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 만큼은

3643 Words
캐나다 태평양 연안의 벤쿠버 섬 남쪽 끝에 위치한 정원의 도시, 빅토리아. 눈이 시리도록 파란하늘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아름다운 항구를 뒤덮었고, 관광객을 태운 페리와 수상버스가 분주히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여기 호텔에 묵게 됐다고 하니까 와이프가 여기서 꼭 '에프터눈 티' 를 먹어야 한다고 했었는데, 그 이유를 알겠네요." 호텔 레스토랑에서 바라보는 생기 넘치는 6월 말의 빅토리아는 싱그럽고 아름다웠다. "그러셨어요?" 린이 볼펜을 내려 놓으며 되물었다. "네. 그러더라고요. 근데 난 이 향기 좋은 차도 차지만 여기서 바라 보이는 항구가 더 마음에 드네요." 내일 있을 논문발표 준비와 관련 얘기를 끝내고 바깥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혁준이었다. "후후후. 그건 저도 그래요. 가끔 여기 오게 되면 꼭 한 번은 찾게 돼요. 항구 쪽으로 나가 보시면 더 좋으실 거에요. 호텔에서 가까워서 산책삼아 둘러보시기에 좋아요. 차 드시고 나서 천천히 다녀오세요." 영국에서 온 이주자들이 만든 영국풍의 도시, 그 느낌이 주는 아름다움 때문인지 유난히 많은 관광객들이 붐비는 곳이었다. "허허허. 그래야 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좁은 비행기 안에만 갇혀 있었더니 좀이 쑤시던 참인데. 바닷바람도 쐬고 나갔다 와야 겠네요." "네. 좋은시간 되실 거에요. 저도 궁금한 건 이제 다 여쭤본 것 같아요." 옆에 흐트러진 논문자료와 서류들을 정리하며 말했다. "그런데... 권교수님! 최교수님도 계신데 통역은 왜 부탁하신 거세요?" 공항에서 부터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궁금했었다. 주원이 있다면 굳이 제가 없어도 충분할 일이었다. "아. 그게 최교수 일정이 좀 바뀌었어요. 내가 논문 1저자고, 최교수가 논문 2저자에요. 원래라면 최교수는 학회참석 예정이 없었어요. 발표는 내가 할테지만 발음이 매끄럽지 않고 질의 응답시간에 여러가지로 착오가 생길 수도 있어서 통역을 부탁했었습니다. 최교수 일정은 불과 일주일 전에 바뀐 거고요. 원래라면 최교수는 조금 더 여유있게 나올 생각이었어요." 그제야 이해가 갔다. 굳이 통역이 없어도 될 자리였으니까. "그...런데 여...유롭게 나온다는 건?" "아? 아직 얘기 못 들었어요? 이번 9월 학기부터 UBC에서 강의 시작해요. 병원근무도 마찬가지고." "아..."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 졌다. 4박 5일, 학회일정만 잘 피하면 될 거라 생각한 제 자신이 한심했다. 같은 학교, 같은 병원, 그것도 같은 병동이라니... "사실 아직 여유가 있는 편이죠. 가을학기니까.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준비가 급해졌어요. 학회참석 여부도 바뀌고요. 어차피 참석자 명단에 있었으니까 학회참석이야 가능한 일이었지만, 기말고사며 이것저것 마무리 하느라 꽤나 고생했을 거에요. 허허허. 나야 최교수가 옆에 있으니 더 없이 든든해서 좋지만 말이에요." "아... 그랬군요." "케서린 선생도 내과라고 들었는데..." 혁준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 내과 펠로우에요." "펠로우면... 잠깐 쉬었던 겁니까? 최교수랑 같이 근무했었으면 지금은..." "네. 그렇죠...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어요. 3년차 끝내고 2년 정도 쉬었습니다." "그랬군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 그림슨 교수 칭찬이 대단했어요. 몇차례 학회에서 만난 인연으로 가끔 연락을 주고 받았어요. 마침 캐나다에서 열리는 학회라 혹시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했더니 단번에 케서린 선생을 추천해 주더라고요." 