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네크는 기침을 콜록콜록 내뱉었다. 머리가 아프고 지끈거렸다. 얼굴을 덮은 터번을 걷어내고 주위를 확인했다. 십자가는 아네크의 품에 들어와 있었다. 냉기를 품은 십자가는 부르르 떨고 있었다.
아네크는 몸을 일으키려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웅크렸다. 주위는 어두컴컴해서 빛 한줄기 보이지 않았다. 바닥은 끈적끈적한 질감에 약품을 가득담은 물약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불길한 기운을 나름 즐기는 아네크에게도 두려움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몇분간 웅크리다가 한 손으로 벽을 만졌다. 날카로운 가시가 드문드문 박혀있어서 하마터면 소리를 낼뻔했다.
그 때였다. 누군가 아네크의 어깨를 잡아챘다. 어깨를 양쪽으로 잡아채고 재빨리 아네크의 얼굴을 검은 천으로 덮어버렸다. 아네크는 발악을 했지만 그 어느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다.
"아네크 고개를 들어봐."
눈이 퀭한 아네크는 앞에 흐릿한 시야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조금씩 흔들려서 시계추처럼 고개를 왔다갔다했지만, 남자는 아네크의 뺨을 후려쳤다. 의자에 묶인 아네크는 입에 재갈을 물고 있어서 눈물만 맺혔다. 손발이 다 묶여버려서 남자에게 다가갈 수 조차 없었다. 남자는 아네크의 눈에 인공눈물을 넣어주었다. 그제서야 아네크는 눈을 제대로 뜰수 있었다.
"너...너는 이도명?"
이도명이었다. 도명은 고개를 젖히고 한참을 웃다가 아네크를 노려봤다. 허공을 보면서 담배를 피우다가 발로 담배를 짖이겼다. 도명은 서있다가 천천히 아네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네크의 턱을 휙 잡더니 귓가에 무언가 이야기했다. 아네크는 낯선 목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인간과 괴물 사이의 목소리 같았다. 기계음과는 차원이 달랐다. 동굴을 통해서 나오던 음이 급격하게 얇아지고 변조되는 느낌이었달까.
"하하... 십자가를 가져오게 되면 치명적인 대가를 치룬다는 것을 똑똑히 알게 해주지."
도명은 수면제를 아네크에게 강제로 먹이고 재갈을 물렸다. 아네크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같이 가야 한다. 아니 내가 그곳에 있어야 한다.
도착한 곳은 병원이었다. 도명은 608호실로 조용히 들어갔다. 이순자. 처음 보는 노년층 할머니의 명은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운명이 정해진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도명은 한동안 할머니를 지켜보다가 공기주입관을 떼어버렸다. 삐- 하는 소리와 함께 도명은 병원을 도주했다.
"뭐하고 온거야 도대체!?"
"다 사연이 있는 법이지... 아네크, 우리가 또 다시 갈 곳은 말이지."
그 날 이후 아네크와 도명은 한팀이 되어 움직였다. 아네크는 십자가를 탐낸 대가로 손가락을 두개를 잘렸다. 그 날에는 비가 엄청 많이 왔다. 눈앞이 한참 가려질 만큼.
"이도명 ...정체가 뭐야 콜록.."
"사람을 죽이는 몬스터라고 들어봤어? 나도 이런 삶을 살기 싫었는데 말이야."
도명은 번뜩이는 영감이 생겨나면 누군가의 자화상을 그렸다. 누군가가 시킨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화상을 다 그리고 나면 항상 다른 장소에 도달해 있었다.
그 순간, 도명은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많이 보던 사람이다.
차유정의 아버지 였다.
유정의 아버지...
차유정과 안본지는 꽤 되었다. 유정의 아버지를 그리는 내내 손목이 너무 아팠다. 인대가 끊어질 것 같았다.
"아네크 마지막 좀 도와줘..."
"알겠어 도명 잠시만. 다 됐다."
도명은 신음을 내뱉으며 뒹굴었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저려왔다.
"오랜만이네 이도명?"
도명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네크 대신에 다른 사람이 버젓이 서있었다.
"그렇게 도망치면 재미없잖아."
차유정이었다.
도명은 당황해서 자신의 몸을 방어했다. 그러다 화들짝 놀랐다. 십자가와 목걸이가 없었다. 목걸이가 유정으로 되살아 난 것이었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지금까지는 몸풀기였다고 생각하면 될거고, 이제부터 시작이야."
도명은 머리를 굴렸다. 무슨 상황이길래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거야. 유정은 잠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곧장 말했다.
"우리 아빠를 죽여줘. 그 다음 우리 동네를 없애줘. 부탁이야."
유정은 진심어린 눈동자로 도명을 뚫어져라 봤다. 부모를 죽여달라는 자녀... 유정의 가정환경이라면 이해할 수는 있었다.
"잠시만, 그럼 난 살인범이 되는 거잖아. 네가 어떻게 책임질건데?"
"속삭이는 밤이 매주 목요일마다 열려. 이 곳의 행사같은 건데, 그 때 누명을 씌울 누군가를 보내줄게."
유정은 그 말을 남기고선 마법처럼 사라졌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아네크도 신중한 표정이었다.
"도명, 이건 너무 도박성이야. 저 여자를 어떻게 믿고 일하지?"
"인생은 원래 도박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