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못 할 이유

4334
아영은 고개를 돌렸다. 찬혁을 외면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외면하고 싶은데, 달리는 차 안에서 그를 피할 방법이란 고개를 돌리는 게 고작이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이 두려웠다. 조금 전 그의 무자비한 행동이 그 예고편이었을 테니까. 그걸 예상 못 했을 리 없으면서, 내리라고 해도 버텼다. 그러나 지금, 찬혁의 숨 막히는 침묵은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온몸으로 뿜어내는 시커먼 아우라가 무섭고 불길했다. 질식할 것 같았다. 그런데도 아영은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키스를 당한 여자가 결국엔 그 폭력을 탐닉하고 갈구한 우스운 꼴로 전락해버렸다. 수치심에 휩싸여 그 어떤 미세한 소음도, 미동도 만들어낼 수가 없었다. 툭. 투둑. 후두둑 빗방울이 창을 두드렸다. 비라도 와주니 짓눌리고 압축된 차 안 공기가 조금은 흐트러지고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무거운 침묵에 잠식당하던 아영이 억눌렀던 숨을 남몰래 내쉬었다. 빗줄기가 금세 거세졌다. 그때, 찬혁이 갑자기 차를 세우고 시동을 껐다. 비의 장막이 두 사람을 밀실 안에 가두었다. ”말해봐. 왜 떠났는지.“ 아영의 얼굴이 순간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결국, 그 질문을 할 줄 알았다. ”떠나야 해서 떠났어. 그뿐이야.“ 최대한 담담 하려 애썼지만, 아영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찬혁이 고개를 홱 돌렸다. 주차장 이후 처음 아영을 보았다. 어두운 차 안, 빗줄기 사이로 일렁이는 네온사인 불빛을 받아 아영의 옆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덤덤한 체하느라 깨물려 발갛게 부푼 입술을 잘근대고 있다. 긴장하면 입술을 물어대는 것도 여전했다. 아영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날. 장례식장에서 널 봤을 때 그땐 내 정신이 아니었어. 너에게 했던 말, 제정신으로 한 말이 아니야.” “알아. 그랬을 거라고 이해했어.” “근데. 이해했다는 사람이 떠난 이유가 뭐야.” “말했잖아. 떠나야 했어. 엄마 일 때문에 서울로 올라온 거야. 정말이야. 그게 다야.” 그제야 아영이 찬혁을 돌아보았다. 차창 위에 흘러내리는 빗물이 찬혁의 얼굴 위에 그림자 져 흘러내렸다. 어둠 속에서 반들대는 그의 두 눈이, 눈동자가 진실을 원하고 있었다. 간절히. “연락은 왜 안 했어. 가면 간다, 어디로 간다, 문자라도 남겨줄 수 있었잖아.” “연락 못 하고 떠난 건, 갑자기 이사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랬어. 새로운 환경에 적응도 해야 했고, 다른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 같아. 어찌어찌하다 보니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어. 그리고 연락하려고 할 때마다 장례식장에서 나를 밀쳐내던 네 모습이 떠올라서 용기가 나지 않았어. 그래서 또 미루고 하다 보니” “10년이 지났다?” 서연이 입을 꾹 다물었다. 변명을 잘라놓고, 찬혁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장황한 헛소리에 어이가 없어, 반듯한 이마에 주름이 일었다. 말없이 자켓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0번을 꾹 눌렀다. 띠리링 띠리링~ 띠리링 띠리링~ “아... 잠깐만...” 아영이 퍼뜩 놀라 발치에 내려놓은 가방 속을 휘저어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 속 발신자를 확인한 순간 입술을 잘근 물었다. “번호 바꾼 줄 알았다?” “......” “10년인데. 휴대폰도 몇 번 바꿨을 텐데 번호도 바뀌었겠지. 그래도 설마. 번호를 바꿀 리가 있나. 아닐 거야. 설마. 이 지랄을 하면서 하루에도 전화를 수백 통도 더 돌렸는데, 문자를 수천 통을 날렸는데. 눈물 콧물 짜면서 빌다가 열 받아 쌍욕을 날리다가, 다시 싹싹 빌어대는 꼴 보면서 재밌었겠네.” “........” “왜. 또 주절주절 헛소리 떠들어보지.” “........” “그래 내 잘못이라고 치자. 장례식장에서 너한테 한 짓 때문이라고 해.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잖아. 땅에 대가리 박는 심정으로 사죄했잖아. 그럼 전화 한 통쯤은 받아줄 수도 있는 거 아냐? 살았는지 죽었는지 문자 하나는 남겨야 하는 거 아니냐고.” “.... 미안해.” “차아! 이유가 뭘까, 그거 듣겠다고 10년을 오기로 버텼는데, 미안해? 그리고 끝? 