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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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 속 같은 복도에서 길을 잃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찬혁의 서릿발 같은 두 눈이 끈질기게 따라오는 것만 같아 머릿속이 하얗게 얼어붙어 버렸다. 어디로 도망치고 있는지도 모르고 뛰다 보니 저 앞에 비상구 표시등이 보였다. 계단을 올라가는 사람 그림이 천국 행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살았다! 아영은 계단을 두 칸 세 칸 뛰어 올라갔다. 밖은 건물 뒤 주차장이었다. 드디어 빠져나왔다는 안도감에 허리를 움켜쥐고 숨을 몰아쉬었다. 쫒아 오나? 순간 섬뜩해져 방금 빠져나온 지하 계단을 홱 돌아보았다. 쫓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아, 다행이다! 휴!” “신아영!” “허!” 소스라치게 놀라 자라목처럼 바짝 움츠린 채, 아영은 천천히 돌아섰다. 각을 세운 어깨가 잔뜩 화가 나 보였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건물 벽에 비스듬히 기대선 실루엣이 불량하고 위험해 보였다. 찬혁이였다! 눈 하나 깜짝 않고 쳐다보고 있다. 창백한 주차장 비상등 아래 서 있는 그의 모습이 유령처럼 하얘서 꿈만 같고 거짓말 같았다. 예기치 않은 재회가 두려워서 가슴이 요동치는 줄 알았다.마구 흔들어 놓은 맥주 캔 같았다. 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죽기 살기로 도망칠 땐 언제고, 어이없게도 지금, 그의 첫 마디를 기대하고 있다. ‘과연 무슨 말을 해줄까? 드디어 찾았다? 미치도록 그리웠다고? 아니면...’ “여전하네. 신 아영.” 따기도 전에 맥주 거품이 꺼졌다. “아, 고마워. 기억해줘서...” “뭔 줄 알고 고맙데.” “그게 뭐든 기억해준 거니까...” 찬혁의 반듯한 이마에 주름이 일었다. 잊을 수 없어서 괴로움에 몸부림친 사람한테 고맙단다. 차아! 헛웃음이 터졌다. 10년 동안 잊지 못해 발버둥 친 건 저 혼자였던가. 배려 없이 담백하기만 한 아영의 반응에 냉랭하던 찬혁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말이 삐딱해졌다. “말귀 못 알아듣는 것도 여전하고. 뒷구멍으로 도망치는 것도 여전하고. 너 맞네.” 아영은 이 상황이 갑자기 허무하고 시시해졌다. 10년을 도망치고 숨었다. 지독하게 사랑해서 떠났다. 그래서 지금도 미친 듯 도망쳤다. 그런데 그 사랑의 도피가 코미디처럼 어리석고 우습게 느껴졌다. “나 맞아서 몹시 실망한 것 같네.” “말귀는 못 알아들으면서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다. 눈치가 그렇게 빠삭한 사람이 한다는 소리가 기억해줘서 고마워? 기억해줘서 고맙다는 사람이 사라지고 도망치는 심리는 뭐지? 사디스튼가?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쾌감을 깨서 어쩌나?” “네 고통이 성적 쾌감을 불러일으킬 만큼 자극적이지가 않은데, 어쩌지? 너야말로 쾌감을 느끼고 싶은가 본데, 난 아무렇지가 않네. 미안하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찬혁이 위협적으로 성큼 다가섰다. 방어적으로 아영이 퍼뜩 물러났다. 그 모습이 찬혁을 타인처럼 느끼게 했다. 끓어오르던 속이 화르륵 넘쳤다. 얼굴부터 벌겋게 데어갔다. 혼자만 껴안고 있었던 10년이 분하고 억울했다. 냉정을 잃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무렇지도 않아? 자극적이지가 않아? 죽을 만큼 사랑해놓고 이제 와서 나 몰라라? 넌 그게 그렇게 쉽디? 너 겨우 이거였어?” “쉽지 않았어! 지금도 안돼서 짜증나! 잊을 수 없었어! 죽도록 보고 싶어서 정말 죽을 뻔했다고! 죽지 못해 살았어! 이제 됐어? 내 고통이 네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됐니? 