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는 푹신했지만, 침대를 둘러싼 보라색 숄이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도명은 사각 침대에서 일어나서 주위를 관찰해보기로 했다. 컴퓨터는 없었다. 만년필 그리고 종이, 각종 붓들과 물감, 작업하는 공간들이 즐비해 있었다. 벽이 진회색이라서 컬러 물감들이 돋보였다. 방의 원래 주인은 시계를 좋아했었는지 명품시계들도 가득했다. 남자시계인걸로 보아하니 이 물건들의 주인은 남자일 것이다. 도명은 각종 추측이 당장에는 별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았다.
눈길을 돌리던 와중에 한 곳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누군가의 초상화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얼굴의 반은 여자였다. 중년의 여성이 이마에 주름이 패여있다. 시선은 정면을 향해있었고, 새하얀 피부는 서양인을 연상시켰다. 입술은 연한 주황빛이었는데 도명의 눈이 이상한 것인지 말을 할 것 마냥 움직일 것 같았다. 특이한 점은 귀가 아주 작았다. 반대편 얼굴을 봤다. 얼굴의 반은 난생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얼굴의 반이 눈이었는데 금색테두리를 하고 네이비색 눈동자를 가진 눈이었다. 입은 없었고, 자세히 보니 눈동자 안에는 시계초가 흔들리며 시간의 흐름을 타고 있었다. 옆의 얼굴과는 달리 귀가 엄청 크고 길었다. 피부가 까맣고 머리칼은 빨간색인데다가 중성적인 얼굴이여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숏컷의 얼굴은 시가를 물고서 연기를 내뿜었다. 도명은 그림을 한참 보다가 기분이 꺼림칙한 것은 처음이었다. 마치... 재미있는 영화를 한편 보다가 마지막 결말이 망쳐버린 느낌.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그림이었다.
"악몽을 꿀 것 같단 말이지...단순히 잠만 자기에는 아까운 공간 같기도 하고."
도명은 혼잣말을 중얼중얼 거렸다. 상사에게 혼나면 늘 나오고는 하는 버릇이 여기서 튀어나와 버렸다. 잠옷이 곱게 개어 있어서 도명은 네이비색 벨뱃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생각보다 포근한 두께여서 잠이 잘 올 것 같았다. 도명은 낯선 장소에서는 잠이 잘 안왔다. 잠귀도 밝았고, 조금 예민한 구석도 있었다. 침대로 가서 잠깐 누웠다. 머리만 붙여야지 하면서 천장을 보았다. 천장도 기괴했다. 담배로 둘러싸인 조명?이었다. 가운데는 체리색 조명이 동그랗게 있고 둘레에는 유럽식 시가와 다양한 담배들이 조명을 장식하는 모습이었다.
'나참... 헛게 다보이네, 피곤해서 그런걸거야.'
도명이 긴장을 풀려는 찰나, 윗층에서 베라가 소리질렀다. 누군가의 침입으로 베라는 화들짝 놀라서 도망치려는 것 같았다. 도명은 구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지만, 꾹 참았다. 도명 자신의 목숨도 안전하지가 않다. 목이 너무 조여왔다. 뜨거워지는 목걸이 때문에 숨이 막혀온다. 도명은 옆에 있는 벤치로 목걸이를 잘라내려고 손끝을 책상으로 뻗었다. 벤치 손잡이가 도명의 손아귀에 들어오려고 할 때 문이 열렸다. 사람이 아니었다. 어둡고 날카롭고 거대한 손이 블랙홀을 만들었다. 도명은 신에 홀린듯이 일어나서 블랙홀로 걸어갔다. 그 때, 베라가 외치는 음성이 들렸다. 마치 천사의 노래 같기도 하고 악귀를 쫓는 주문 같기도 했다.
베라의 말이 끝나자마자, 검은 손은 스르륵 사라졌다. 도명은 숨을 가쁘게 쉬었다. 죽다 살아난 기분이었다. 검은 손에서 본 장면은 잊을 수가 없이 끔찍했다. 도명의 엄마가 살해당하는 모습이었다. 살인자가 도명의 눈을 마주치려는 찰나, 베라가 검은 손을 처치해 버린 것이었다.
"도명, 괜찮아??"
"그 놈이 날 찾는것 같아..."
"그 놈?"
베라는 예리한 눈초리로 도명을 보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도명은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눈빛이 강렬해서 건들였다가는 폭발할 것만 같다. 도명은 생각을 더듬다가 베라에게 물었다.
"여기서 제일 높은 곳이 어디지? 일단 성당을 벗어나야 할 것 같아. 내부가 더 위험해. 베라 난 갈게. 고마웠어."
"세상에 공짜란 없는 거...모르니?"
베라의 목소리는 차갑게 변했다. 도명의 목을 손으로 순식간에 잡아 벽으로 밀쳤다. 벽에서 벽돌 가루가 부서져 내렸다. 도명은 크흡 하며 팔다리를 휘저었다. 베라의 손톱이 도명의 목에 파고들었다. 피가 흘러내렸다. 도명은 입술을 비틀다가 베라의 손목을 깨물었다. 베라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때, 도명은 목걸이가 녹아내림을 느꼈다. 벽돌이 부서질 때, 벽돌로 베라의 머리를 내리쳤다.
"아악.!!!"
베라, 그녀도 도명을 죽이려 한 인물이었다.
도명은 자신이 숨어 지낼 곳을 찾기로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다. 도명은 베라가 들고있던 작은 나무 십자가를 품에 넣고 성당을 빠져나왔다. 제일 먼저 가야 할 곳, 이 동네의 가장 높은 산이었다. 저 멀리 보랏빛 연기가 자욱했다. 도명은 목이 따끔거렸지만 평온해진 목걸이에 안도했다. 가까운 곳에서 작은 소리로 흥얼거리는 무리들이 보였다. 사람인가? 요괴인가? 그들은 손에 손을 잡고 둥그런 원을 만들고 있었다. 중간에는 제물이 된 짐승이 흐물거렸다.
"신은 우리를 버리지 않아~"
"그나저나 베라는 언제오는거야?"
'베라?'
베라와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도명은 살금살금 기어서 몸을 숨겼다. 기침 소리 발자국 소리라도 내면 들켜버릴 것만 같다. 눈만 살짝 빼꼼이 들고 보았다. 도명은 하마터면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제물이 된 짐승의 얼굴은 도명이었고, 요괴라고 생각했던 그들은 도명이 베라에게서 가져온 십자가를 모두 들고 있었다. 요괴들은 큰 머리에 아주 짧은 팔다리에 눈코입 중에 입만 있었다. 즉시라도 잡아 먹을 듯한. 그 무엇도 가리지 않고 죽여버릴 듯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야 하지...'
도명은 무교지만 기도를 드렸다. 신이 있다면 답을 내려주세요...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 때 총소리가 들렸다. 요괴들은 괴성을 지르며 도망쳤다.
"피하자 얼른 피해!!"
도명은 구원자 따위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틈을 타서 도주했다. 반대편으로 돌아서 달리고 또 달렸다. 검은 하늘에는 초승달이 구름으로 가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