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이 채 대답도 하기 전에 최아부터 피식 웃고는 말했다.
“역시 그렇죠? 히히~”
검은색의 장발이 가슴을 덮고 있는 한부옥은 여러 보석이 박힌 장신구들로 엄청나게 귀티났다. 오뚝 솟은 코는 다소 공격적으로 보였지만 그런 겉모습과는 달리 엄청나게 차분하고 겸허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한부옥은 한손을 가슴에 얹고 앞으로 비스듬히 허리를 숙였다. 길게 아래로 뻗어진 장발이 같이 흔들리었다.
반면 설강에 의해 제압당한 한강류는 옴짝달싹 못했다. 그때 곁눈으로 웬 붉은빛이 아른거린다. 옆으로 눈을 돌려 확인해보니 붉은 루비의 빛이었다. 한부옥의 몸에 달린 붉은 루비. 조금씩 흔들리는 머리와 함께 아른거리는 붉은빛을 보며 돌연 한강류는 구역질이 났다.
‘난 이대로 서오에 팔려가는 거야...?’
그 순간 머릿속에 드는 유일한 생각이었다.
곧장 누군가 자신의 머리칼을 한 움큼 잡고 위로 당겨 올렸다. 눈을 바로 떠서 보았을 때 보이는 건 최아의 얼굴이었다. 최아는 엷은 미소를 띠며 아직도 웃고 있었다. 보조개가 인상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화내지 마. 화내면 못생겨지니깐.”
우웩-
한강류는 붉은 피를 와락 토해냈다. 내키지 않는 감정에 발버둥치다 입을 틀어막고 있던 머리끈이 풀리고 따라서 피를 게워내고 있는 거였다. 짭짤한 맛이었다. 어쩌면 눈물까지 섞여서 그런지 짜갑고도 떫은맛이었다.
후세의 기록에 의하면 이번의 서오행은 한강류에게 크나큰 회한과 고통을 가져다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훗날 야진의 대군으로 등극하여서도 서오에대한 사무치는 복수심에 그리도 잔인하게 행하였다는데. 심지어 야사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돌았다. 다만 야사에서는 조금 다르게 전해져 내려왔다. 말로는 서오의 제희인 최아가 남색을 탐하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최아에게 능욕을 본 남자 중에 바로 한강류가 있었으니. 그로 인해 더없는 모멸감으로 결국 백성까지 함께 그 대가를 물었다고 하고 후세에 강보제희를 천고의 죄인으로 악명을 주기고 말았다.
천고의 죄인으로 된 최아의 얼굴에 대고 한강류는 붉은 피를 마구잡이로 뱉었다. 당황한 것인지 최아는 얼굴을 타고 내려가는 피를 닦아내며 한편으로 한강류의 목을 잡고 마구 흔들어 댔다.
“태의를 불러라, 어서!”
하지만 되려 이런 말을 하는 거였다.
“죽지마, 이대로 죽지 말라고.”
정신을 반쯤 잃은 한강류는 흐릿한 의식을 가까스로 유지하며 속으로 웨쳤다.
‘그만 좀 흔들어라고...’
다시금 두눈을 떴을 때 한강류는 최아의 얼굴부터 보게 되었다. 지금 막 턱을 잡고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오고 있었다.
최아의 눈빛은 그런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분명 한 나라의 공주로서 그만큼의 신분과 지위가 있는 것이지만 두 눈을 크게 뜨고 한 누군가를 주시할 때면 어김없이 어린 토끼가 되어버리는 거였다. 순진하고 해가 없는 그런 귀여운 토끼.
하지만 전체적으로 바라보았을 때 순수하다기보다 요염함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 여우 같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 여우가 지금 또 그 표징적인 미소를 얼굴에 띄고 있었다.
“어머, 깨어났어? 이제 정신이 드나 보지?”
눈을 부비적 거리며 비몽사몽 하는데 옆에서 최아가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여기가 어디지...’
한강류는 아직도 몸을 제대로 가누기 힘들었지만 의식은 멀쩡했다. 그리고 연회의 기억들이 단번에 몰려왔다.
‘그러고 보니 연회에서... 아악...! 제길!’
열감이 번지는 얼굴과 함께 치욕감이 위로 솟구쳤다. 워낙에 자존심이 강한 사람인데 그런 수모는 더욱 참을 수 없었다. 한강류는 또다시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일어나 앞에 있는 최아의 목을 조르려고 손을 뻗었는데.
꽈 광-
최아는 슬며시 뒤로 물러나고 한강류는 그만 허탕을 치고 말았다. 거기에다 아직 회복이 덜 되었는지 허공에 대고 허우적대다 평형을 잃고 바닥에 와장창 넘어지고 말았다. 역시 정신이 갓 든 상황에서 무리하게 나대는 게 아닌데 말이다. 온몸이 경직된 듯 아무런 방응도 하지 않고, 한강류는 오래동안 바닥에 얼굴을 틀어막고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김없이 최아의 까르르 웃음소리가 자존심을 간지럽혔다.
“너... 너...!”
마침내 한강류가 입을 열고 말을 했다.
옆에 서 있던 설강은 미동도 없이 두 손을 허리에 짚고 이 광경을 보기만 하였다. 웃고 있는 최아와 체면이 제대로 구겨진 야진의 왕자님을.
“한강류, 세상은 변하기 마련이라고.”
전장에서 금빛의 낙타 등에 타고 곡도로 적군을 반 토막 낼 때의 한강류는 절대 이런 초라한 기세가 아니었다. 설강도 한쪽 눈썹을 스윽 위로 당기더니 참지 못하고 웃음을 띄었다.
설강의 조소에 자극받은 한강류는 더 대노했다. 침대에 걸쳐져서 상반신을 바닥에 대고 움직이지 못했다. 이런 치욕은 살다 살다 처음이었다. 어느새 한강류의 눈가에 자욱한 안개가 끼는 듯하더니 눈물이 주룩 흘러내리는 거였다.
이런... 기꺼이 눈물을 보이다니.
재미도 쏠쏠했겠다, 최아는 그만 조롱 섞인 웃음을 치우고 한강류를 일으켜 세웠다. 침대에 다시 누운 한강류는 드디어 진정하고 고개를 반쯤 숙이면서 몸을 바로 앉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굴할 수 없는 분노에 어금니를 꽉 물고 있었다.
“설강 장군님, 그만 가보세요. 한강류와 긴히 할 말이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