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열병

book_age1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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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K
독자수
억만장자
친구에서 연인으로
오만
지배적
나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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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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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소개

"아영아."

그 자리는 단지 아픈 과거의 유적이자, 씻을 수 없는 죄악의 유산이며, 깨부술 수조차 없는 업의 유물일 뿐이었다.

"잡아."

십 년의 시공간을 거슬러, 두 사람은 운명처럼 다시 처음에 서있었다. 기어이 찾아 내고야 말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아영은 이곳으로 찬혁을 이끌었다.

"제발."

너와 나의 오두막이, 우리의 처음이 우리 안에 용케도 꿋꿋이 버티고 살아남아, 상처뿐인 영혼의 회귀일망정 서로를 보듬어 안아 줄 수 있다면. 마음의 빚도 빚이라, 해묵은 과거를 청산하고자 바라는 거창한 화해도 용서도 아닌, 그저 서로의 아픔에 작은 위로와 위안을 줄 수만 있어도. 그래서 서로가 서로의 안식이 되어줄 수만 있다면.

"와라. 포기하지 말고."

찬혁은 손을 뻗었다. 간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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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타요?
찬혁은 창가에 우두커니 서서 신록이 물든 명동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봄인가 싶더니 어느새 길가에 늘어선 가로수가 녹음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그 아래로 관광객들이 강물처럼 종일 흘렀다. 쾌적하고 서늘한 실내 공기가 갑자기 갑갑하게 느껴졌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당기고 셔츠 단추를 풀어 목을 헤쳐도 갑갑했다. 소매까지 둘둘 말아 올렸다. 소용없었다. 답답한 건 가슴이었다. 지이잉 지이잉 찬혁은 책상 위에서 진동하고 있는 휴대폰을 들었다. "어 민혁아. 왜." "야 박찬혁! 너 어떻게 된 거야? 왜 답이 없어? 연락 돌린 지가 언젠데. 자식, 너 사장 되더니 너무 몸 사린다? 하던 대로 해 자식아." "미안하다. 그 동안 좀 바빴어." "바빴겠지. 그래서 온다고 못 온다고?" "안간다고." "뭐? 야~ 너 너무한 거 아니냐? 귀국하고 얼굴 한번 안보여주네? 완전 따로 노는데? 어디냐? 거긴 물 좋냐?" 똑 똑 똑 "됐고. 그만 끊자. 나 지금 바쁘다." "아 야야야 찬혁아! 자식 성질머린 여전하네! 오늘은 잔말 말고 와. 끝내주는 애 대기 중이야. 안보면 후회할 것이다. 기다린다~" 찬혁은 대답 대신 종료 버튼을 눌러버렸다. 똑 똑 똑 "네. 들어 오세요." "사장님, 찾으셨습니까." "실장님께 몇 가지 여쭤볼게 있습니다." "아, 예 말씀하십시오." "경주 콘도 건에 대해서 아시는 대로 알려주시죠." "예? 경주 콘도요? 매각 된지 십 년도 더 된 건이데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십니까?" "호텔 현황 파악 중에 한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IMF때도 호황이던 경주 콘도가, IMF 끝나자마자 매각이 됐는데, 그 돈이 다 어디로 증발한 겁니까? 그 건과 관련된 자료는 남아있지도 않더군요." "아... 그게 그러니까... " 찬혁은 서류에서 눈을 들어 머뭇대는 김실장을 올려다 보았다. 파라다이스 호텔 초창기부터 아버지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켜온 사람이다. 호텔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머뭇거리고 있다. "숨겨야 할 무슨 말 못할 사정이라도 있습니까?" "아 그 문제라면 회장님께 직접 여쭤보시는 게..." "실장님." "예!" "제가 아직 미덥지 않으신가 본데," "아닙니다 사장님! 미덥지가 않다니요. 회장님께서 비밀에 부치신 일이라... 