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에 걸린 화면을 살폈다. 벌써 점심 휴식 시간이 끝날 시간이다.
“고마워.”
기숙사 방을 나서는 붉은 머리의 청년을 향해 페이가 외쳤다. 에휴. 태오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니꼬운 점이 없진 않지만, 성격이 괜찮은 귀족도―아니라고 고집을 부리긴 하지만―존재한다는 것을 페이와 함께하면서 느끼고 있었다.
“오냐.”
가볍게 대꾸한 뒤 방문을 닫았다. 기숙사 복도는 오후 업무를 위해 이동하는 시종들로 북적거렸다. 체구가 작은 양태오는 능숙하게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러 복도를 빠져나갔다.
“어? 비서님 아니세요?”
위층으로 올라가는 층계 근처에 거대한 남자가 서있었다. 태오가 피트 랭을 향해 알은체를 했다.
“아, 태오구나.”
“여기까지 무슨 일이세요?”
랭 비서는 일개 시종이라 해도 허투루 다루지 않는, 보기 드문 관리자였지만 이렇게 직접 하인들의 생활 공간을 찾는 경우는 없었다.
아니지, 며칠 전에 한 번 기절한 페이를 안고 들어온 적이 있었지. 태오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피트는 조금 당황한 눈치로 계단 뒤쪽, 그림자가 어둑하게 드리워진 공간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찾는 사람이라도 있으세요?”
피트 랭이 새로 들어온 노예와 자주 얽힌다는 건 성안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시건방진 노예에게 맞기도 하고―사실이 아니다―숲의 오두막에서 그의 시중까지 들었다지―역시 사실이 아니다―.
“그런 건 아니지만… 어제 페이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어제 페이가 외박했다는 걸 아는 건 우리 방 사람들 빼곤 없을 텐데? 태오가 고개를 기웃거렸다. 아파서 오전 근무를 빼먹었다는 거면 몰라도…….
“아, 예. 몸이 안 좋다고 하더니 그 형… 욘 이와 님 방에서 자고 온 것 같더라고요.”
뭐, 성 대부분을 관리하는 분이니 모를 일이 없기도 하겠지. 태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돌아오는 대꾸는 없었다.
태오는 어두침침한 곳에 서있는 남자의 눈치를 한 번 살폈다. 사람 좋게 생겼다고만 생각했는데 가만히 있으니 제법 위압감이 느껴진다.
“그래, 그렇구나.”
태오의 시선을 눈치챈 피트가 헛기침을 하며 층계 난간에 손을 뻗었다.
“올라가시게요?”
“…내가 여기에 있는 건 이상하잖니.”
피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한 뒤, 태오와 시종들을 따라 기숙사 계단을 올랐다.
* * *
한 사람의 삶이 걸레짝처럼 패대기쳐지든 말든 시간은 평소와 다름없이 잘만 흘렀다.
멍청해서 그런가, 심장이 두방망이질 쳐질 정도로 격렬한 감정도 자고 일어나면 한풀 꺼졌다. 아침에 일어나니 평소처럼 배도 고프고, 삐죽삐죽 삐친 태오의 머리털―새빨간색이라 마치 장작불 같았다―이 웃겨 보이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기분 나쁠 일도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분 나쁠 일은 맞지만 새삼스럽진 않은 일이랄까. 욘이 정떨어지는 소리만 조잘대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말이다.
“어, 양이 많은데요.”
식판 위로 두툼한 소시지 세 개가 떨어졌다. 먼저 배식을 받은 사람들의 식판엔 달랑 하나뿐인 소시지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앞치마를 입은 팽 씨가 집게를 들고 있었다.
“요즘 몸 상태도 안 좋았잖아. 많이 먹어.”
늘 무뚝뚝한 표정에 말도 없어서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적 없는 팽 씨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예상치 못한 호의에 가슴이 뜨뜻해졌다. 연거푸 감사하다 인사를 하니 주름이 자글자글한 깡마른 뺨이 한 번 씰룩거렸다.
“야, 넌 왜 소시지가 세 개야.”
음식이 수북하게 담긴 식판을 들고 태오 옆에 앉자 볼멘소리가 튀어 나왔다.
“팽 씨가 줬어.”
“흥, 나는 사정사정을 해도 빵 한 쪽 안 주더니.”
태오가 투덜거리며 포크를 들어 올렸다.
“근데 너 배는?”
소시지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양이 많지 않을까 싶었는데 막상 음식을 입에 밀어 넣으니 허기가 들끓는다.
“괜찮아.”
우물우물 밥을 씹으며 대답했다. 실제로 이제 복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욘 덕분에 얻은 말 못 할 통증은 아직 남아있지만 그때의 복통에 비하면 참을 만했다. 그 괴상한… 뭐라 불러야 할지조차 모르겠는 기관이 변성을 마친 거겠지.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그나마 보이는 곳이 아니라 다행인가.
식사 시간 전, 화장실에서 잠깐 확인을 해보긴 했다. 욘에게 촉진(?)을 당했을 때는 근처가 도톰하게 부풀어 닿는 게 느껴졌는데, 오늘은 신경 써서 만져보지 않으면 나조차도 어디가 뚫려있는지 모를 정도로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 정도면 갑자기 백작이나 피트에게 붙들리는 불상사가 일어나더라도 운만 좋으면 들키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에이, 씨발…….’
내가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됐는지……. 퍽퍽한 매시트포테이토를 입 안 가득 욱여넣고 짜증스럽게 씹었다. 하루하루 정조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야 한다니 기분 참 더럽다.
형이 나를 안았을 때는, 그래서 묘한 기대를 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때 욘은 무슨 이유에선지 꽤나 진지해 보였고―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산 남자애를 덮치기 직전이니 진지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어떤 큰 결심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사람을 겁탈하는데도 결심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여하튼 그랬다. 나에게도 워낙 충격적인 일이었으니 그것을 계기로 무언가 바뀔 거라, 나도 모르게 기대했던 것이다. 최소한의 책임감이라도 있다면 욘이 나를 보호해 주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기대였지.’
그저 ‘페이를 따먹은 개자식’ 명단에 하나가 더 추가된 것뿐이다.
“야, 그 계란 안 먹을 거면 난도질 치지 말고 나 줘.”
태오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나도 모르게 나이프로 계란 프라이를 자르다 못해 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