사람좋은 얼굴로 혁준이 칭찬을 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 통역 부담이 조금 더 커지는 것 같은데요." "하하하. 그런 뜻으로 한 이야기는 아닌데 말입니다." 늦은오후, 창밖으로 스며드는 햇살이 더 없이 편안해지는 시간. 에프터눈 티와 함께 오늘 하루의 긴장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 "굿나잇! 코코! 아이러브유, 투! 바이!" 저녁 9시가 넘은 시간이지만 여전히 하늘에 걸쳐져 있는 붉은 해를 바라보며 호텔 발코니에 서 있었다. 사랑하는 이와의 통화 덕분이었을까? 얼굴가득 환한웃음을 띠운 채 핸드폰을 내려 놓으며 제 앞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닷바람에 온 몸을 내맡겼다. "행복해 보인다." 제 옆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옆을 바라봤다. 조금은 쓸쓸해 보이는 듯한 주원이 옆 발코니에 선채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들었을까? "언...제... 나왔어요?" "조금 전에. 왜 난 생각조차 못했을까? 네가 나 아닌 다른 사람한테도 사랑을 속삭일 수도 있다는 걸..." 잔뜩 상처받은 말투.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였지만 다른 남자의 이름을 부르며 사랑한다 말하는 저를 질책하는 듯 했다. "..." "항상 나랑 같은 마음일 거라 생각했었어. 내 마음에 린이 너 밖에 없는 것 처럼." "그래야 할... 이유는 이제 더 이상 없으니까요. 먼저 들어갈게요." 제 할 말만 내뱉고 돌아서 가려 했다. 어차피 여기서 바닷바람을 쐬며 머릿속을 정리하는 건 물 건너 간 일. 최대한 부딪히지 않는 게 서로를 위해 좋은 일이었다. "린아! 잠깐만! 가지마!" 다급한 말과 함께 주원이 발코니 위로 올라서고 있었다. "아악! 지금 뭐하는 거에요? 내려서요." 제 말이 끝나기도 전 주원이 제 쪽으로 훌쩍 뛰어넘어왔다. "가지마! 우리 잠깐만! 잠깐만 더 얘기해." 급하게 린의 팔을 낚아챘다. "미쳤어요? 여기가 몇 층인지 몰라요? 어떻게 거기서 여기로 넘어 올 생각을 해요? 그러다 발이라도 헛디디기라도 했으면." 참고있던 숨을 몰아 내쉬며 쏘아 붙였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가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그것도 바로 제 눈앞에서 그가 사라졌다면... "그랬다면 적어도 내 눈에 비친 마지막 모습은 너일테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았겠다. 널 볼 수 조차 없없던 시간은 더 큰 고통이었으니까." "미쳤어." 굳이 누구에게 하는 말이 아닌 혼잣말을 읊조리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주원을 노려보는 린의 눈에 물기가 비쳤다. "몰랐어? 오래전 부터 내가 너에게 미쳐있었다는 거? 그때도, 지금도, 한결같이, 여전히, 미쳐있어. 너한테." "하아, ... 이제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놔줘요." 주원의 손에 붙잡혀 있는 제 팔을 비틀며 말했다. "내가 잘못될까... 걱정했어?" 오히려 린의 팔을 잡은 손에 더 힘을 주며 물었다. 물기 가득한 눈빛, 흔들리는 시선이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누가 그랬더라도 걱정할 일이었어요. 그런 무모한 일 다시는 하지 말아요." "후후훗. 그래도 무모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이렇게 너를 마주할 수 있는 기회정도는 얻었으니까... 저녁 식사자리에는 왜 안 나온건데?" "생각 없었어요. 아까 권교수님이랑 오후 늦게 티타임 가지면서 스콘이며 샌드위치도 먹었어요." "그럴 줄 알았으면 일부러 자리 피해주지 않는 건데... 그랬다. 너 불편할까봐, 조금이라도 네 옆에 있고 싶은 것도 참아가며 나가지 않은 자리였어." 사실 덕분에 조금은 편안했던 자리였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내일 일정관련 얘기를 나누어야 했다. 