰실 동안 속마음 안 들키게 조심하셔야 할 거예요. 아! 제가 종종 공 스타 뒷담화는 같이 해드릴 수 있습니다.” “하하. 네... 딸꾹.” 진원은 눈썰미도 좋고 재치도 만점인 재밌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수린은 내내 긴장으로 뻣뻣했던 몸이 조금은 풀리는듯했다. “대표실로 가시죠. 공 스타도 그리로 갔을 거에요. 아마 지금 둘이서 엄청 레이저 쏘고 있겠네요.” ***** 쾅— “노크 좀 하고 들어와라.” 문을 확 열고 들어오는 석후가 익숙한 듯 민준은 일에 집중했다. “'자.서.전.' 안 한다고.” “해야 한다고.” “아! 왜!” 석후는 화난 얼굴로 들어왔지만, 단호한 민준 앞에서 땡깡 부리는 아이가 되었다. 친척 지간인 두 사람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너 이제 신비주의는 안 통해. 내가 너튜브로 채널 만들려던 거 그나마 책으로 양보 한 거라 했지.” 민준은 어린아이 달래듯 석후를 향해 자상한 미소를 지었지만,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단호했다. “아니 신비주의고 뭐고. 사람들 나한테 관심 없다니까?” “관심 없는 사람들이 맨날 회사로 이런 걸 보내냐?” 민준이 석후에게 종이 뭉치를 꺼내 보였다. 석후에게 온 편지를 비롯해 석후가 제발 세상과 소통했으면 하는 바람들을 모아 적은 요청사항들이었다. “하아... 아 진짜.. 싫은데.” 팬들의 마음은 고마웠지만 하기 싫은 마음은 여전했다. “자! 이거.” 민준이 건넨 건 파리행 비행기 표였다. “이게 뭔데...” “네가 그토록 만나뵙고 싶어하던 파블로 교수님. 다음 학기부터 에콜 노르망에 교수로 부임 하신다더라. DATE 데뷔 끝나면 보내 줄 테니까 가서 만나뵙고 와.” (에콜 노르망 - 프랑스 유명 음대) “형...” 까칠한 공석후도 이런 일에는 감동을 하는 법이었다. “대신. 자서전은 예정대로 해. 네가 어려울게 뭐 있냐. 그냥 인터뷰 좀 하고 지금 하고 있는 일 보여주는 것뿐인데. 그리고 네가 그리고있는 그 꿈 발표에 맞춰 자서전도 딱 내면 , 홍보도 되고. 돈도 벌고. 얼마나 좋아.” “역시 꽁대표. 결국엔 수익이 목표지.” “나 사업가다. 밑지는 장사 안 해.” 언제나 그렇듯 대표 민준 손에 많은 게 잡혀있는 석후는 결국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아... 별수 없지... 뭐. 불쌍한 대필 작가만 고생이지. 작가가 먼저 그만두면 없던 일로 하는 거다?” ‘딱 보니까. 병약하게 생겨서 좀만 힘들어도 그만둘 게 분명해.’ 석후는 방금 전 만난 수린의 모습을 떠올렸다. “두고 봐라. 네 뜻대로 될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네버.” 뭔가 비장한 표정을 짓는 석후를 보며 민준이 비웃었다. 출판사 나무숲은 추천한 대필 작가가 엄청난 인내심과 끈기를 가지고 있다며 호언장담을 했었다. 민준은 되려 꽤나 고생할 것만 같은 석후 생각에 웃음이 났다. ***** 똑.똑. “네. 들어오세요.” 젠틀한 남자의 목소리가 대표실 안에서 들려왔다. 진원이 친절하게 문을 열어주자, 수린은 살짝 긴장한 얼굴로 대표실 안으로 들어갔다. 목소리만큼 훈훈한 남자와 얼굴값 하는 싸가지 공석후가 큰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아! 서수린 작가님이시죠? 이쪽으로 앉으세요.” 대표로 보이는 훈훈한 남자는 친절하게 의자까지 빼주며 반갑게 인사했다. “여기. 제 명함입니다.” “아. 네. 저는 아직 명함이 없어서... 하하” 공엔터테인먼트 대표 공민준. 수린이 명함을 확인하는 사이 민준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같이 온 진원도 석후 옆에 앉았다. “공석후 씨랑은 밑에서 인사했다고 들었습니다.” “아... 네. 뭐 인사...”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뚱한 표정으로 수린 쪽은 쳐다도 안보는 석후였다. “하하. 그럼 자서전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저희 회사는 이번 자서전을 통해 공석후가 조금 더 대중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자서전이라고 하기는 좀 거창할 것 같고... 