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가면 오후 늦게 서야 집으로 돌아온 초희는 초저녁인데 집에 들어와 아무일도 없다는 듯 실없이 웃으며 막내와 티브이를 보고 있는 아빠를 보자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메고 있던 가방을 거실 한쪽에 내려 놓은 초희는 안방에 있는 아빠를 거실로 불러내어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용히 물었고 둘째 딸 질문에 아빠는 밖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했다. 예상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말에 초희 얼굴은 조금 전 보다 수심이 더 짙어졌다.
그런 딸의 마음을 모르는 것인지 은철은 평생에 다시 만나기 어려운 귀인을 만났다며 좋아했다.
“진짜 아빠가 말한 조건만 들어주면 사채를 정리해 준다고 했다고?”
“응!”
“아빠 기분을 깨고 싶지 않지만 그 사람도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
“얼굴이 차가워 보이기는 했지만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어.
강령은행팀장이 인사까지 할 정도면 회사에서 높은 사람인 게 틀림없잖아”
아빠 말에 더 의구심이 든 초희는 아빠 손을 꼬옥 붙잡았다.
“아빠도 직장 다녀봤으니 잘 알잖아. 나이가 젊은데 회사에서 높은 사람 되는 게 쉬운 일 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직원부터 팀장까지 그 사람한테 인사를 해”
아빠가 본 것이 사실이라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런 사람이 이유 없이 아빠를 돕는다 게 초희는 영 꺼림직했다.
“혹시 그 사람한테 명함 받았어?”
“그 사람 명함은 안받았고 그 사람 비서 같은 사람 명함은 받았어”
자세히는 모르지만 갚아야 할 사채가 이억이라 들었던 초희는 그런 돈 돈을 갚아주겠다는 사람 신분은 물론이고 이름조차 모르면서 그저 은행회의실에서 만났다는 이유로 은행에서 높은 사람이라고 확신하는 아빠를 보는 초희 마음은 복잡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빠는 그 사람 말을 진짜로 믿는 거야?”
“당연하지! 회의실을 단독으로 혼자 쓸 정도면 높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거든”
"하아.. 회의실 하나쯤 빌려주는 게 무슨 대수라고"
초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켰다.
“아빠 그 사람이 만나자고 다시 전화하면 나한테 꼭 말해야 해, 알았지!”
“너 바쁜데 뭐 하러, 아빠가 알아서 잘할게”
“무슨 일을 하든 엄마하고 나랑 상의하겠다고 한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그런 중요한 결정을 아빠 혼자 해”
사채 빚을 둘째 딸인 초희와 부인에게 고해성사하던 날 어떤 일도 혼자 결정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던 은철은 이번에도 큰 일을 결정했다며 초희가 나무라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도 사기꾼한테 당한 거면 언니는 고등학교졸업 못하게 되고 나는 고등학교입학도 못해보게 돼. 그것도 모자라서 우리가족 뿔뿔이 흩어져서 강령에서 야반도주해야 되는 상황인데 왜 자꾸 일을 크게 만들어!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일은 내가 확인해야겠으니까 연락 오면 꼭 말해”
다정하고 성실한 아빠지만 귀가 얇아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도 자신에게 좋은 말을 해주면 무턱대고 사람을 믿는 성향 덕분에 든든한 가장이 되기에는 부족한 아빠였다.
직장생활은 성실하게 했기에 부자까지는 아니어도 남들처럼 안락하게 생활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어느 날 느닷없이 도박에 손을 대더니 이내 좋은 직장까지 걷어차고 도박에 올인하는 아빠 때문에 집안에 광풍이 몰아쳤고 그 때문에 일찍 철이 들어버린 초희는 엄마와 제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이 아닌지 가슴이 답답해 왔다.
저를 보는 둘째 딸 눈에서 불꽃이 튀는 듯한 강렬함을 느낀 은철은 연락이 오면 바로 알리겠다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한숨을 내쉰 초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늦게까지 일하고 퇴근하는 엄마를 대신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좁은 주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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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나자는 순길의 메시지를 받은 은철은 연락이 오면 꼭 말하겠다고 한 둘째 딸과의 약속을 어기고 초희가 아르바이트를 나가는 시간 이후로 약속시간을 잡고 초희가 집을 나간 후 외투를 입고 자신도 집을 나섰다.
처음 연락을 받고 왔었던 곳과 동일한 회의실로 안내를 받은 은철은 회의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침 일찍 갑자기 연락 드려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은철씨가 급하게 확인을 해주셔야 할게 있어서 오시라고 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돈을 빌려준 사채업자가 따님들은 언제 데리고 가겠다는 구체적인 말을 한적 있습니까?”
