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동거

4067 Words
찬혁에게 뒤흔들린 영혼은 이미 하얗게 날아간 후였다. 자리에 와 앉기도 전에 술에 취한 사람처럼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침침한 실내조명이 아영의 붉어진 눈두덩을 깊고 그윽해 보이게 했다. 조명발에 빛을 발한 화장발 같았다. 다행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술이 연거푸 넘어갔다. 쓰고 독했다. 그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슬링 샷은 그 이름값을 했다. 기저귀 고무줄에 차돌을 말아 쥐고 있는 힘껏 땡긴 칵테일 같았다. 미간 사이 제3의 눈을 명중 당한 충격이었다. 개안해 보기도 전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찌르르. 술기운이 올라왔다. 아영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아영 씨 괜찮아요?" "칵테일이 이렇게 센 건 처음이에요. 이름값 톡톡히 하는데요? 여기 무슨 술 들어간 거예요?" "칵테일이라기보다는 위스키 더블샷에 가까워요. 어때요. 아영 씨한텐 너무 센 걸 추천했나?" 위스키 더블샷이 뭐 대수라고. 파라오에서 계약서에 사인받아보겠다고 위스키를 원샷 했던 사람이 누군데. 술 한잔에 호기로워졌다. 취기가 도는 게 분명했다. 자각하고 나니 혀끝이 말리는 기분이었다. 이십 대. 아홉 수. 이제 고작 몇 개월 남겨두고 연타로 당하는 서른 맞이 액땜에 객기를 부려 볼 참이다. 이런 술 한잔의 일탈도 사치였던 이십 대를 마침내 보내며. 새해는 얼마나 희망차려고. 매번 속아 넘어갔지만, 아영은 긍정의 힘을 속는 셈 치고 한 번 더 믿어보기로 했다. 이래저래 오늘은 취해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물주를 앞에 모셨다. 술 마실 때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은 참 은혜로운 일이다. 여러모로. "한잔 더 할래요? 오늘은 축하 자리니 맘껏 취해도 용서할게요." "용서요? 부하직원 주량 단속도 하시나 봐요." 맞짱이 떠졌다. 터진 입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아영은 흠칫 놀랐다. 다행히 민 대표는 웃어넘겼다. 그러나 대꾸는 의미심장했다. "때에 따라서는요.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해주진 않죠. 단속도 일종에 구속의 의미니까." "예를 들자면요?" "어떤 부분에 예시가 필요해요? 얼마든지 물어봐요." 지식인에게 물어봐 코너의 진행자 같은 해박하고 노련한 얼굴로 민 대표가 아영을 빙긋 바라보았다. 아영도 자발적으로 코너에 동참하기로 했다. 그의 속내가 의문스러워지던 참이었다. 작가에 대한 무한 욕심인지 아니면 사심인지. 허심탄회 해지기 딱 좋은 취기였다. "어떤 때에 구속력을 발동하시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가령. 승부욕을 자극할 때?" "부하직원을 놓고 누군가와 승부를 겨루시기엔 대표님 위치가 너무 높으시네요. 반칙인데요." "두 번째 질문인가? 그 부하직원이 아무나가 아닐 땐 상황이 달라지죠." "아무나가 아니라는 건 무슨 뜻이죠?" 아영의 눈동자가 떨렸다. 술기운 탓이라 하기엔 심리적 압박이 동시에 느껴졌다. 행여 대답에 애정 비스므리한 단어라도 섞일까 봐 긴장했다. 그러나 민 대표는 지식인 다운 면모를 보였다. 답은 객관적이고 단순명료했다. 사심이 들어갈 틈이 없었다. "효용 가치가 매우 높은 인적 자원이랄까? 갤러리에 없어서는 안 될 재원의 가치. 그 정도는 돼야 ‘아무나’의 범주는 벗어날 수 있죠." "비즈니스적인 마인드에서 철저히 분석된 돈의 가치. 그거네요. 제 가치가 그렇게 어마어마할 줄은 몰랐습니다. 부담되는데요. 차라리 아무나가 나을 뻔했네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재화를 끌어모으기에 예술은 취약점이 많죠. 돈의 가치와 멀어질수록 돈의 가치를 인정받는 아이러니가 예술이기도 하니까. 명성 얻어보겠다고 헝그리정신을 예술혼으로 자위하며 살아봤을 거 아닙니까. 내 손을 잡은 건 ‘아무나’에서 벗어나고 싶은 강한 욕구였다고 난 그렇게 받아들였는데. 내 착각이었나?" 알딸딸하게 돌았던 취기가 번쩍 개였다. 착각 내지는 독단적인 오해였다고 항변하고 싶은 울화가 울컥 치솟았다. 그러나 아영은 잠시 헷갈렸다. 그리고 이내 틀린 말의 늪에 빠져 버렸다. 