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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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조 자네 지금 소단가의 기생이라고 하였나?" "나도 알고 있네. 유승. 그 아이와의 인연이 쉽지 않을 거라는 거." "사뭇 진지한 자네의 모습을 보니, 그 아이가 자네의 마음을 어찌 훔쳤을까 궁금하네." "따뜻했다네. 마치 어머니의 품처럼." 유정과의 잠깐의 포옹을 떠올리던 박승조의 모습은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남정네의 모습이었다.  "허나, 마음은 쉽게 내주지 말게나. 기생과 양반의 사랑은 쉽지 않다는거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자네 아버님이 아신다면 크게 노하실게 분명하시네." "그건..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그 아이를 다른 이에게 줄 수 없다는 결론이 났네. 그래서 말인데, 그 아이를 내 첩으로 삼을 것이라네."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자가 첩이라니. 자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그 아이는 내가 여태 본 다른 여인들과는 달랐네." "절세미인이라도 되는가? 혼례는 입밖에도 꺼내지 않던 자네가 이리 나오다니 나로써는 놀라울 따름이네." "농을 하는 게 아니네. 그 아이는 언제나 내 곁에 있어줄 것 같은 느낌이었다네. 우리 어머니 처럼 나를 쉬이 떠나지 않을 것 같았다네." "한번 봐서 그걸 자네가 어찌 아는가? 자네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본 나로서는 감당이 되지 않는 다네. 진심인가?" "나도 이런  내 모습이 혼란스럽기만 하다네. 여인을 마음에 품게 될 줄이야. 여태 내 마음을 움직인 여인은 아무도 없었다네. 그 아이를 빼고는 말이야." "그럼, 그 아이와 정인의 증표라도 나눠 가진 것인가?" "실은, 그 아이는 아직 내 마음을 모른다네." "혼자 마음에 품고 있는 건가 승조?" "그렇다네.." "그럼 언제부터 그 아이를 마음에 품게 된 것이오?" “실은, 그 아이를 어제 처음 보았다네.” “자네, 그 아이에게 첫눈에 반한건가?” "놀리지 말게나. 유승. 어릴 적 만난 이를 마음에 아직 품고 있는 자네도 만만치 않네." "자네 말이 맞네. 어릴 적 만난 그 아이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는지도 모르는 나인데, 혼인을 하여 지금쯤 다른 남정네의 품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자네한테 내가 훈계를 두려하다니.” 씁쓸함을 느낀 조유승은 잔잔한 파도처럼 슬픈 감정이 물밀듯 몰려와 풍성한 속눈썹을 내리며 생각에 잠긴다. "유승, 자네는 여태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세월만 보냈지. 그 아이 말고는 다른 여인을 만나보지 못했지 않은가." "그게 무슨 말인가. 승조." 박승조의 말이 끝나자 저 멀리서 한 사내가 도포를 휘날리며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다. "아니, 김조생 아닌가. 유승 이쪽은 이번에 자네에게 인사시켜 주기로 한 김조생 도령이라네." "반갑소. 나는 조유승이라고 하오." "그동안 박승조에게서 익히 들어 알고 있었네. 나는 김조생이라고 하네." 햇살이 내리 찌던 그날, 유독 깊게 패인 김조생의 볼에 그림자가 져 보였다. "유승, 김조생은 자네와 같이 이번에 과거에 급제한 인물이네." 위로 약간 찢어진 눈매와 잘 웃지 않은 인상을 가진 김조생이 조유승은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게 느껴진다. "아, 그런가?" "그렇다네, 자네와 달리 간신히 급제했지만 말이네." "자자, 이제 인사는 마쳤으니, 얼른 사냥터로 가시게들. 