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성에서 나에 대한 인상은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것일까?
“대장님, 방 배정은 끝난 건가요?”
태오가 기숙사 전경을 훑어보며 물었다. 다들 짐 정리로 바쁜 것인지 방 밖의 공동은 의외로 썰렁했다. 대신 시커먼 진흙 자국이 복도에 그득했다.
바로 얼마 전 쓸고 닦고 물청소까지 마쳤던 곳이 고작 한두 시간 사이에 난장판이 되어버린 것이다.
“대강은. 친절히 안내문도 나눠줬으니 오늘 할 일은 끝냈지.”
제이 씨가 쾌활하게 웃었다.
“비서님도 수고가 많았어. 같이 올라갈래요?”
제발 가라. 그냥 가. 속으로 간절하게 주문을 외웠다.
“먼저 올라가세요. 아까 걸쇠가 뻑뻑하다는 방이 있어서 한번 살펴보고 가겠습니다.”
피트가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는 저 목소리가 가증스럽게만 느껴진다. 남이 들으면 나만 이상한 놈 취급받겠지만.
“너 표정이 왜 그래?”
태오가 나를 보며 속삭거렸다. 더워서, 대충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곤 내려놓았던 양동이를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며칠 새 겨울의 한기가 흔적 없이 사라졌다. 곧 완연한 봄이 찾아올 것이다. 기숙사의 냉방 설비를 보아하니 그리 반갑지는 않다.
“나 세수 좀 하고 올게. 가는 김에 물도 떠오고.”
거대한 양동이를 덜렁덜렁 흔들며 화장실로 향했다. 피트의 시선에서 벗어날 요량이었지만 나의 예상과 달리 몇 발자국 걷기도 전에 육중한 몸이 등 바로 뒤로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이 정도로 채신머리가 없을 줄은 몰랐다. 걸음 속도를 높여도 꼭 그만큼 급하게 쫓아온다.
“왜 따라와요?”
화장실에 들어섬과 동시에 걸음을 멈추고 피트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피트는 걷던 속도 그대로 불쑥 다가오더니 내가 미처 몸을 피하기도 전에 두꺼운 양팔로 나를 에워쌌다.
“보고 싶었어, 페이.”
귓가를 간지럽히는 찐득찐득한 저음에 소름이 쭈뼛 돋았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먼저 들어온 사람은 없는 것 같았지만, 누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공용 화장실이라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미쳤어요?”
양동이를 든 채로 피트의 팔뚝을 퍽퍽 쳐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징그러울 정도의 괴력이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얼마나 절망스러운 것인지, 피트를 마주할 때마다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아팠다고 들었는데……. 욘이 약이라도 주었어?”
걱정하는 듯한 내용이었지만 명백하게 질투가 담긴 목소리다. 기가 차서 입만 벙긋거렸다. 이 자식은 자기가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여전히 나와 욘 사이를 오해―이제는 오해가 아니게 되긴 했지만―하는 것도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당신이 신경 쓸 일 아니지, 이거 놔.”
발로 피트의 정강이를 후려갈겼다. 힘 조절 따위는 하지 않았다. 빠악 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큭……!”
어느새 상기된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나를 감싼 팔은 그대로였다. 서글서글한 눈매가 딱딱하게 굳어진다 싶더니 몸이 불쑥 들렸다.
“으아악!”
다리가 공중에 떴다. 엉겁결에 놓친 양동이가 텅텅 거리며 화장실 바닥을 나뒹굴었다. 나는 열 살짜리 꼬마 애처럼 안겨 버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피트는 나를 공중에 띄운 형세 그대로 화장실 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몸이 뒤로 밀쳐졌다. 딱딱한 타일에 부딪친 등이 얼얼했다.
“페이… 페이…….”
허리에서 슬금슬금 내려간 손이 내 엉덩이를 주물렀다. 솥뚜껑 같은 손아귀는 볼기짝을 다 감싸고도 남았다. 다리 사이로 피트의 몸이 달라붙었다.
“아, 씹…….”
하반신이 맞붙었다. 피트의 사타구니는 어느새 열기를 뿜고 있었다. 설마 여기서 덮치는 건 아니겠지. 머릿속이 황망해졌다. 피트를 위험인물로서 경계하긴 했지만 사람이 이렇게 무모하게 변할 줄은 몰랐다.
“미안해, 페이…….”
“그럼 미안할 짓을 하지 마!”
다가오는 얼굴을 피해 고개를 팩 돌렸다. 피트의 눈빛이 지나치게 달떴다. 숨길 의지도 없이 뿜어져 나오는 욕망에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난 너를 좋아하는 것 같다.”
여유 없는 손길로 내 뺨을 쓰다듬던 피트가 대뜸 웅얼거렸다.
‘…홧김에 사람을 강간해 놓고는 이제 와서 갑자기 좋아한다고?’
눈앞이 시뻘게졌다. 차라리 계속 내 몸이나 탐냈으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도 않았을 것 같다.
“내가 아니라 내 몸이 좋은 거겠죠.”
입술을 잔뜩 비틀며 이죽거렸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고향 친구들이 봤다면 보는 자기가 더 쪽팔리다고 팔을 박박 긁었을 거다.
“너도 좋아.”
실로 짜증이 치솟는 대답이었다. 곧 죽어도 몸이 목적은 아니라는 말은 안 하는 점이 참으로 솔직했다.
“난, 피트 님이 싫어요.”
턱을 꾹 다문 채 한 자 한 자 씹어내듯 대꾸했다. 갈색 눈이 위태롭게 깜빡였다.
“…그럼 어떡해야 할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머리가 나쁜 인간도 아니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게 아주 질이 안 좋다. 자기가 더 슬퍼 죽겠다는 저 표정도 꼴 보기 싫어 기절할 것 같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한쪽이 싫다면 그걸로 끝이지.”
“포기가 안 되는데.”
벽을 보고 말해도 이거보단 대화가 되겠다.
“네가 나를 이 이상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페이, 하지만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매일같이 널 범하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단다.”
짐짓 차분한 목소리가 어쩐지 더욱 무시무시하게 느껴졌다. 뭘 어떻게 해야 단기간에 사람이 이렇게까지 망가질 수 있는 거지?
뺨과 턱, 목덜미까지 닿은 손이 눅진하게 젖어갔다. 숨결도,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짐승의 아가리에 머리를 밀어 넣고 있는 느낌이 이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