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쐐기(2)

1942 Words
강한류의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제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왕관은 청색 빛이 아른거리는 바닥에서 뒹굴뒹굴 강한류의 발 앞 한치까지 굴러가더니 멈춰 섰다. 최현의 호통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이리저리 공중을 헤집으며 돌아다니다 서서히 낮아지고, 남은 건 깨질듯한 고요함뿐이었다. 거룩하고 장엄한 신상은 궁전에 들이비추는 빛을 절반 가까이 막고 있었다. 그 어둑한 그늘 숱한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서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누가 누구인지도 보이지 않을 만큼 시선은 바닥을 곧추 내리 찌르고 있었다. 그중 단 한 사람만 제외였다. 신상 아래, 누군가의 얼굴이 보인다. 연약한 여인네의 얼굴이었다. 그녀의 품속에는 어린아이가 꼬옥 안겨있었고 그 위로 강경한 눈빛은 정면을 바로 향하고 있었다. 그 눈빛이 닿은 곳은 황혼의 등 뒤로 흔들리고 있는 강한류였다. 여인은 미쳐버린 이 나라의 제왕보다도 더 제왕다운 기류를 내뿜고 있었다. 강한류가 허리 굽혀 바닥에 놓여있는 왕관을 집어들었다. 금빛이 감도는 왕관 위에는 연꽃이 달려있었다. 손으로 슬슬 문지르다 뭔가 말하려는데 돌연 끊겨버렸다. “그를 죽여버려 줘. 내 목숨은 어떻게 해도 상관이 없으니깐.” 설민은 황급히 고개를 들고 햇살과 바라보았으니 되돌아오는 건 최아의 따뜻한 미소였다. “괜찮아, 무서워할 거 없어. 아버지를 위해 꼭 복수할 거니.” 그녀는 입을 열자마자 자신의 살결을 뚫고 들어오는 까칠한 침과도 같은 시선을 느꼈다. 아득하게 보이는 한강류의 투명한 동공을 보았다. 빛이 조금씩 반사되어 반짝이는 그 속을 당장에라도 헤집고 들어갈만 했지만, 결코 그 속내까지 닿을 수가 없었다. 다만 여자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인파속을 헤가르며 한강류를 향해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다가가고 있었다. 최아의 말에 최현은 두 눈 부릅뜨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오석산의 약효가 여간 강하지 않았는지 겨우 일으켜 세운 몸은 그만 평형을 잃고 다시 옆으로 쓰러지는 거였다. 옷이 몸의 겉에 씌워진 듯 이제는 그를 억누르며 마치도 영혼이 사라진 해골을 방불케 했다. “최아! 이 빌어먹을 년! 내 태자 형이 아니었으면 네년이 오늘날까지 살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래?” 듯했다 목청이 찢어지게 부르짖었다. 그리고 그건 그의 마지막 유언이 되었고. 기력이 다한 것인지 최현은 어느새 등 뒤에 나타난 듯했다 인식하지 못했다. 하얀빛이 붉은 줄을 가르며 공중을 휘갈랐다. 곡도는 가차 없이 또 하나의 영혼을 가로 베어버리고, 많은 사람이 몸은 일순 와락 내려앉고 말았다. 그 앞에는 뒹구는 머리통은 여전히 피를 뿜고 있었고. 한강류는 얼굴에 묻은 피를 쓰윽 닦아버리고 옆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보며 가볍게 내뱉었다. “결국 죽었군.” 흉악한 귀신이 자리하고 있었는지라 제왕의 몸과 머리가 분리되는 그 순간에도 현장은 조용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설민의 울음소리가 저만치에서부터 울렸다. 어린 맘에 아버지의 복수가 완성하였다는 쾌감와 불안감은 강당하기 어려운 무게였나 보다. 거의 구원하듯 최아의 품에서 발버둥치고 있었다. 반면 그윽한 안개로 흐릿하게 한층 덮여있는 최아의 검은 눈동자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온데간데없고 줄곧 바라보았다. 검붉은 피와 죽음으로 가득찬 이 장면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려 주지도 않았고 그냥 그대로, 설민의 두려움은 최아의 품에서 사르르 녹아내려 바람으로 되었다. 그리고 옷 결을 타고 최아를 스쳐지나 공중에서 흩어진다. 얼굴에 묻어있는 피는 그윽한 피비린내가 났다. 한강류는 하얀 손수건을 건네받고 계속 얼굴을 씻었다. 떨리는 두 눈과 손에 단단히 잡혀있는 곡도, 피가 한없이 흘러내린다. 한치의 떨림도 없이 최아는 흐르는 피를 내동댕이쳐질 배다른 형제의 쓰러진 모습을 지긋이 보았다. 청록색의 바닥은 아직도 빛이 아른거린다. 그러다 한강류는 앞까지 발걸음을 옮기고, 둘의 시선이 맞닿았다. 아무런 말도 없었다. 한강류가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고 시선을 아래로 틀었다. 그곳에는 나어린 설민이 있었다. 최아는 그제야 반응이 오는지 재빨리 품속의 설민을 내려놓았다. 설민은 곧바로 최아의 옆에 고분고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한강류를 향해 쭉 무릎을 꿇었다. 세상 모든 것을 하찮게 보던 그녀가, 이 나라의 제희로서, 그녀는 허리를 굽히고 두 손을 좌우로 펴더니 하얀 이마를 바닥에 갖다 댔다. “경아, 내가 많이 미안해... 그러니 내 아이만은 놓아주겠니?” 손에 들려 있는 곡도가 조금만 힘주어 휘둘러도 최아의 목까지 잘라내기 충분했다. 늑대 앞에 끙끙대는 양처럼, 쭉 죽음을 코앞에 두고 하는 말이었다. 최현의 피로 적셔져 있는 손수건을 꽉 쥔 채, 한강류는 최아의 턱을 잡고 위로 당겼다. 최아는 강한 힘에 이끌려 고개를 들고 한강류를 쳐다봤다. 먼 옛날의 기억이 뇌리에 스쳐 지나가고, 이제는 모두 과거가 되어 있었다. 둘은 그렇게 가까이, 피비린내와 그 속에 은은히 풍겨오는 쇠 녹 냄새를 가로하고 한참을 서 있었다. 하지만 폭군은 돌연 조롱 섞인 눈빛으로 회답했다. “보아, 나도 전에는 그대에게 그렇게 말했었지.” 이윽고 곡도가 머리 위로 추켜들었다. 아까까지 살기를 가득히 품었던 칼날은 왠지 적막한 기운만이 감돌고, 최아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미동도 없이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칼날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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