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걸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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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호텔 완공은 왜 지연되고 있습니까? 벌써 올봄에 끝나야 했는데, 어떻게 된 거죠?” 찬혁은 모니터에 띄워놓은 회의 자료에서 눈을 들어 회의석 양쪽에 죽 늘어앉은 임원진들을 돌아보았다. 고개를 떨구고, 모니터만 들여다볼 뿐, 누구 하나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전무님.” “아, 예! 그게 말입니다. 회장님께서 지시하셨던 게 있어서요. 호텔 주차장 부지에 무허가로 난립해 있는 포장마차 업주들 사정을 봐주시느라 그동안 철거작업을 유야무야 하시는 바람에 그 사람들이 들고일어나 지금 여론몰이를 하는 통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중입니다. 방송국에서 취재 요청이 쇄도하고 있고, 현장에도 카메라들이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상황이라 자칫 강경하게 밀고 나갔다가는 그간 회장님께서 쌓아오신 기업 이미지에 타격이 올까, 현재 합의점을 찾느라 고심 중입니다.” “합의점이요? 왜 우리 땅을 불법 점거하고, 몇 년간 부당 이익을 취하고 있는 파렴치한 사람들 사정을 고려합니까? 이거야말로 적반하장 아닙니까?” “아, 사장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만, 회장님께서 거기가 그 사람들 삶의 터전인데 절박한 사람들 강경하게 몰아내려 했다가는 불미스러운 사태로 번지기 쉽다고, 사정 살펴 가면서” “상무님! 아니, 이 방에 계신 여러분은 지금 대체 누구와 일하고 계시는 겁니까? 여기 앉은 이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습니까? 왜 우리가 그 사람들 처우까지 일일이 보살펴줘야 합니까? 그래야 할 의무라도 있습니까? 법적으로 책임져야 할 사항이 있습니까?” “아 그런 건 절대 없습니다! 다만 회장님께” “그럼 계획대로 처리하시죠! 이번 완공 결과 및 그간의 성과를 인사고과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찬혁의 서슬 퍼런 두 눈이 고개를 떨군 채, 입맛만 쩝쩝 다시고 있는 임원들을 죽 훑고 지나갔다. “더 하실 말씀 없으면 그만 나가들 보시죠!” 서로서로 눈치를 보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느라 꾸물꾸물 일어서는 임원들을 외면해버리고, 찬혁은 한숨을 집어삼켰다. 갑자기 피로가 확 몰려왔다. 넥타이를 당겨 느슨하게 풀고, 목을 조여오는 셔츠 단추를 열어젖혔다. 매번 이런 식이다. 찬혁의 입에서 떨어진 지시가 직진하지 못하고 굽이굽이 꺾인 통로를 지나다 벽에 부딪혀 결국엔 지지부진 진척이 없었다. 파라디이스 그룹을 일으켜 놓은 아버지의 업적이 새삼 우러러 보이는 순간이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한없이 움츠러드는 찬혁의 어깨였다. "하아..." 찬혁의 입에서 결국 참았던 한숨이 터졌다. “김 실장님.” “예 사장님!” “목포 현장 담당자가 누굽니까? 제가 현장에 한 번 내려가 보고 싶은데요.” “아, 예. 그럼 제가 모시겠습니다. 언제 방문하시겠습니까?” “윤 비서에게 일러 놓겠습니다. 스케줄 맞춰 주시죠.” “예! 준비해놓겠습니다. 그럼 다른 하실 말씀 없으시면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아! 신화당 신우영 회장님 행방은 아직입니까?” “아 그게, 윤 비서가 단서를 찾긴 했는데, 한곳에 정착하신 게 아닌 듯해서 시간이 좀 걸리고 있습니다.” “어디 계십니까?" "현재는 일본에 계신 거로 나옵니다." "일본이요?” “예. 조금만 기다려 주시죠. 장소가 좁혀지고 있으니, 곧 찾을 것 같습니다.” “찾는 즉시 가겠습니다. 준비해주세요.” “예. 준비하겠습니다.” “나가보세요.” “예. 그럼.” 김 실장이 물러가고, 텅 빈 회의장에 잠시 우두커니 앉아있던 찬혁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퍼뜩 꺼냈다. 열심히 들여다봐도 아영의 답장은 없었다. 벌써 삼 개월째다. 기다림의 고통이 아영을 만나기 전보다 더 짙고 새까맣게 찬혁을 잠식해갔다. ‘전화를 받는 건 고사하고 문자를 읽지도 않으니 답이 없을 수밖에. 읽어도 안 할 애지. 10년을 그만큼 당해놓고, 또 기대하고 기다리는 심리는 뭐냐! 미치겠네!’ 그 심리가 뭔지 너무도 잘 알아서, 그런데도 꺼지라고 보기 좋게 내쳐놓고 10년 동안 한 짓을 반복하는 꼴이 우스워서 저에게 울화가 치밀었다. 찬혁은 휴대폰을 신경질적으로 안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회의장을 나서자마자 윤 비서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사장님. 서울지방경찰청 양성호 경위라는 분께 전화가 왔었습니다. 찾았다고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찾았대요?” 