장시간의 비행시간도 있었던 터라, 점심 후 잠시 휴식시간을 가졌고, 늦은오후 티타임을 가지기로 했었다. 불편한 마음을 갖고 나간 자리, 다행히도 주원은 그 자리에 없었었다. "식사 거르지마. 나도 알아. 지금 너한테 나라는 존재가 편하지만은 않을 거라는 거. 그래도 밥은 같이 먹어. 그래야 나도 마음이 놓이니까." "... 그래요. 그래야 마음이 놓인다면 그럴게요. 그게 할 말이었다면 다 했으니까, 이제 그만 이 손도 놓고, 가요." 다시 한 번 제 팔을 빼내려 했다. "린아!" "제발!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이제는 그 사연 가득한 눈빛도 그만하고요. 앞으로 병원에서도 마주쳐야 한다면서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그렇게 부르질 않을 거잖아.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불러줘요. 부탁이에요." 애원이라도 하는 듯 말했다. "왜? 설마 다시 흔들릴까봐 겁이라도 나는 거야? 네게는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흔들까봐? 네 마음이 흔들릴까봐?" 신랄하게 비꼬는 말투가 쏟아져 나왔다. 처음부터 이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계속해서 좀 전의 그 환하게 웃던 모습이 떠올랐다. 제게 했던 것 처럼, 어쩌면 그 보다 더 달콤한 목소리로 그 망할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그녀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서 들려오는 듯 했다. 지금 제게는 그저 혐오에 가득찬 표정, 왜 다시 나타났냐는 눈빛 밖에는 보여주지 않으면서 말이다. "하아. 흔들려요? 누가요? 내가요? 착각하지마요. 당신한테는 그런 감정 한 톨도 남아있지 않아요. 단지, 편하지 않을 뿐이에요. 그래도 한때나마 사랑했던 사람이었으니까." "한때? 하아. 그게 너한테는 그냥 다 지난 과거가 돼 버렸구나. 지난 일이고. 그렇게 쉽게 잊을 수 있었던 일이었나보네. 병신처럼 나 혼자만 그 시간에 얽매여서,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한 채, 언제쯤 널 다시 볼 수 있을까, 가슴아파하면서, 그랬던 거였어." "기억에 착오가 있으신가본데, 먼저 헤어지자고 했던 사람, 내가 아닌 당신이었어요." 단단해진 눈빛으로 린이 말했다. "알아. 후회하고, 또 후회했어. 그 말을 내뱉었던 날 지금도 증오해. 그 날, 미친듯이 왔던 길을 되돌아 뛰어갔는데 이미 넌 가고 없더라. 집에도, 학교에도, 그 어디에도,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출국날짜를 미루고, 또 미뤄도, 네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어." "이제 와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 아무말 없이 그녀의 팔을 천천히 놔주었다. "최교수!"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고 혁준이 발코니로 걸어나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 주원이 재빨리 린을 제 품으로 당겨 가둬 안고는 발코니 구석진 곳으로 가 섰다. "이 사람, 대체 어디 간 거야?" 혁준이 발코니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쿵쿵쿵! 제 것인지 저를 가둔 저 사람의 것인지 모를 거센 심장박동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다잡고 있던 마음이 한 순간에 흘러내렸다. 잠깐, 아주 잠깐만, 아무 일도 없었던 오래전 그 날들처럼, 그냥 아무 것도 모른척. 이 사람 품에 안겨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지금 이 욕심이 내게 또 다른 시련을 줄지 모른다 해도. 지금 이 순간 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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