가난을 자위하며 살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런데도 늪에 가라앉아버렸다. 반지하 방 한가운데서 민 대표 품에 안겨 엉엉 울던 기억은 왜 갑자기 맥락 없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르는 건지. 부인할 수 없었다. 손을 잡은 건 저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애정이 배제되니 반박이 쉬워졌다. 삐딱해졌다. "돈의 가치도 안 되는 작가의 손을 잡으신 이유는요?" "안목은 그럴 때 쓰라고 있는 거죠. 가치를 알아보고 데려다 키우면 되니까. 그게 내 일입니다. 성장 과정을 지켜보면서 얻는 희열. 그게 내가 받는 보상이죠. 아영 씨 난 키워 본 적 있죠? 그럼 잘 알겠네요. 지켜보는 기쁨이 뭔지. 애정을 쏟은 끝에 처음 맡게 되는 꽃향기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죠." 예시로 던져진 질문에 아영의 촉이 곤두섰다. 헝그리정신으로 버틴 사람에게 난을 키우는 취미가 있냐고 묻는다. 어폐가 있는 민 대표의 사고체계에서 파생된 질문의 요지는 파악조차 어려웠다. 공감을 유도하려 했다면 분명 실패다. 다만 한가지, 지난 3년간 난의 역할이 저였다는 것은 분명했다. 남에 화분에 잘못 퍼 담긴 것 같은 기분은 더 분명했다. "그동안 보람을 드렸다니 다행입니다. 이 만큼 키워주신 것도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정기 특별전을 끝으로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끝맺음이 무시되었다. 클라이맥스를 예고하듯 민 대표가 뜸을 들였다. 기대와 긴장을 배가시켜보기라도 할 심산인지 잔에 남은 매드독을 쭉 비웠다. 시원한 술 넘김의 목젖을 따라 아영의 목에서도 꿀꺽 침이 넘어갔다. "기껏 키워놓은 인재가 다른데 한눈을 팔면, 그런데 한눈파는 상대가 만만치 않다? 승부욕 제대로 자극받죠." "......" “찬혁이 나가는 거 봤어요. 만났어요? 울고 온 것도 찬혁이 때문인가? 혹시 경찰서 일 때문이면 나한테 넘겨요. 아영 씨 찬혁이 상대 못돼요.”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뭐죠?” “대표님께서 염려하실 일 아닙니다.” “상관하지 말란 소리로 들리는데.” "그런 게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 신경 쓰실 일이 못 됩니다. 못 본 채 넘어가 주세요.” “이미 봐버린 걸 못 본 체하긴 힘드네. 말했죠. 공들여 키워놓은 재원이라고. 애지중지하면서 사심이 없었다고 하면 그게 거짓말이죠. 그런 사람이 다른 남자 때문에 울고 오는데 외면이 됩니까?” “……” "우리 이쯤에서 속 시원히 털어놔 볼까요? 진실게임 한번 하죠. 그동안 들여준 공을 생각하면 내 질문 몇 개에 답해줄 수 있잖아. 안 그래요?" 술이 확 깼다. 권할 때 두 어 잔 더 받아 마시고 기절했어야 했다. 객기가 불러온 참사였다. 진실게임의 중심 주제는 불 보듯 뻔했다. 한눈파는 상대. 박찬혁. 찬혁의 말이 맞았다. 공들인다는 것은 길들인다는 것. 감히 거부하지 못하게. 술이 아쉬운지 민 대표는 빈 잔을 테이블 위에서 빙글빙글 기울이다가 턱 내려놓았다. 턱 소리가 파문처럼 밀려와 아영의 심장을 둥 울렸다. 시작 신호였다. "대답해줄 수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십 년의 고난과 역경을 견디게 해준 사람. 찬혁입니까?" 오답을 경계하는 민 대표의 시선이 아영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매서웠다. 오답도 정답도 용납하지 않을 기세다. 그러나 아영은 오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직 정답 하나뿐이었다. "네. 맞습니다. 찬혁이는..." "그럼 두 번째 질문. 프렌치 레스토랑에서는 찬혁이가 아는 체할 때까지 왜 모른 체했죠? 이게 더 궁금했거든."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아영은 관찰자 시점으로 말을 얼버무려야 했다. "그건... 아마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아는 체가 어색했던 게 아닐까요..." "하긴. 십 년 만이면 그럴 만도 하죠. 내가 원래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라, 내가 밀고 있는 아스트의 역설적인 리액션이 실망스럽긴 했지만, 이해합니다. 너무 놀라도 신경이 무감각해지긴 하니까." 역설. 