공석후가 아티스트로서 도전해온 일들과 변화 과정들, 또 이루고 싶은 목표 등 사람들이 잘 알지 못했던 공석후에 대해 알려줄 수 있는 그런 책을 한번 내보면 어떨까 싶어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출판사 나무숲에서 서 작가님의 필력을 아주 높이 산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공석후씨가 말 주변이 없다 보니 서 작가님께서 대필을 해주시면 굉장히 좋은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가 됩니다.” ‘이게 무슨 말이야... 대체.. 나무숲 근처엔 가본적도 없는데... 내 필력을 높이 평가한다니... 하아. 한나 선배!!’ “하하 그런가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말은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수린의 속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열심히 할거 없어.. 요. 그냥 대충 해.. 요.” 반말인지 존댓말인지 꼭 놀리듯 말하는 석후에 수린은 짜증이 났다. “아니요. 엄~청 ‘열심히’ 하겠습니다. 기대에 부응해야죠! 씨익.” 수린은 지지 않고 강력하게 얘기한 뒤 석후를 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런 수린의 모습에 석후는 뜻하던 바가 아닌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역시. 나무숲에서 추천하신 작가님답네요.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서수린 작가님.” 다정한 민준의 목소리에 석후로 인해 불편했던 수린의 마음이 힐링이 되는 것 같았다. “자자. 대표님 오늘 작가님이랑 첫 만남인데, 같이 점심이라도 드실까요?”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던 진원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아 그럴까요? 그럼 첫 만남이니까 가볍게 친해지는 자리라 생각하고 식사하시죠.” “난 바빠. 녹음하러 가야돼.” 수린도 동의하며 따라나서려는데 훈훈한 분위기에 석후가 초를 쳤다. “공 스타씨. 애들 춤 연습하러 가서 녹음은 오후에 마저 하기로 했어요. 하하.” 진원이 석후의 어깨를 꽉 쥐며 얘기했다. “아! 아악. 알았어! 가면 되잖아!” 손 아귀 힘이 워낙 센 진원을 감당하지 못한 석후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린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민준을 향해 어색하게 웃었지만, 불편한 식사자리에 갈 생각에 벌써부터 체한 것만 같았다. ***** 한적한 한식당에 온 네 사람은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여러 대화를 주고받았다. 대부분 수린을 향한 질문이었지만, 다정한 민준과 재치있는 진원 덕분에 분위기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오로지 석후만이 뚱한 표정으로 수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저 인간은 왜 자꾸 쳐다보는 거야. 사람 민망하게... 이럴 거면 애초에 지가 안 한다고 하지. 그럼 나도 좋은데.’ 맞은 편에 앉아서 자꾸만 자신을 노려보는 석후때문에 수린은 그의 눈을 피해 애꿎은 수저만 만지작 거렸다. 그런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진원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웃었다. “야야. 그만 좀 쳐다봐라. 서 작가님 체하시겠다.” “켁.켁.” 물을 마시다 진원의 말에 깜짝 놀란 수린은 사레가 걸렸다. “어? 괜찮으세요 작가님?” 옆에 앉은 민준이 얼른 휴지를 건네주었다. “네네... 괜찮습니다. 켁켁..” 걱정스러워하는 민준과는 달리 석후는 켁켁 되는 수린을 보면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이봐.요. 서씨. 근데 나무숲에서 일 하는거 맞아요? 왜 난 들은 기억이 없지.” ‘뭐어? 서씨? 하. 저 인간이 진짜.’ 갈수록 더 싹수없는 석후에 수린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야! 공 스타. 작가님한테 서씨가 뭐야. 예의갖춰.” “님은 무슨. 나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구만. 몇 살이야.요? 나보다 어리지.요?” 물론! 