“언제 데리러 온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그냥 이번 주까지 갚지 못하면 원금은 큰딸 몫이고 이자는 작은딸 몫이라고만 했어요”
사채업자 기준에 따라 이자를 계산한다면 원금보다 이자로 부담해야 할 비용이 훨씬 높으니 말인즉 둘째 딸 거래 금액은 원금과 이자를 합친 금액을 기준으로 최소 두 배는 불렀을 것이고 큰딸 거래 금액은 자신들이 받아야 할 빚과 같은 금액에 약간의 비용을 추가해 책정했을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분위기가 다운되어 있는 남자를 본 은철은 혹시라도 자신을 도와주기로 할 약속을 철회하는 것은 아닌지 눈치를 보며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겁니까?”
“은철씨 사채업자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고는 계십니까?”
“딸 애들이 앞으로 저를 대신해 빚을 갚아야 한다는 뜻 아닌가요?”
“궁극적으로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거래내용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굉장히 위험한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셨다는 겁니다”
굉장히 위험한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는 남자의 말에 은철은 제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 수 없었기에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위험한 계약서라니 그게 무슨 말 입니까?”
“계약서라는 건 그 안에 적혀 있는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한 후 도장을 찍어야 나중에라도 문제가 생기지 않는 법입니다”
“은철씨가 도장 찍은 사채업자 계약서를 확인했는데 계약서에 따르면 채무자가 돈을 갚지 못하면 채권자인 사채업자들은 부모동의 없이 자신들이 원할 때면 그것이 낮이든 밤이든 상관없이 따님들을 데리고 갈 수 있어요”
친절하게 설명했지만 자신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은철이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기만 할뿐 아무 말도 없자 우빈은 더 상세하게 설명했다.
“은철씨가 찾아간 곳은 그대로 법과는 상관없이 돈 장사를 하는 곳입니다. 그건 아시죠?”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따님들이 성인이 되어 돈을 갚아 줄 때까지 기다려 줄까요 아니면 하루라도 빨리 돈을 받기 위해 어떤 방법이라도 쓸까요!”
앞에 있는 젊은 남자가 말하는 위험한 계약서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제서야 이해한 은철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제 말을 이해한 듯 얼굴이 달라지는 은철을 본 우빈은 자신들의 거래에 조건을 더 추가해야 한다는 말을 꺼냈다.
“오늘 뵙자고 한 건 지난번에 말씀 드렸던 두 가지 조건 외에 한가지 조건을 더 추가해야 될 것 같아서 오시라고 했습니다”
“아.. 네에..”
“은철씨도 더 많은 내용을 아는 것도 위험하기에 자세하게 설명을 드릴 수는 없지만 중요한 내용만 얘기한다면 둘째 따님을 저한테 보내지 않으면 첫째 따님 안전도 보장할 수 없다는 겁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은철은 머리가 몹시 혼란스러웠다. 앞의 두 가지 조건은 얼마든지 지킬 수 있는 조건이었지만 방금 말한 조건은 자신이 대답하기 어려운 조건인데다 둘째인 초희로부터 단단히 경고를 받은 상태이니 섣불리 결정할 수 없었다.
심란한 마음으로 앞에 앉아 있는 젊은 남자를 보고 있던 은철은 둘째가 말 한대로 제가 이상한 사람한테 엮어 아까운 시간만 허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
“저기.. 둘째랑 의논하고 말씀 드리면 안될까요?”
“둘째 따님이 아직 어리던데 부인이 아니라 따님과 상의를 하신다는 겁니까?”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으니 어리다고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아빠보다 똑똑하고 야무져서 무슨 일이던 상의를 하기로 약속을 했거든요. 그리고 말씀하신 두 번째 조건의 당사자이니 상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종이에 적힌 텍스트로 둘째 딸인 은초희를 접했던 우빈은 은철이 제 딸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듣고는 은초희라는 아이가 어떤 사람인지 만나서 직접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아버님이 둘째 따님을 그렇게 믿는다면 제가 직접 만나서 의논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제 딸과 젊은 남자가 만나게 두어도 괜찮을지 은철이 고민하느라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자 우빈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버님이 제 말을 전하는 것보다 제가 직접 말하는 게 불필요한 오해도 만들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사채를 갚아야 할 날이 코 앞으로 다가왔으니 시간도 절약 할 겸 저랑 만날 수 있게 아버님이 연결해 주셨으면 합니다”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자신이 직접 만나겠다는 말에 은철은 코 앞으로 다가온 상환일자를 뒤로 밀수 없으니 초희가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해 보는 것이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그는 핸드폰을 꺼내 둘째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가 전화를 걸어 빚을 갚아 주겠다고 한 사람이 자신과 만나 직접 이야기 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고 말하자 초희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바로 만나겠다고 했다.