민 대표의 이해는 꿰뚫어 봄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다행히, 극적인 만남에 기절초풍해 멘탈 붕괴 직전까지 갔던 그 당시 속사정을 파헤치는 대신 민 대표는 경계의 표정을 풀고 다시 너그러워졌다. 그러나 질문에는 압박이 한층 가중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 경찰서에서 순순히 날 따라온 건 누구를 위해섭니까? 납니까, 찬혁입니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질문을 받고 중간에서 난감해진 아이처럼 아영은 막연한 표정으로 질문자를 바라보았다. 순순히 따라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 찬혁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결국 찬혁과 한 걸음 더 멀어지고 말았다. 찬혁에게 가는 길은 눈앞에 산재해 있는 과제를 끝내는 것. 그 길뿐이었다. "갤러리를 위해섭니다. 제가 대표님께 끼친 피해를 만회할 수 있는 길은 전시회 성공이니까요. 굳이 누구 때문이었냐고 답을 들으시길 원하신다면, 그 누구도 아닌 저를 위해서였습니다. 제 명예를 되찾을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민 대표는 고개를 갸웃하고 아영을 응시했다. 비스듬히 기울인 고개에 반해 눈빛엔 신뢰가 어렸다. 믿는 눈치였다. 명예에 눈이 멀어 사람을 유치장에 버려두고 간 독한 여자! 찬혁의 맹비난이 귀청에 얼얼하게 울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멀어짐이 찬혁을 위하는 길이기도 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독해질 수도 있다고 아영은 생각했었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단호하고 명쾌한 아영의 모범답안에 민 대표는 다행히 흐뭇해했다. 선택지에도 없던 갤러리를 우선시한 답에 키워놓은 보람을 우쭐 느끼는 듯도 했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아영의 신경이 그제야 긴장의 줄을 놓으려는 순간, 사태가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갔다. "우문현답이네요. 대답 맘에 듭니다. 갤러리를 우선시했다니,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니었군요. 믿음이 갑니다. 유치하게 들리겠지만, 무엇보다 답에 찬혁이 빠져 있어서 안심입니다. 혼자 고민했거든. 아영씨 속을 내가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아서. 갤러리를 위한다는 건 다른 말로 하면 나를 위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그거면 됐어요. 찬혁이 일이라면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막아 줄 테니. 승부욕 제대로 불붙었는데 오늘." 점잖게 내보인 민 대표의 믿음은 승부욕에 불을 붙일 도화선이었다. 아영의 답이 불을 댕겼다. 싸움을 붙여버렸다. 상대는 다름 아닌 찬혁이었다. 지옥의 맛을 보여주겠다고 벼르는 악의 사신과 오늘부터 1일 신고식을 치른 지 불과 몇 시간도 채 안 됐다. 민 대표의 참전 포고는 아영의 앞날에 닥칠 가혹한 재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남 속도 모르면서, 괴로움의 진수를 맛보여주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는 찬혁에겐 이때다 싶은 호기일 테니. 이쯤 되자 리나의 존재가 갖는 위협이 먼지처럼 하찮고 가볍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삼재의 굴레도 아홉 수의 저주도 끝을 모르고 굴러왔다. 엎친 데 덮쳤다. 눈덩이처럼 켜졌다. 액을 털고 희망찬 새해를 기대하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한잔 더 할래요?" 두 번 묻지 않고 민 대표가 손을 맵시 있게 휘릭 돌려 매니저를 불렀다. 자동으로 매드독과 슬링 샷이 배달되었다. "승부에서 내가 우위에 있다고 보이는데?” 아영은 침묵했다. 침묵은 강한 긍정이라고 자의로 끝낸 해석에 만족한 듯, 민 대표가 씨익 웃으며 근거 있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공식적인 동거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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