더 깊은 얘기는 사냥을 마치고 나누세." ************ 소단가의 아침은 햇살에 비친 나무 아래에서 한껏 치장을 하고 앉아 있는 기생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기생들 사이에서 나이가 어리지만, 실세를 잡고 있던 홍초가 부채로 바람을 부치며 아침상을 치우는 유정을 바라본다. “유정, 잠시만 이리와 볼래?” “잠시만, 이것 좀 마저 하고 갈게.” “아니야, 그건 이제 그만하고 이리와 볼래?” 홍초의 부름에 아침상을 치우고 있던 유정은 이마에 난 땀을 닦으며 밖으로 나오자 생각보다 뜨겁게 내리쬐는 아침햇살에 인상을 찌푸린다. “홍초 왜 부른 게야?” “다름이 아니라, 저번에 월희에게서 춤을 배우다 찢겨진 옷 몇 벌이 있는데.” “응?” “그 옷들을 수선해야 하는데. 내가 오늘 아침 문틈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다리를 삐끗했지 뭐야. 혹시, 포목점에 가서 이 옷을 맡기고 와줄 수 있어?” “내가?” “음.. 어제 밤에 보아하니, 좀 답답해 보이는 것 같아 시장터 구경도 하고 올 겸 갔다 오는게 어때? 그리고 오늘 월희에게 수업을 받고나면 내가 입을 옷이 없어서.” “아.. 포목점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는데. 어떡하지?” “포목점 위치를 잘 몰라? 아마 시장터에 있는 가장 큰 주막 옆에 있을 거야. 시장터가 그리 넓진 않아서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음.. 내일 다녀오면 안 될까? 곧 있으면 월희에게 춤을 배워야 하잖아.” “근데, 내가 입을 옷이 없는데.” “그건 그렇지만.” “빨리 다녀오면 되잖아. 대신, 보상은 할게.” 약간은 누런 얼굴에 하얗게 분칠을 한 홍초가 부채로 입을 막으며 유정의 손에 상평통보 한 닢을 쥐어준다. “이건..” “유정, 너의 사정은 익히 들어 알고 있어. 어미 아비를 찾는데, 돈을 보탰으면 싶어서.” “고마워. 홍초.” “아니야, 대신 이 옷감들 좀 포목점 문지방에게 맡겨다 줄래?” “알았어. 다녀올게.” 홍초에게 받은 상평통보 한 닢을 귀중하다는 듯이 치마 아래에 있는 주머니에 넣으며, 홍초가 준 옷감들을 받아 집어 든다.   “꽤 무게가 나갈 거야. 그래도 포목점까지는 여기서 그리 멀진 않으니까. 괜찮을 거야. 괜찮지 유정?” “응.” 청나라에 잡혀간 어미와 아비를 상평통보로 데려올 수 있다는 소문을 들은 유정은 소단가에 들어온 뒤에 잡일을 하며 다른 기생들로부터 상평통보를 받아 열심히 모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홍초는 유정을 위하는 척하며, 시장터에서 길을 헤매다 월희에게 춤을 배우지 못하게 할 속셈이었다. ‘유정, 네가 월희에게서 춤을 배우며 미소 짓는 꼴은 못 보겠어.’ 시장터로 향하는 유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홍초는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응큼한 미소를 짓는다. ********** "여기 어디쯤에 포목점이 있다고 하였는데." 여기저기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 보따리장수들이 물품을 풀어 장사를 하는 소리, 대낮부터 기와집 뒤에 숨어 사랑을 속삭이는 소리까지 시끌벅적한 장터에서 유정은 정신없이 포목점을 찾아 주위를 둘러본다.   "저 아이들은 행복해 보이는구나. 나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행복한 이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면서도 서글픈 감정이 든 유정은 눈물을 글썽인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주위를 기웃 거리다가 포목점을 발견한 유정은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간다. "거기 누구 있소?" 포목점 안으로 들어온 유정은 눈 위에 상처가 나있는 문지방을 바라본다. 오른쪽 눈이 칼에 배인 상처가 깊게 파져 있어 강해 보이는 인상을 풍기는 문지방을 보고도 유정은 두려움보다는 왠지 낯설지 않은 느낌을 받는다. "들어오시오. 옷감은 이리다 놓고 가면되오." 작은 문안에 들어서자 쾌쾌한 냄새가 풍겨와 입을 틀어막고 싶던 유정은 간신히 말을 이어간다. "며칠 뒤에 다시 오면 되겠나?" "닷새 뒤에 다시 오시오" "그럼, 닷새 뒤에 오겠네." 