은철을 집에 보내고 둘째 딸인 은초희가 일하고 있다는 PA리조트로 바로 달려간 우빈은 프런트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제가 만나야 할 사람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열여섯이지만 해가 바뀌면 열일곱으로 한창자랄 꼬마아가씨는 제 손바닥에 가려질 정도로 작은 얼굴에 사람 마음을 꿰뚫어 볼듯한 크고 깊은 눈매는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누구라도 한번쯤은 뒤돌아 보게 만드는 매력적인 마스크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프런트에 있는 꼬마아가씨를 우연히라도 본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고 고객이 자신과 눈이 마주치면 반갑게 눈인사를 건네는 상냥한 직원이었다.
한 자리에서 오랜 시간 프런트를 지켜보고 있던 PA도련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프런트 앞에서 근무를 하고 있던 수석매니저가 프런트를 나가 도련님에게 인사를 하며 다가갔다.
제게 인사를 건네온 수석매니저와 잠시 이야기를 주고 받은 우빈은 순길과 함께 객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로 향했고 수석매니저는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는 프런트로 걸어갔다.
*****
수석매니저가 일러준 객실 안으로 도련님을 들여보낸 순길은 문 앞에서 누군가 오기를 기다렸다.
브이아이피 객실에 중요한 손님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삼십이층으로 올라간 초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오른쪽 코너로 돌아 객실 앞으로 다가갔다. 객실 앞에는 문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이 있었기에 초희는 수석매니저 이름을 말하며 지시를 받고 올라왔다고 말했다.
명찰에 있는 이름과 얼굴을 확인한 순길은 도련님이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 한 후 객실 문을 열고 직원을 안으로 들인 후 뒤이어 자신도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서도 멀리 가지 않고 문 앞에 서 있는 손님을 지나쳐 객실 안으로 들어간 순길은 손님이 왔다고 알린 후 몸을 돌려 손님에게 안으로 들어와 앉으라며 손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소파 깊숙이 몸을 기댄 채 저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차분한 눈빛을 긴장된 눈빛으로 바라보던 초희는 아빠가 전화로 말했던 사람이 눈 앞에 있는 남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적막한 곳에서 제 눈빛을 담담하게 받아내면서도 한치도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을 지켜보던 우빈은 소파에 기대고 있던 상체를 세우며 말을 꺼냈다.
“일하는 중인데 불러내서 미안해요”
“혹시 저를 아시나요?”
“아버님한테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보다 당사자한테 직접 들어야 오해가 생기지 않을 것 같아서 찾아왔어요"
아빠 이야기를 꺼내는 남자를 보며 초희는 그제서야 이 사람이 아빠가 전화로 말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오늘 결정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는데 아버님을 통하면 시간이 지연되어서 사채 상환일자를 맞추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일하는 중인 거 알면서도 왔어요”
"네"
"당사자가 나타났으니까 믿을 수 있겠죠?"
“저희 아빠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사람을 쉽게 믿는 편이라 제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이번에도 사기꾼한테 걸렸다고 생각했나 봐요?”
“솔직히 그런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여서요. 기분 나빴다면 죄송합니다”
“내가 기분 나쁠 일은 아니에요.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는 상황이니까 사과할 거 없어요”
이제 고등학생이 되는데 나이보다 어른스럽고 야무진 것이 아버지랑 이야기하는 것보다 딸과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는 생각에 우빈은 눈 앞에 있는 학생을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아빠한테 듣기로 사채 빚을 전부 갚아 주겠다고 하셨다는 데 맞나요?”
초희는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먼저 했다.
“맞아요”
“혹시 강령저축은행 직원이세요?”
“직원은 아니고 앞으로 강령은행 주인이 될 사람이에요”
눈 앞에 있는 남자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잠시 멍하게 있던 초희는 자신을 보고 있는 남자에게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다시 물었다. .
“제가 정확하게 이해를 못해서 그러는데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면 안될까요?”
“내가 아직 학생이라 그룹에서 직함이나 명함 같은 건 없어요. 아! 나는 없지만 직원은 명함이 있으니까 한장 줄게요”
우빈이 순길을 바라보자 순길은 슈트 안주머니에서 제 명함을 한 장 꺼내 초희에게 건네 주었다.
[PA그룹 VIP II / 경호팀장 최순길]
명함을 받은 초희는 'PA그룹' 이라는 글자를 본 순간 저를 찾아 온 남자가 말한 은행주인이 될 사람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했다. 조금 전과 달리 미묘하게 변한 표정에 우빈이 말을 꺼냈다.
“이제 정확하게 이해를 한 것 같으니 얘기를 나눠 볼까요!”
“네”
초희는 조심스럽게 머리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버님이 빌린 사채는 일반적인 고리대금이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