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도 슬슬 더워지니… 태오한테 잘라달라 해볼까.’
자르면 이런 느낌이려나. 머리카락을 한 데로 모아 들어 올려 보았다. 목덜미로 따뜻한 물이 쏟아졌다. 절로 나른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형, 나 비누 좀…….”
세정제를 찾아 무심코 돌아봤다가 욘의 서슬 퍼런 시선과 마주쳐 화들짝 놀랐다. 뭐야, 왜 또 사람을 저렇게 봐?
욘은 물줄기 아래에 선 나를 훑어보고는 대뜸 손을 뻗었다. 크고 길쭉한 손이 닿은 곳은 내 뒤통수였다. 이 정도 크기면 나와 거의 비슷하겠다. 아니, 더 클 수도 있겠군. 얼빠진 생각을 하면서 욘의 눈치를 보았다.
‘뭐 어쩌려는 거지.’
욘이 다정하게 내 머리를 감겨준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쯤이면 거의 세계의 종말을 걱정해야 한다.
욘은 나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물미역처럼 흐느적거리는 내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심각한 건지 멍한 건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으악!”
느른한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온다 싶던 때, 갑자기 욘이 내 머리채를 집어 던졌다. 난데없이 제 머리카락 다발로 낯짝을 얻어맞았다. 아프진 않았지만 물방울이 콧속으로 들어와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아, 뭐 하는 거야, 진짜!”
“기분 나빠서.”
볼멘소리를 내어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자기가 만져놓고……. 내가 말을 말아야지. 욘을 한 번 흘겨보고 손을 뻗어 뒤에 있던 비누를 잡았다. 저 새끼는 내가 뭐가 필요하다 그러면 굳이 찾아서 갖다 버릴 인간이다. 투덜거리며 몸에 비누를 빡빡 문질렀다.
“씻고 서관으로 돌아갈 거냐?”
“그럼 내가 어딜 가.”
욘의 물음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네가 누구와 뒹굴든 내가 상관할 바 아니지만, 그 ‘틈’은 들키는 일 없도록 해.”
등 뒤에서 이어지는 목소리에 몸이 쩡 하고 굳었다. 기가 차다. 그게 저가 밤새도록 범한 가족… 비스름한 사람에게 할 말인가?
웬만한 망발로는 꿈쩍도 안 하는 심장이 분노로 펄떡거렸다. 꽉 다문 턱에서 뿌득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다. 식었던 눈가가 다시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뭐 하는 거야, 씻는 중이잖아.”
아직 몸에 비눗기가 남아있었지만 그대로 샤워 부스를 박차고 나왔다. 욕실을 훑어보자 예상했던 대로 새 샤워 가운이 하나 벽에 걸려있었다. 뒤에서 뭐라 외치는 욘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가운을 걸치며 욕실을 빠져나갔다.
뚝뚝 흐르는 물이 고급스러운 바닥재를 적셨다. 시야에 들어온 방의 풍경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속이 한 번 울렁거렸다.
“페이!”
어느새 욕실 문가까지 따라 나온 욘이 짐짓 엄하게 외쳤다.
“알아서 씻을게. 내 몸이야 형이 상관할 바 아니라며.”
너덜너덜한 몸을 가운으로 가렸다. 험악하게 굳어진 욘의 표정을 일별하고 철문을 열었다.
* * *
양태오는 함께 생활하게 된 지 얼마 안 된 제 룸메이트의 너른 등판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아파했으니 외박을 한 거야 그렇다 치자. 그런데 오후가 다 되어서야 저 꼴로 돌아온 건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물에 한 번 담갔다 꺼낸 인형처럼 흠뻑 젖어서는 가운 하나 걸친 채로―심지어 신발조차 신고 있지 않았다―기숙사 앞에 나타났을 땐 물귀신인가 싶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복통이 나은 것은 아닌지 창백한 얼굴로 연신 비틀비틀 걷던 페이는,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뻔뻔하게 저를 부축하라며 손을 까닥거렸다.
늘 아니라며 새침을 떼지만 역시 귀족가의 도련님이라 사람 부리는 데 어색함이 없었다. 그러곤 방에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누워 저러고 있다.
“야, 너 오전 일 안 나온 거 내가 조장한테 잘 말해서 그냥 넘어간 거야.”
태오가 헛기침을 하며 페이의 주위를 끌었다. 그러나 듬직한 등짝은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
‘씻다 쫓겨났나?’
욘 이와의 성격이 까탈스럽다는 건 전해 들은 바가 있어 대강 알고 있었다. 별로 놀랍진 않았다. 귀족이란 대개 성격이 이상하기 마련이었으니.
하지만 대체 무슨 사정이 있어야 아픈 사람을, 그것도 평생 함께 살았다던 애를 이 꼴로 쫓아낼 수 있는 것일까? 태오는 페이의 눈치를 살피며 기웃거렸다.
“…오후 업무도 못 하겠어?”
덩치도 산만 하고 어디 가서 무시당하게 생기지도 않은 놈을 왜 이렇게 챙기게 됐는지 모르겠다. 태오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알았어. 쉬어라, 인마. 근데 내일은 용병들 들어오는 날이라 아파도 조장이 안 봐줄 거야. 정신 차리면 식당 가서 밥 먹고 기운 챙겨.”
시체처럼 누워있던 페이가 그제야 고개를 돌려 태오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직 습기를 머금은 머리카락이 물방울을 똑똑 떨어뜨렸다.
‘더럽게 잘생겼네.’
쳇, 하고 태오가 속으로 혀를 찼다. 저러니 백작의 밤 시중 노예로 팔려온 것이겠지.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백작의 악취미에 혀를 내둘렀지만 이제는 이해가 갔다.
시커먼 사내새끼 주제에 색기가 있다니까. 아니, 있는 정도가 아니라 넘쳐흐른다, 흘러. 태오는 페이의 시선을 피하며 몸을 일으켰다.
요 며칠 부대끼며 살아보니 확실히 알겠다. 남자 정부 따위 역하다고 생각한 자신조차 때때로 시선을 빼앗길 만큼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최근에 복통을 호소하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정도가 더 심해졌고.
‘난 남자한테 관심 없어서 다행이야.’
‘그런’ 취향인 놈들은 눈이 뒤집힐지도 모르겠다. 사고 쳐서 잡역부 신세가 되어버리긴 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백작의 정부였으니 멋모르고 달려들었다가 신세 망칠 멍청이들이 벌써 눈에 보이는 듯했다. 안 그래도 내일이면 힘만 좋은 멍청이들이 우르르 몰려들 텐데…….
잘생기고 몸 좋으면 뭐 하나. 페이의 훤칠한 생김새를 내심 질투했던 태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런 인기는 누가 준다 해도 사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