관련 자료도 회장님께서 전부 따로 보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회장님께 직접 여쭤보시는 편이..." "아버지 일선에서 물러나셨습니다. 거동도 힘드세요. 더 이상 호텔 일로 신경 쓰시게 해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은 제가 파라다이스 그룹 총 책임자 입니다. 알아야겠습니다. 말씀해주시죠." "아 예... 그러니까 경주 콘도가 매각된 이유가 신화당 부도를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게 문제가 됐던 겁니다." 다시 수면 위로 둥실 떠오른 신화당, 잊으려고 안간힘을 쓸 때마다 비웃기라도 하듯 어김없이 또아리를 풀어 고개를 쳐드는 얼굴, 신 아영... 찬혁의 미간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 돈이면 부도를 막고도 남았을 텐데, 신화당은 왜 공중분해 됐습니까?"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자금이 엉뚱하게도 로얄호텔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로얄호텔? 그게 무슨 소립니까?" "회장님께서 경주 콘도를 매각하시려는 이유를 아시고는 사모님께서 굉장히 노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비밀리에 경주 콘도를 이미 로얄호텔 사모님께 양도한다는 서류 절차를 다 마무리 해놓으신 바람에 일이 그렇게 됐습니다." "어머니가요?" "예. 그 당시에 회장님 충격이 이만 저만이 아니셨죠." "그 이후에 로얄호텔로 넘어간 게 또 있습니까." "사모님 돌아가시고 나서는 로얄호텔과는 연결고리가 끊어졌고, 그 이후엔 없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만 나가보시죠." "예." 김실장이 나가자, 찬혁은 넥타이를 신경질적으로 잡아 당겨 풀어버렸다. "대체 언제까지 따라다닐 작정이야! 신 아영!" 똑 똑 똑 "뭡니까!" "아 예 사장님! 로얄호텔 쪽에서 계속 연락이 오고 있습니다. 한빛 갤러리 대표 취임식에는 참석 못하셨다고, 오늘 밤 축하연에는 꼭 참석해달라고 하십니다." "새로 부임한 대표가 누굽니까?" "예. 채 리나 대표입니다. 축하연은 7시 한빛 갤러리 입니다." "......" "뭐라고 답을 할까요?..." "안 간다고 하세요." "예?" "참석 안 합니다." "아 예! 알겠습니다." 저기압인 찬혁의 눈치를 살피며 윤비서가 허리를 구십 도로 굽혀 인사를 하고는 급히 물러갔다. 찬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발로 걷어 차 밀어내 버렸다. 그리고는 창가로 성큼성큼 걸어가 창문을 열어 젖혔다. 창으로 훅 불어든 더운 바람이 에어컨 냉기에 맥을 못 추고 습해졌다. "신 아영! 너 뭐야 대체! 이제 제발 좀 가줄래! 지긋지긋하다고!!" 10년 전에 사라져,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여자에게 울분이 터졌다.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린 여자. 심장이 타 들어갔다. 빌딩 숲 사이에 시뻘겋게 끼어있는 태양이 제 심장인 것 같았다. 갑갑했다. 찬혁은 의자 등받이에서 쟈켓을 화락 걷어 들고 사장실을 나갔다. *** "아니! 무슨 회의를 룸싸롱에서 하냐고! 미친 거 아냐? 하면 한다 하기 싫으면 안 한다 딱 잘라 말하면 되지 벌써 몇 번째야? 왜 사람 이리저리 오라 가라 하는데? 잘나가면 다야? 아 진짜 웃기는 사람이네?" 아영은 방금 끊긴 휴대폰 화면에다 대고 싸울 듯이 왕왕 대들었다. 그러다 이내 휴대폰 든 손을 맥없이 떨구고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큰 길을 따라 내려갔다. 일러준 곳에서 모퉁이를 돌았다. "내가 살다 살다 룸싸롱엘 다 가보네. 회원들만 아니면 확 그만두는 건데 아 진짜. 근데 여기 어디쯤 아냐? 어... 저깄다!" 투덜대던 입꼬리를 금새 비지니스 모드로 공손하게 밀어 올리고, 아영은 건물 지하로 내려갔다. 입구에서 안내를 받아 피라미드 속 같은 복도를 지나 룸으로 들어가자, 눈앞에 신세계가 펼쳐졌다. 움찔 물러설 틈도 없이 등 뒤로 문이 닫혔다. "아..." "아이고~ 관장님 이쪽으로 오셔서 한잔 하시죠!" "아 아닙니다. 저는 그냥 가..." "에이~ 여기까지 와놓고 그냥 가시면 섭하죠~ 자자 내 술 한잔 받으면 오케이! 무조건 벗기로!" "예? 그럼 여기 갤러리 스케쥴 먼저 확인해주실래요? 저희는..." "자 먼저 쭈욱! 그리고 스케쥴 오케이?" "마셔라! 마셔라!" 누드 모델 정기 모임이라도 열린 건지 죄다 헐벗고 앉아 물개박수를 치며 응원을 했다. 아영은 빨리 끝낼 생각으로 위스키 잔을 받아 단숨에 비워버렸다.