너는 모든 게 참 쉽구나.” “정말 미안해...” “사람 미쳐 날뛰고 있는 거 뻔히 보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냉정을 유지할 수 있지? 일상생활이 가능했어? 너 진짜 무서운 여자야. 알아? 소름 끼친다고.” 아영의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자, 찬혁의 미간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심장이 욱신 조였다. 그런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차라리 남자가 생겨서 내 생각할 틈이 없었다고 해! 너무 행복해서 나 같은 건 애 저녁에 잊어버렸다고 하란 말야! 거짓말을 하려면 그렇게 하라고! 그랬으면 기분은 더러워도 나도 그냥 똥 밟았다 할 수 있었잖아! 10년간 똥 밟고 서 있은 게 분하고 억울해도 넌 그냥 똥이니까 하고 넘어갈 수 있었잖아! 정말 남자라도 있는 거야? 그래?” “그런 거 아니야!” 아영은 소리치고 싶었다. 고래고래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너희 어머니 돌아가신 거 우리 엄마 때문이라고 했어! 장례식장 다녀온 후에 알게 됐어. 네가 장례식장에서 나보고 꺼지라고 했던 거 그래서 다 이해할 수 있었어. 그걸 알고도 어떻게 널 아무렇지 않게 봐? 아무렇지 않게 전화 받고 메시지 남기며 시시덕대는 게 더 무서운 여자 아니야? 그게 다가 아니야! 널 이용할 거라고 했어! 그래서 날 네 곁에 보낸 거라고 했어! 다 우리 아빠가 꾸민 짓이라고 했어!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네 옆에 붙어 있어? 그걸 다 알아버렸는데 어떻게?' 찬혁이 듣고 싶어 몸부림쳤다는 그 이유를 아영은 가슴 속에서 악을 썼다. 목구멍이 아프도록 그 절규를 삼키고 삼켰다. 지이잉 지이잉~ 찬혁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손에 든 휴대폰을 확인하지도 않고 종료시켜버렸다. “남자 아니면 그럼 대체 뭐야? 나한테 왜 그랬냐고!” 지이잉 지이잉~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곧 목소리를 누그러뜨리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리나야.” 채 리나! 아영이 소스라치게 놀라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사렸다. 그 모든 비밀을 알려준 장본인이었다. 리나의 음성이 수화기 밖으로 명랑하게 울려 퍼졌다. 찬혁은 수화 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들으라는 듯 통화를 이어갔다. “왜 전화했어?” “찬혁아, 지금 어디야? 호텔 앞에 차, 혹시 네 차야?” “어. 호텔 앞이야. 여기 와있는 거야?” “응. 안 내리고 뭐 해?” “곧 들어갈 거야. 넌 여기 웬일이야?” “웬일이긴, 몰라서 물어? 취임식에 못 와서 축하연에는 오겠지 했는데, 너 거기도 못 왔잖아.” “그래서 나 보러 온 거야? 파티는 어쩌고.” 질투를 유발하고 싶은 건지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싶은 건지, 아영을 투명인간 취급해놓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어투로 찬혁이 리나와 통화를 하고 있다. 깊은 울림의 음성이 말끝을 잔잔히 밀어 올릴 때마다 한없이 다정했다. 연인의 말투였다. 아영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결국, 리나의 주장대로 두 사람은 연인이 되어 있었다. 이젠 과거로부터 도망칠 필요가 없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찬혁의 눈앞에서 사라져야 한다. 찬혁의 곁에 리나가 있다. 아빠의 음모를 낱낱이 알고 있는 사람. 그녀가 그의 여자다. “미안하다. 늦었지만 축하해, 채 리나 대표.” “뭐야 말로만?” “말로만 하면 섭하지. 축하주 한잔하자!” “정말? 오늘 왜 그래? 생전 안 하던 호의를 다 베풀고? 얼른 와! 차에 우산 있어? 비 많이 오는데? 내가 나갈까?” 아영은 휴대폰을 가방 안에 쑤셔 넣고 가방끈을 목에 둘러 가슴 앞에 사선으로 맸다. 가방끈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혹시라도 리나가 우산을 들고 마중이라도 나올까 봐, 그래서 함께 있는걸 들키기라도 할까 봐, 아영의 심장이 무섭게 두근댔다. 아영은 다급했다. “나 갈게!” 안전벨트를 풀고, 아영이 문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나 바로 찬혁의 손에 어깨를 붙들려 의자로 와락 당겨졌다. “아!” “방금 뭐야? 여자랑 있는 거야?” “아무도 아냐. 기다려. 금방 들어갈게.” “여자 맞는데? 누구야?” “바에 가 있어. 올라갈게.” “어... 얼른 와...” “응.” 통화를 종료하고도 찬혁은 아영의 어깨를 놓아주지 않았다. “인사는 제대로 하고 가야지. 