포목점을 나오면서 문지방과 눈이 마주친 유정은 문지방의 눈에 스며있는 슬픔을 알아본다. '저자의 눈 위의 상처는 예사롭지가 않아 보이는구나. 무슨 사연이 있어보여.' 길 위에서 헤맨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진 유정은 서둘러 소단가로 발길을 돌린다.   '오늘 월희에게 춤을 배우는 날인데, 이리 늦어서 어떡하지.' 총총 걸음으로 뛰어가고 있던 유정의 앞에 한 사내아이가 넘어진다. "괜찮니? 얘야?" "흐엉... 어머니..." 유정은 넘어져 울고 있는 사내아이를 붙잡아 달래며, 주위를 살펴보지만 사내의 어머니라고 짐작할 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지, 빨리 가봐야 하는데? 허나, 이 사내아이를 그냥 두고 갈 순 없는데.' 울고 있는 사내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며 길옆에 있는 넓적한 돌 위에 아이를 앉힌다. "잠시만 여기에 있으면, 어머니가 오실거야. 그러니까 뚝 그쳐. 뚝." "싫어. 여기가 어디야. 흐엉." "내가 같이 있어줄게.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자신의 옆에서 손을 잡고 앉아 있는 유정을 보고 안도를 하였는지 사내아이는 눈물을 멈추고 유정의 왼쪽 팔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옆에서 잠든 사내아이를 토닥거리고 있던 유정은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며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린다. 단령에서 처음 만난 조유승의 모습은 마치 옆에서 잠들어 있는 사내아이와 같이 개구쟁이 같은 모습에 볼이 통통하였다. "도령은 잘 지내고 있을까? 이 아이를 보니 어릴 적 만난 도령의 모습이 떠오르는 구나. 도령도 볼이 이리 통통했었는데.. 지금쯤 도령은 어떻게 변했을까? 시간이 흘러 변해버린 도령을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지? 도령 또한 변해버린 내 모습을 한눈에 알아보시지 못하시겠지.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단령에서의 약속따위 그저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 걸로 치부해야 되는 것일까. 아직도 이렇게 어린 도령의 품에 안겼던 때가 생생히 기억나는데, 도령은 어디서 무얼 하시고 있으시려나. 단령을 떠나신 뒤, 몇해동안 한번도 찾아오시지 않으신거 보면 나를 잊으신거 겠지. 아마 지금쯤 어여쁜 여인과 혼례를 치루셨을 지도 몰라." 어릴 적 추억에 잠기며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던 그때에 멀리서 어떤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삼돌아, 어디 있니. 삼돌아." 저 멀리서, 묶고 있는 머리가 헝클어진 채 뛰어오는 한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저기요!" 유정의 부름에 정신없이 달리던 여인은 방향을 틀어 유정의 곁으로 와 잠들어 있는 사내아이를 안고 울음을 터뜨린다. "여기 있었구나, 이놈아. 어미가 얼마나 걱정을 하였는데." "저기, 삼돌이가 넘어지는 바람에 무릎이 까졌어요."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정말로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말을 남긴 채 집으로 향하는 삼돌이의 어미를 보고 유정은 서둘러 소단가로 향해 뛰기 시작한다. "큰일 났다. 시간이 너무 늦어버렸어." ************** "유승 자네 정말 들어가지 않겠는가?" 길 위에 나란히 서있는 조유승과 박승조 그리고 김조생은 실랑이를 벌인다. "자네의 마음은 알겠으나, 내 마음이 다른 여인을 허락하지 않는다네." "당장 여인을 품으라는 말이 아니네. 조금만 더 가면 소단가에 이르게 되니, 잠시 들어가 얘기를 하며 술 한 잔 드는 건 어떠한가?" "미안하네. 