쾌감이 느껴져? 짜릿해? 더해줘?” “그만해!” 이렇게 터뜨릴 줄 몰랐다. 아니 터뜨릴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런데 뱉어버리니까 속이 다 후련했다. 심장을 옥죄이던 형틀을 비로소 벗어 던진 기분이었다. 이게 뭐라고, 이 말이 다 뭐라고 혼자 끌어안고 끙끙댄 건지, 아영은 분하고 억울했다. 뼈있는 말이 아니라 진짜 뼈라도 때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욱하고 치미는 화를 애써 눌렀다. 그러면 안 되니까. 또다시 아프게 하면 안 되니까. 더는 아프면 안 되는 사람이니까. 아영은 씩씩대던 어깨를 툭 떨구었다. “그래 그만하자. 10년 만에 만나서 겨우 이런 얘기나 하게 될 줄은 몰랐네.” “10년 만에 만난 게 뭐. 만나고 싶어서 만난 것도 아니고, 만나기로 약속하고 만난 것도 아닌데, 특별 멘트라도 기대했나? 그 말 한마디 듣겠다고 10년을 손꼽아 기다린 건 아닐 테고, 설마 내가 특별 멘트 하나쯤은 준비하고 기다릴 줄 안 거야?” “어 맞아. 기대했어. 그랬던 것 같아. 근데 지금은 그게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다.” “하아! 너 완전 지능범인 건 알지? 사람 미치게 만드는 지능범. 기다리는 거 뻔히 알면서 안 나타나고, 붙잡으라고 일부러 도망가고, 이젠 듣고 싶은 말까지 해달라? 특별 멘트 하나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지 그랬냐! 듣고 싶은 말이 뭔데? 지금이라도 해줄 테니, 말해!” “이젠 의미 없어졌다고. 그러니까 듣고 싶은 말 없다고. 너도 특별 멘트 없으면 그만 헤어지자.” “의미가 없긴 왜 없어! 너한텐 모든 게 다 이렇게 쉬운 거야? 10년 동안 기대했다며, 그게 지금 갑자기 무의미해진다고.? 너 나한테 진심이 있긴 했어?” “쉽지 않다고 했지! 진심 없었던 적 없었어. 매 순간이 너무 진실하고 간절하고 소중했어!” “그런데 도망갔다고? 왜!” “하... 같은 말 돌리지 말자. 다른 할 말 없으면 갈게.” “야! 받아!” 돌아서는데, 아영을 겨냥해 뭔가가 갑자기 날아왔다. 화들짝 받고 보니 차 키였다. “뭐 하는 거야?” “다른 할 말? 누가 너랑 10년 만에 만난 기념으로 회포 풀고 싶대? 대타는 안 뛰어도 대리는 뛴다며. 뭐해? 차 가져와. 저기.” “하아... 다시 한번 미안한데, 나도 술 한잔했거든. 오늘은 대리 못 뛰겠다. 딴사람 불러.” 차 키를 찬혁의 발 앞에 있는 힘껏 던져 버리고 아영은 홱 돌아서서 성큼성큼 자리를 떠났다. 울컥 화가 치밀었다. 눈물까지 왈칵 솟구쳤다. 짧은 대화가 둘 사이에 놓인 10년이라는 긴 시간의 장벽을 순식간에 무너뜨린 대신, 10년의 그리움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그 10년을 견딘 사랑을 퇴색시켜 버렸다. 기분이 거지 같았다. “가긴 어딜 가!” “아! 왜 이래! 이거 놔!” 몇 걸음도 못 가서 아영이 찬혁의 손에 붙들려 끌려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놔 줘!” “술 마셨다며. 타. 내가 대리 뛰어줄게.” “아니! 전철 탈 거야. 놓으라니까!” 아랑곳하지 않고 버티는 아영을 차에 밀어 넣었다. 난데없는 실랑이에 흥분해 호흡이 가빠졌다. 숨을 몰아쉬며 찬혁을 노려보았다. 그의 난폭함에 심장이 무섭게 두근댔다. 그런데도 지지 않으려고 눈에 핏발까지 세워가며 매섭게 쏘아보았다. 차 문을 막고 서서 씩씩대는 아영을 내려다보며 찬혁이 빙긋 웃었다. 비아냥이었다. “나 운전석 가는 사이에 뛰어내리고 그런 거 하지 마라. 또 잡으러 가고 그런 유치한 거 하지 말자고. 다시 잡혀 올 거 기대하면서 도망치는 거 그것도 변태 심리야. 알아?” “하! 뭐? 변태?” 부릅뜬 눈앞에서 차 문이 턱 닫혔다. 찬혁이 차를 빙 돌아오는 동안 아영은 백만 번의 갈등에 흔들렸지만,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운전석에 올랐다. “벨트 매.” 여전히 백만 번의 갈등이 아영을 뒤흔들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내려! 지금이야!’ 꼼짝도 하지 않는 몸 위에 붙은 머리가 저 혼자 다급했다. “벨트 매라고. 