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강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늑대와도 같은 자가 행여나 제희님을 해칠까 염려됩니다.”
얼굴에 교태로운 웃음기를 띄며 최아는 침대옆으로 몸을 슬며시 옮겼다. 그 옆에 있는 한강류의 잡아먹을 듯한 눈빛을 보며 말했다.
“야진국에서 애써 친선을 도모하려 시찰단을 보냈는데, 왕자님은 그걸 망치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야진국...
한강류는 야진이란 단어에 어김없이 움찔해났다.
그래,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야진국은 전쟁에서 패하였고 그 대가로 수많은 용사들이 피를 흘리고 영원한 주검으로 황량한 사막의 한가운데 묻히게 되었다. 본인도 그렇고 한부옥까지 모두 설강한테 제패 당했는데, 어쩌면 이건 위대한 가루라의 분노인 것이 아닐까? 그래서 천벌을 내려 대군더러 그들을 명예롭지 못한 시찰단으로 이 먼 곳까지 파견하여 수모를 당하게 한 것이고. 이길 수 있는 전쟁이었는데... 어떡해서든 이길 방법이 있었을 텐데...
한부옥만 아니었다면...
한강류는 주먹을 꽉 쥐고 말이 없었다. 소년다운 얼굴은 노기등등해져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더 이상의 반응은 하지 않았다.
한편 미동도 없이 혼자 부들부들거리는 한강류를 보자 조금이나마 안심이 된 설강은 그만 인사를 올렸다. 한강류가 최아의 말을 이해하는 거 같았고 또한 한강류를 끈질기게 놓아주지 않는 최아를 보니 밖에 나가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럼 소신은 폐하의 명이 있는지라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간혹 필요하시면 언제든 부르세요.”
“네.”
최아는 가볍게 답했다.
‘이건 무슨 나더러 보라고 하는 수작인가...?’
그러나 한강류는 그들의 대화가 전혀 달갑지 않았다. 그냥 위협으로만 느껴졌을 따름이었다. 그 뒤 설강은 자리를 비우고, 한강류와 최아만이 남게 되었다. 한강류는 설강이 나가자마자 볼멘소리를 하며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 그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설강 저 인간 전장에서는 용맹한 독수리인 척하더니만, 당신네 앞에서는 완전 충견이네요. 한 마리 개야, 개...!”
서오의 예법과 전통에 대해 요해가 적었던 한강류는 맘속의 말을 감춤없이 여실히 드러냈다.
“왜? 부러워서 그렇게 말한 건가?”
최아는 뜻일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부럽다고? 내가? 설강을? 황족의 개가 뭐가 부럽다고.”
한강류는 두 눈썹을 위로 올리면서 난해하다는 표정이었다.
이에 최아는 답답하다는 듯.
“야진국 사람으로서 서오말을 잘도 하는구먼 왜 입만 열면 개라고 하는 거야? 다른 단어 좀 말해봐.”
그녀는 순간 머리를 앞으로 쑥 내밀었다. 아래로 내리 드리워진 눈썹과 연분홍의 입술이 눈앞까지 다가왔다. 한강류는 순간 놀란 나머지 뒤로 물러났다. 이때 벌어진 채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말하는데 당신네 우리 서오의 황족이 부럽기는 하지? 잘 생각해보라고~ 만약 우리 서오와 화친하면 너도 설강이 보좌해야 하는 우리 황족의 일원으로 되는 거라고.”
택도 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왠지 그럴싸한 논리에 한강류는 머리를 굴리며 ‘그런가...’하고 생각하다 문뜩 두 눈을 부릅떴다. 화친이라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한강류가 언성을 높였다.
“잠시만! 화친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그쪽이랑 화친한다고 그래?”
“어허, 이러면 안 되지! 한부옥은 이미 우리 서오와 친선조약을 체결하였다고. 똑똑히 화친이라고 적혀있는걸.”
정녕 이렇게 서오에 팔려가는 건가!
한강류는 속으로 욕했다. 한부옥을 비겁한 소인배라고.
분노로 얼굴이 퍼렇게 질려버린 한강류는 너무도 기가 차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거만 같았다. 당연 이에 대비하여 최아는 미리 준비해둔 물건이 있었다. 그녀는 소매에서 비취색의 연고를 꺼내 한강류의 이마에 발라주었다. 청량함과 찌릿찌릿 이마를 자극하는 연고는 금세 한강류의 분노를 사그라지게 만들었다. 터질 것 같던 머리가 그제야 잠잠해지고 정신이 말끔해졌다. 부드럽고 따스한 손가락으로 최아는 한강류의 이마를 몇 번이고 문질러댔다.
한편으로 연고를 문질러 주며 다른 한편으로 싱거운 소리를 하였다.
“무슨 틈만 나면 성질이에요? 혹시 몸이 안 좋아요?”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마지막 몇 글자를 내뱉었다. 한강류는 그 말을 제대로 듣기나 했는지 눈길을 다른 쪽으로 치우고 있었다. 이윽고 자신을 향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최아를 발견하고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돌렸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한강류는 생모를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이 이유였을까? 어느새 옆으로 기울여진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모래바람이 휩쓸고 다니는 사막에서 한강류는 피부가 뽀얀 사람이었다. 햇볕에 아무리 쫴도 얼굴은 하얗기만 했다. 물론 이는 야진국에서 놀림당하여 마땅한 용모였으니. 그러나 서오에서는 달랐다. 하얀 피부를 뚫고 밑으로 보이는 한 움큼의 붉은 물감을 보면 괜스레 야릇한 느낌이 맘속에서 맴돌았다.
싹 틔우기는 또 농락하듯 말했다.
“참 예쁘기도 해라~”
청량한 연고의 약내를 맡으며 한강류는 끝내 백기를 들고 말았다. 코앞에 있는 최아에 문밖에서는 설강까지 보초를 서고 있는 마당에, 이 상황을 타개할 기미가 보이지는 않고, 그냥 그런대로 속수무책으로 가만히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