이만가보겠네." "자네의 마음을 어떻게 꺾는단 말인가. 알겠네. 그럼." 조유승의 단호한 말을 꺾지 못한 박승조는 김조생과 소단가로 향한다. 알게 모르게 한숨이 내쉬어지던 박승조는 마음이 편치 않아 길을 걷다 조유승이 걸어간 쪽을 향해 뒤를 돌아본다.   "저자는 어찌 저리 앞만 보고 사는 건지." ************* 박승조와 김조생과 헤어진 뒤, 밤거리를 거닐고 있는 조유승은 문득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을 올려다본다. '참으로 어여쁘게 빛나는구나. 너도 내게 빛이 났었는데.' 밤하늘에 모여 있는 별들을 향해 어릴 적 만난 유정의 얼굴을 떠올리던 조유승은 소단가를 향해 달려가던 유정과 부딪히게 된다. "앗" "아이쿠" "다친 데는 없소?" "네. 그럼 소녀는 이만. 나으리께서는 다치신 곳이 없으신지요? 소녀는 일이 급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저기 잠시만..! 기다리시오!"  조유승이 길 위로 자빠지며 본 유정은 밤에 떠 있는 달기운의 빛을 받아서 인지 갈색 눈동자가 반짝이며, 묶지 않고 풀어헤친 머리와 약간은 상기되어 발그레진 볼이 순정을 담고 있는 소녀, 어릴 적 자신이 만난 유정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한시가 바빴던 유정은 조유승의 외침을 듣지 못하고 정신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달리기 시작했다. "잠시만 멈추시오, 낭자!" 유정은 조유승의 외침을 듣지 못했고, 조유승은 유정의 뒤를 쫓기 시작한다.  "저 아이는.. 설마, 어릴 적 단령에서 만난 아이가 아닌가? 어찌 이런 우연이.. 내가 그토록 찾아헤매던 아이야!" 유정에게 다가가는 것이 고민되는 마음과는 다르게 몸이 먼저 그녀에게 반응한 조유승은 그녀의 그림자를 뒤쫓아 쉴새없이 달리기 시작한다. 한편, 유정은 소단가에 이르러 안으로 들어가 주위를 살핀다. 이미, 저녁 손님들로 가득하여 사람들로 붐비는 소리로 정신이 없었다.  "어쩌지, 너무 늦어버렸구나." 그때, 저 멀리서 유정을 발견한 소정이 유정에게로 다가온다. "유정, 여태 어디 있다 온 것이냐?" "소정. 오는 길에 길을 잃은 사내아이를 만나..." -찰싹 유정이 말하고 있는 도중 소정이 유정의 뺨을 내리친다.   "어떤 연유이든, 너는 말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안 그러느냐?" "그게.. 오해입니다. 소정. 제말을 믿어주십시오." "오해? 지금 내게 말대꾸를 하는 것이냐?" 유정의 말에 겹겹이 쌓인 오해가 폭발한 소정은 한 번 더 유정을 뺨을 내리치기 위해 손을 올리는데, 그 순간 조유승이 소정의 손을 잡고 막아선다. "그만하시오." "지금 무얼 하시는지요? 이 손 놓아주시지요. 처음 보는 도령인 듯싶은데, 저쪽으로 가시면 다른 아이들이 있을 겁니다. 그리로 가보시지요." "오늘 내 옆에는 이 아이가 있을 것이네 ." 잡고 있던 소정을 손을 뿌리치고 옆에 서 있는 유정을 자신의 옆으로 당긴다. 그 모습을 본 소정은 놀라서 말을 머금지 못한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일입니까? 유정 네가 한번 설명해 보거라. 대체 이 도령은 누구길래 네 손을 잡아 끄는 것이냐?" 소정의 외침에도 유정은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자신을 손을 붙잡은 조유승을 바라보며 어릴적 단령에서 처음 조유승과 손을 맞잡았을 때처럼 감정이 휘몰아친다. "도령은.. 설마.. 제가 기억하는 도령이 맞으십니까? 저와 단령에서.." 어느새 촉촉해진 눈을 가진 유정은 울컥하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녀는 조유승을 바라보며 잠시 두눈을 감는다. 애써 말을 이어보려 하지만 목이 메여 그녀는 눈물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유정의 모습을 보며 조유승은 따뜻한 눈빛과 손길로 유정에게 말을 건넨다. "기억하겠느냐, 내가 누군지 기억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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