안 들려? 매줘?” 목석같이 앉아있는 아영의 몸 위로 찬혁의 상체가 불쑥 들어왔다. 너무 갑작스러워 휘둥그레진 아영의 눈앞에 찬혁의 옆얼굴이 머물렀다. 천천히, 느리게 아영의 시선이 얼굴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이마에서 눈으로 코로 입술로 턱으로, 홀린 듯 미끄러져 내려갔다. 인간미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너무나 반듯했다. 기분 탓일까, 조금 날카로워 보이는 것만 빼면, 변한 게 없었다. 하마터면 만져보려고 손을 올릴 뻔했다. 허벅지 위에 양손을 꼭 쥔 순간, 찬혁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순간 움찔 몸을 사렸다. 동그래진 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던 찬혁이 시선을 입술로 떨구었다. 마치 입술을 처음 보기라도 한 사람처럼 눈을 떼지 못하고 몰입했다. 너무나 의도적이고 노골적이라 입술이 화끈 달아오르고, 목이 타들어 갔다. 마른 침을 꼴깍 삼키는데, 벨트가 딸깍 채워졌다. “한번 하자.” “.... 뭐?” “키스. 이것도 여전한가. 해보자고.” “미쳤어?” “너도 궁금하잖아. 10년 동안 기다린 게 이거 아냐? 특별 이벤트.” “비켜! 내릴 거야! 아!” 밀치는 순간, 얼굴이 와락 붙들리고, 입술이 덥석 물렸다. 앙다문 입술을 악착같이 가르고 찬혁이 들어왔다. 어깨를 때리고 버둥댈수록 그는 집요해졌다. 입안을 휘저어놓고 물러나며 입술을 물고 제멋대로 탐했다. 깊숙이 파고들어 심장을 핥을 기세로 맹렬히 밀어붙였다. 동시에 의자가 벌컥 누웠다. 뒤로 벌렁 넘어지며 아영이 찬혁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거부할 수 없었다. 아니,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숨을 쉴 수 없었다. 호흡이 가빠져 저도 모르게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그 순간, 뱀처럼 감기던 그의 혀가 일순 움직임을 멈추고 매몰차게 빠져나갔다. 아득히 날아오르던 아영이 갑자기 저 혼자 추락해버렸다. 입술이 여전히 애매하게 열린 채였다. 그의 냉정한 돌변은 격정적으로 퍼붓던 키스보다 그녀를 더 소스라치게 했다. 당황스러움도 잠시, 수치심이 새빨갛게 밀려와 키스가 끝나버린 순간에 그대로 얼어붙어 꼼짝할 수가 없었다. 사람을 우스운 꼴로 만들어 놓고, 한마디 말도 없이 찬혁이 운전석으로 물러갔다. 기가 막혔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아영이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등받이에 턱 기대앉아 찬혁은 곧바로 시동을 켰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죽어라 도망칠 땐 언제고, 그랬으면 계속 도망을 치던가! 싫다면서, 그럼 끝까지 밀어내던가! 그 한 번의 입맞춤을 잊지 못해 10년을 미친놈처럼 살았는데, 고작 혓바닥 희롱 몇 번에 무너지는 아영이 기가 막혔다. 그런 아영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싶은 분노가 치밀었다. “내려.” 하아! 아영은 할 말을 잃었다. 내리라고 난리를 치던 머리마저도 기가 막혀 하얗게 질려버렸다. 찬혁의 말이 맞다. 10년을 기다려온 이벤트였다. 도망치고 숨기 바빴던 매시간, 그녀는 정작 이 한순간을 꿈꿨다. 그러나 그 순간은 치욕으로 끝났고, 기다림의 대가는 모멸감이다. 또다시 도망칠 일만 남았다. 그런데, 도망가는 게 맞는데, 당한 기분으로 도망가고 싶진 않았다. 지금 내리면 잡지 않고 가버릴 것이다. 버려진 기분은 당하고 물러난 기분보다 더 더러울 것 같았다. 아영은 부릅뜬 눈을 앞 유리에 고정한 채, 고집스럽게 버텼다. “난 분명히 기회를 줬다. 안 내린 건 너야.” 미동조차 하지 않는 아영을 돌아보지 않고 찬혁은 차를 출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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