통화하는 틈에 뒤로 또 내빼게?” “통화 중이었잖아. 방해되고 싶지 않았어.” “방해? 네가 왜 방해가 될 거로 생각해? 무슨 착각을 했길래? 아, 아직도 우리가 특별한 사이라도 되는 줄 안 거야?” “둘 사이에서 빠져주고 싶었단 소리야! 지금 너 이러는 거. 너 아냐. 나한테 상처 주고 싶어서 이러는 거면 해. 다 받아줄게. 하지만 너도 아플 거잖아. 네 맘도 편치 않잖아. 그러니까 그만해.” “뭐? 신아영. 정신 차려. 꿈 깨. 너하고 나 이제 아무것도 아니거든. 끝났다고. 우리 사이에 남은 게 뭐야? 네가 다 부정하고 헌신짝처럼 버려놓고 이제 와서 아쉬워? 미련이 남아? 키스 해보더니 생각이 바뀐 거야? 그 정도로 좋았어? 대타 필요할 때 연락해줘?” 짝! 찬혁의 얼굴이 홱 돌아갔다. “그만해 제발! 이제 우리 끝났다면서 너야말로 왜 자꾸 매달려? 못되게 굴면서 붙들고 안 놔주는 거, 이거 아직 좋아한다는 뜻이야. 그래서 잠시 착각했어. 착각해서 미안하다. 너야말로 언행일치가 안 되네. 사람 헷갈리게 하지 말고, 이제 알았으니까, 이 손 놔.” “아직 좋아한다면. 그거 착각 아니라고 하면. 돌아올 거야?” “..... 아니.” “기가 막혀 웃음도 안 나온다. 도대체 뭐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건지 도저히 모르겠다. 아무리 따지고 캐물어도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결국 그날 장례식장에서 내가 네게 했던 행동 때문이란 소리네. 다 내 탓이었네. 내가 죄인이네. 이유를 몰라서 10년을 몸부림쳤는데, 나 때문이라고? 너도 참 잔인하다. 그래 놓고 끝내 가겠다고? 나 혼자 더 구르라고 지옥에서?” “찬혁아, 네 탓 아니야.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지마. 자책도 자학도 하지 마.” “차아! 병 주고 약 주고 있네. 내 탓이 아니면. 누구 탓인지 안다는 소리야?”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린지는 네가 더 잘 알 거 아냐. 나는 다 내 탓이다 미안하다 하는데, 넌 계속 내 탓이 아니라고는 하면서 도망가려고 하잖아. 뭘 알고 있는데? 뭐가 무서운 건데?” “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제 이런 얘기 그만 하고 싶어... 답도 없어. 계속해봤자 원점일 뿐이야.” “답이 알고 싶어? 그럼 원인 제공자에게 먼저 물어봐야지.” “...... 그만 갈게.” 아영은 더는 머뭇대지 않고 몸을 돌렸다. 차 문이 열린 순간 찬혁의 마지막 말이 섬뜩하게 등에 끼쳐졌다. “너희 어머니께 여쭤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 어머니가 왜 돌아가셨는지.” “........” “너도 알아야지. 내가 어떤 지옥에서 굴렀는지. 궁금하지? 너도 곧 구르게 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전화번호 바꾸지 마라. 우리 아직 해결할 일 남았거든. 이제 얘기 끝났으니까 꺼져.” 문고리를 붙들고 있는 아영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살짝 열린 문 틈새로 비가 들이쳤다. 아영은 목구멍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게 밀고 올라오는 울음 덩이를 억지로 삼켰다. 그리고 돌아앉은 채로 작별을 고했다. “그냥 꺼지려고 했는데, 그냥 도망치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널 다시는 안 보려면, 너도 다시는 날 찾지 않으려면, 네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한마디만 더 할게. 나도 물어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네. 우리 엄마 돌아가셨거든. 그러니까 다시 만날 일 없었으면 해. 갈게.” 말을 마치기 무섭게 아영이 빗속으로 뛰쳐나갔다. 차 문이 턱 닫히고 세상의 모든 소리가 차단되었다. 오직 아영의 말이 밀폐된 차 안에 맴돌았다. 우리 엄마 돌아가셨거든. 찬혁은 차에서 뛰어 내렸다. 아영이 이미 호텔 진입로를 달려나가고 있었다 “아영아! 신아영!” 장대비가 눈 앞을 가려 손을 머리에 이고 달렸다.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에 아영의 모습이 쪼개지고 어른댔다. 그리고 곧 택시에 실려 멀어져 갔다. “신아영!!!” 아영이 탄 택시를 쫓아 찬혁은 미친 듯 달렸다. 우산을 들고나온 리나는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버렸다. “신아영! 돌아온 거야? 감히?”
신규 회원 꿀혜택 드림
스캔하여 APP 다운로드하기
Facebookexpand_more
  • author-avatar
    작가
  • chap_list목록
  • like선호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