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싱그러움과 풋풋함은 야진국에서 인정되지 않았다. 무릇 사내장부라면 피 흘리는 결투와 그런 독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되었기에 한강류는 어려서부터 갖은 조롱과 멸시를 받고 자랐었다. 그런데 여까지 와서도 겨우 여인이게 농락당하는 처지에 놓였다고 생각되니 피가 거꾸로 솓는 거만 같았다. 심지어 무슨... "신하"? 그는 야진의 사람이지 결코 서오에 귀속되지 않았다. 들끓는 분노는 순간적으로 한강류를 집어삼켰다. 충동을 이기지 못한 그는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가 "미친 서오년"을 목 졸라 죽여버리리라 다짐하였다.
반면 강하익은 "신하"란 단어에 그다지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과거에 급제까지 했던 걸 생각하면 아쉬운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만약 최아에게 불리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많은 상념이 한순간 머리속을 채웠다. 그러다 다시 눈길을 돌려 한강류를 보는데 글쎄 의도치않게 설강이랑 눈이 마주치게 되고, 이내 설강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제희님을 구해!”
강하익과 설강에 의해 시야가 막혀버린 최명은 문뜩 무슨 일인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상황을 감지하고 언성을 높였다.
“밖에서 뭣하냐! 어서... 속히 들어오너라!”
더이상 소리 높이 웨쳐봤지 의미 없음을 느낀 설강은 친히 나서기로 했다. 그는 선 자리에서 허공을 향해 높이 뛴 뒤 단번에 한강류를 퍽 하고 차버리고 최아 앞에 막아 나섰다.
둘은 이미 전장에서부터 힘을 겨로 본 사이로 이 상황이 도리어 익숙하게만 다가왔다. 순식간에 전투가 시작되었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나는 소년 장군으로 독수리처럼 전장을 누비고 다니며 적군을 무찔렀었으니 두려움 따위는 결코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한강류가 그런 손년 장군을 무서워할 리는 더더욱 없었다. 청순한 소년의 얼굴을 하고서 눈빛에는 이미 그윽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 연회에 참석하느라 무기도 없을 둘은 곧바로 육탄전을 시작하였다. 한편 최아는 몇 보 물러나더니 옆에 서서 흥미진진하게 싸움구경을 해대는 거였다. 술잔의 술은 반만 남았고 최아는 그대로 쭉 들이마시고 상기되어 지켜보고 있었다.
보석이 박힌 빈 술잔이 바닥에서 뒹굴고 있었다.
타악-
설강은 재빨리 내 뒹구는 술잔을 발견하고 한강류를 조준하여 차버리었다. 술잔은 일직선으로 날아갔고 미처 반응하지 못한 한강류는 술잔을 뒤로 피해버렸다.
‘아직 너무 어리다는 말인가...?’
한강류는 점차 싸움에서 맥이 진해옴을 느꼈다. 그에게도 소년의 충동과 열정이 있었지만, 아직 떨떠름해서 누빌 수 있는 역량까지 겸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는지 몇 번의 방어를 끝으로 연신 뒤로 물러나는 거였다. 반면 기회를 놓칠세라 끝없이 떨떠름해서 닦아세웠다. 그러던 와중 인제야 호위무사들이 대거 우르를 몰려들어서 소란을 피웠던 야진국의 사람들을 잡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미 연회의 판에 참석했던 사람들의 흥도 깡그리 깨져버린 터였는데. 황제폐하의 얼굴은 이미 분노에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옆에서 지켜만 보던 황후는 돌연 재미있다는 둥 웃음을 훔쳤다.
한강류는 금발의 머리칼을 뒤로 휙 넘겨버리고 발버둥쳤다. 아직도 분이 풀리지 못해 입으로는 여러 알아듣기 힘든 야진국의 언어로 뭐라 뭐라 얼버무렸다. 뭐라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걸 듣고 있는 기타 시찰단의 야진인들을 봐서는 아마 거친 욕설임이 틀림없었다.
변강에서 오랫동안 지내온 설강은 겨우 그중의 몇 마디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나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는 머리끈을 풀어 쉴새없이 뱉어대는 한강류의 입을 그만 틀어막았다. 그제야 소란은 조금 잠잠해지었다. 설강은 한강류를 성공적으로 제압하더니 눈길을 위에 있는 최아로 돌렸다.
그런 최아는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양 설강을 보며 찡긋 웃더니 손뼉을 쳐대는 거였다.
“오호~ 참 대단하셔요, 장군님.”
따스한 웃음에 설강은 저도 몰래 입꼬리가 위로 말려들어갔다.
‘날 알아본 건가? 그건 그렇고... 소문대로 참 예쁘네.”
설강이 뭐라 회답하려 입을 열려는데 돌연 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아는 몸돌로 두 눈을 뜨면서 최현에게 물었다.
“신하 아니요? 아니면 뭔데? 사위를 구하는걸?”
하나 최현은 최아의 말을 듣기나 했는지 시종 묵묵부답이었다. 그 눈치를 알아차린 최아는 고개 돌려 최명에게 큰절을 하고는 또 물었다.
“소녀도 이제는 혼인을 생각해봐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혼인?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무슨 혼인?
아직까지도 남색이나 탐하는 최아가 한심했는지 최명은 얼굴이 파래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길고 긴 전쟁을 끝내고 겨우 두 나라의 화합을 기리려 이런 연회를 열었는데, 그런 연회를 망쳤다는 생각은 하지 않은 여인? 게다가 이 또한 수백만 백성의 바램이기도 한데, 지금 칼날을 빼 들고 야진인의 목을 향해 겨누고 있는 와중인데, 최명은 이 상황을 어떻게 종결해야 할지 앞이 깜깜해 놨다.
아무리 최명이 이 거대한 나라를 이끄는 황제라고 해도 이런 상황은 여전히 그에게 있어 난제였다. 마른 입술을 다시면서 한참을 고민하다 문뜩 드는 생각에 눈길을 옆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이번 시찰단을 이끌고 온 야진국의 수령이 보였다. 야진국의 예법은 서오와 사뭇 달랐다. 야진국의 왕실에서는 잔인한 전통이 계속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것은 바로 만약 왕후가 아들을 나으면 죽여버린다는 거였다. 그래서 모든 야진국의 왕자는 모두 어머니가 없었다.
“야진국에서 시찰단을 파견한 이유가 고작 내 궁전에 와서 소란을 피우려는 의도였더냐?”
대오를 이끌던 한부옥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고 뉘우치는 태도를 보였다. 그는 야진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괴상한 말투로 공경하게 서오말을 하였다.
“아닙니다. 이건 제 형제의 잘못이니 너그럽게 봐주세요. 야진의 시찰단는 양국 친선을 도모하러 온 겁니다. 기타 불순한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제희님이 제 형제를 좋게 봐주시니 이건 저희의 영광인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