공석후보다 어린 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난생 처음 본 사람한테 이건 아니지 싶었다. 특히, 저 반말인 듯 아닌 듯 하는 말투부터. 수린은 정말이지 정을 줄래야 줄 수 없겠다 생각했다. “네... 뭐. 하하. 그렇죠.” ‘서수린 성질 많이 죽었다.. 하하. 딱 한달. 그래 한달만 참으면 돼.’ 수린은 인내심을 가지고 최대한 예의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꼭 고등학생처럼 생겨서 자꾸 반말이 나온다니까.” “하하하. 작가님이 엄청 동안이라는 뜻이에요.” 진원이 석후의 말을 기분 좋은 버전으로 번역해주었다. 같은 한국말을 쓰는 데 번역이 필요하다니... “아. 제가 좀 키도 작고 그러다 보니. 그런 말을 많이 들어요.” “진짜 미성년자라 해도 믿겠어요. 수린씨 정말 28살 맞아요? 아. 수린씨라 해도 되죠? 작가님은 너무 투박하니까.” 누구와는 다르게 말할때마다 얼마나 다정한지, 민준이 중저음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그럼요. 저도 작가보다는 이름이 편해요. 편하게 불러주세요.” 방금 석후로 인해 상했던 마음이 민준의 미소로 한순간에 풀려버렸다. “그럼 난 반말해도 되지? 편하게 하랬으니까. 서 대필로 하지 뭐.” “하하하. 서대필.. 네. 좋네요.” 기다렸다는 듯 말을 놓는 석후에 또다시 분노가 차올랐지만 수린은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했다. “그래도 석후가 자서전 절대 안 하겠다고 했는데, 수린씨 보고 한다고 결정했어요.” “예? 저를 보고요?” “네. 나무숲에서 추천한 작가님이라서 그런가. 신뢰가 가나 봐요. 나무숲 대표가 우리랑 인연이 조금 있어요.” 어떻게든 수린을 포기하게 만들 궁리인 석후의 속내를 알 리 없는 민준이었다. 수린은 민준의 말에 살짝 의심이 가기는 했지만, 서 대필이라고 부르겠다고 하는걸 보면 공석후가 아주 조금 자서전을 쓸 마음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 사실 저는 나무숲에서 일한 건 아니고... 부대표로 계신 유한나 작가님의 보조 작가로 일하게 되었어요. 원래는 장이영 교수님 밑에서 일을 해왔구요.” 아무래도 수린은 본인이 나무숲과는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장이영 교수님?” 석후가 장 교수님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 듯 했다. “역시. 그래서 나무숲에서 추천 한 거구나. 장이영 교수님 너무 유명하시잖아요. 석후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님이신데.” “네...? 공석후 씨가요?” 책과는 거리가 먼듯 한 공석후의 최애 작가가 장 교수님이라니... 수린은 당황스러웠다. “하하. 공 스타가 책 안 읽게 생기긴 했죠?” 수린의 표정을 기가 막히게 읽은 진원이 크게 웃었다. “아 왜 웃어. 내가 얼마나 지적이게 생겼는데.” “풉. 아. 죄송합니다. 흠흠.” 본인의 입으로 지적이다 말하는 석후가 너무 어이가 없어 수린은 웃고 말았다. 재빨리 사과하기는 했지만, 석후는 이미 기분이 상한듯했다. “야. 눈에 힘 풀어. 웃음이 나실만도 하지. 네가 지적 이긴 뭐가 지적이냐.” 민준이 상황을 중재하고 나섰다. “하. 내 지적인 모습을 다들 보지 못했다 이거지. 좋아. 이번 자서전에 내가 얼마나 지적인 사람인지, 반드시 쓰게 될거야. 야 서대필. 반하지 마라.” '오 마이 갓. 미치셨어요?' 안 한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꼭 쓰라니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반하다니. 대체 누가?! 수린은 콧방귀라도 날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하. 네. 이번 기회를 통해 지적인 모습을 꼭! 담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이제 시작이었다. 공석후와 보낼 한 달간의 자서전 기행... 과연 이 기행의 끝에 웃는 사람이 누굴지. 수린은 식탁 밑으로 주먹을 꼭 쥐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한 미소를 지었다. 석후도 팔짱을 낀 채 의자에 등을 기대며 수린을 향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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