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술집에서 술 먹고 박수 받긴 또 첨이었다. 자리를 피하려 서둘렀다. "자 이게 스케쥴이구요 여기 보세요 자 사인 여기요. 여기." "아 우리 관장님 화끈한데 성격도 급하시네~ 여기 사인 하면 한잔 더 콜?" "예? 아 하하...콜..." "오케이! 자 옛다 사인~" "아 감사합니다! 그럼 일정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만나서 다시 하기로 하고, 전 이만..." "어라? 한잔 더 하셔야지~" 눌러 앉히려다 술기운에 휘청 기우는 틈을 타 아영이 재빨리 옆자리를 빠져 나왔다. "한잔은 다음에 제가 사기로 하고... 그럼 노세요 들!" "에헤이 관장님! 이러면 섭하지~ 관장님~" 붙잡으려고 허우적대는 손을 뿌리치고 뒷덜미를 붙들리기라도 할까 봐 자라목을 한 채로 아영은 기를 쓰고 룸을 뛰쳐나왔다. 쿵! "아야! 아 씨 뭐야!" "어머! 죄송해요!" 낯 뜨겁고 민망한 방에서 미친 듯 도망쳐 나오던 아영이 문 앞을 지나가던 한 남자와 부딪혔다. 튕겨 나간 남자가 반대편 벽에 납작 달라붙고, 그 충격으로 남자의 휴대폰이 카펫 위로 저만치 날아갔다. 아영은 냉큼 달려가 휴대폰을 주워다 공손히 건넸다. 마침 다행히 전화벨이 울렸다. "아 죄송합니다! 여기 전화... 왔네요." "아이 씨 앞 좀 보고 다녀! 요..." "죄송해요! 너무 급해서 그만... 그럼 통화 하세요... " 휴대폰을 냉큼 건네고 줄행랑을 치는 아영의 뒷모습을 넋 놓고 눈으로 좇으며 남자가 휴대폰을 귀에 갖다 댔다. "어 왜. 뭐? 찬혁이 왔다고? 아 이 자식 안 온다고 할 땐 언제고! 걔가 오긴 뭘 와! 찬혁이 안 온다니까 딴대로 벌써 쨌지! 아이 씨. 가만! 야 끊어봐 일단! 아 왜는 왜야 대타 구해야지! 방금 엄청난 애 만났다. 찬혁이랑 딱이야! 오늘 찬혁이 비위 맞춰놔야 걔 모임에 나올 거 아냐 끊어!" 남자는 휴대폰을 바지 뒷주머니에 찔러 넣고 쏜살같이 아영을 좆아 뛰어나갔다. "거기! 이봐요!" "예? 저요?" "예 그쪽!" "왜, 왜요? 휴대폰 안돼요? 깨졌어요?" "오늘 대타 좀 뛰죠?" "대타요? 어어어 저기요! 잠깐만요!" 남자는 다짜고짜 아영의 손목을 휘어잡고 냅다 뛰었다. 입구 계단을 오르다 말고 영문도 모르고 붙들려, 다시 건물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이보세요! 이 손 좀 놔요!" "이왕 온 거 우리랑도 좀 놀다 가요." "아니요! 저 놀러 온 거 아니거든요! 일하러 왔다구요! 이거 놔요!" "일이야? 진작 말하지! 선불이야 후불이야?" "예에?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에헤이 선수끼리 빼기는! 깔끔하게 갑시다. 대타!" 놓치기라고 할까 봐 내빼려고 용을 쓰는 아영을 꼭 붙들어 쥐고 미로 같은 복도를 전속력으로 돌고 돌아 마침내 남자가 문을 열어젖히고 룸 안으로 들어갔다. 질질질 끌려와 와락 던져진 반동으로 꼬꾸라질 듯 테이블 앞까지 날아 들어간 아영이 겨우 중심을 잡고 뒤로 팩 돌아섰다. "저 대리는 뛰어도 대타는 안 뛰거든요! 뭐 하는 짓이에요 지금?" "여기까지 따라 와놓고 내숭은? 1차만 하고 가면 섭하잖아. 일이라며? 2차도 뛰지? 아까 그 방 보다 여기 물이 엄청 훌륭하거든." "뭐라구요? 이봐요!" "야 찬혁아 아까 내가 말했던 애다. 끝내주는 애. 자 봐라." 남자가 따지고 드는 아영을 전시품처럼 보란 듯이 화락 돌려세웠다. 팽그르르 돌려세워 진 순간, 사납게 치켜뜨고 있던 아영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쌍쌍 파티라도 열렸는지 남녀가 쌍으로 한 몸처럼 달라붙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아영을 쳐다보고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면면을 당황스럽게 둘러보던 아영의 두 눈이 테이블 중앙, 상석인 듯 보이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얼음 조각처럼 앉아있는 남자의 두 눈과 마주쳤다. 얼음송곳처럼 차갑고 날카롭게 심장을 파고드는 시선. 그날, 마지막으로 본 그의 눈이다. 변한 게 없었다. 그였다! 아영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저절로 주춤주춤 물러나는 두 다리가 사시나무처럼 와들와들 흔들렸다. 사선으로 둘러매고 뛰느라 가슴을 볼썽사납게 둘로 나눈 가방 끈을 저도 모르게 단단히 움켜쥐었다. "어어어 이봐! 대타! 어디가! 야!" 아영은 다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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