화들짝 돌아본 찬혁에 놀라 윤 비서가 주춤 물러섰다. “아, 예! 뭔진 모르지만, 찾았다고 합니다!” 찬혁은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윤 비서, 차 대기시켜요!” “예! 사장님!” 사장실로 돌아온 찬혁이 두서없이 창가를 오락가락 헤맸다. 기대와 흥분으로 휴대폰을 든 손이 떨리고 손바닥에 식은땀까지 배어 나왔다. “어 성호야! 찾았어? 어디 있데?” “야 찾았다! 메시지 막 보내려던 참이다. 걔 너희 호텔 바로 앞에 있더라?” “뭐? 여기?” 찬혁은 느슨하게 늘어진 넥타이를 마저 당겨 풀어내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다니까?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어떻게 코앞에 두고 못 만날 수가 있지? 오다가다 부딪힐 수도 있었잖아. 찾은 거보다 그게 더 신기하다니까. 지금 아영이 일하는 갤러리 주소, 전화번호, 그리고 집 주소 보냈으니까 봐. 가서 확인했어. 거기 있더라.” “만났어? 내 얘기 해?” “안 만났어. 그냥 보고만 왔어. 꼭꼭 숨으려고 작정한 앤데, 나 보고 어디로 사라져 버리면 어쩌라고. 찾아내라고 너한테 또 볶이라고? 내가 미쳤냐 그 짓을 또 하게? 아무튼, 난 찾아줬다. 놓치기만 해라 그냥!” “고맙다. 다시 연락하자.” “그래 들어가라.” 전화를 끊자마자 찬혁은 메시지창을 띄웠다. “노원구.” 휴대폰을 든 손이 무릎 위에 툭 떨어졌다. 찬혁은 벌떡 일어나 창가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창틀을 짚고 흥분으로 전율하는 몸을 버틴 채, 창밖에 펼쳐진 빌딩 숲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바로 저기 아영이 있다. 손 닿을 곳에. 성호 말마따나 신기해서 기가 다 찼다. 찬혁은 휴대폰을 안주머니에 밀어 넣고, 사장실을 나갔다. *** “관장님~! 오늘 회식해요! 기초 회화반 마지막 수업인데 우리 회식 한번 해요~!" “네~! 뒤풀이해요. 관장님!" “우후~ 갑시다~!” “관장님, 수업 벌~써 끝났는데요! 이제 그만하고 한잔하러 가요~!” 물통에 붓을 빨다 말고, 아영이 회원들을 돌아보았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죄송해요!” 어느새 9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끝날 시간에서 30분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아무튼, 우리 관장님 열성적이시라니까. 다른 강좌는 시간 칼같이 끊던데.” “그러니까! 이렇게 수업 더 해주는 쌤 없다니까요!” “관장님 그동안 정 선생님 대신 고생하셨는데, 오늘은 저희가 마지막 수업 기념으로 모실게요! 가시죠~!” “아니에요! 다들 고생하셨는데, 제가 사야죠.” “아이구! 무슨 말씀이세요! 관장님은 오늘 저희 믿고 따라만 오시라니까요~!” “매번 술자리에 빠지셨잖아요. 이번에는 마지막 수업 기념이니까 꼭 같이 가셔요. 이번이 아니면 우리가 또 언제 관장님 모시고 술 한잔하겠어요? 이번에 한국을 빛낸 100인의 아티스트에 올라가셔서 엄~청 바쁘시면서. 오늘은 꼭 같이 가셔요. 아셨죠?” “아, 네.” 이젤을 벽으로 밀고, 정리하는 손들이 분주하고 요란했다. 회사 일 마치고 달려온 앳된 얼굴의 새내기 직장인도, 자녀들 뒷바라지에 퇴색된 소녀적 감성을 뒤늦게 되살리고 있는 어머니들도 그리고 수줍은 청일점 정비소 사장도, 다들 술자리 생각에 들썩였다. 신나게 자리를 정리하고 화실을 우르르 몰려나온 회원들이 아영을 에워싸고 화기애애하게 웃음꽃을 피우며 거리를 내려가 인근 고깃집으로 들어갔다. 예약되어있었는지, 이미 테이블이 길게 이어져 세팅되어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숯불이 상 가운데 하나씩 끼워지고, 곧이어 불판이 올려졌다. “언제 이렇게 예약까지 하셨어요?” 아영의 눈이 수강생들의 성의에 감동해 동그랗게 커졌다. “관장님 그동안 수고하셨는데, 이 정도 준비는 당연히 해야죠. 이런 거는 우리 아줌마들한테 딱 맡기면 돼요.” “그럼 그럼! 이전 관장님이 다 말아먹고 빚까지 떠넘기고 간 거 수습하시랴, 회원들 전시회 챙겨주시랴, 개인전 준비하시랴 아유~ 고생이야 말해 뭐해요. 우리 청일점 사장님! 고기 좀 뒤집고 해봐요!” “아, 예. 예예...” 한 명뿐인 남자 회원이라고 어르고 예뻐하고 놀려대는 어머니들 틈바구니에서 정비소 사장이 퍼뜩 집게를 들었다. 곧이어 시원한 맥주가 잔마다 가득 넘쳤다. “자자 오늘은 이 왕언니가 쏘는 거야! 다들 시원하게 쭈욱~!” “우우~ 관장님 건배!” "감사합니다~ 건배~" 건배를 외치고 잔을 꺾어대는 회원들 곁에서 흐뭇하게 웃고 있는 사이, 아영의 앞 접시로 양념갈비가 쉴새 없이 옮겨졌다. “관장님 이거 좀 드세요.” 불기운인지, 술기운인지 정비소 사장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 네 감사합니다. 저 신경 쓰지 마시고 좀 드시면서 구우세요. 집게 주세요. 제가 할게요.” "제가 하겠습니다. 드세요." 회원들의 의미심장한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쏠렸다. 둘이 제법 잘 어울리지? 들으라고 던지는 귓속말. 아영이 몸을 틀고 맥주를 벌컥벌컥 비웠다. 작정하고 자리를 만든 회원들 같았다. 난처했다. 아영은 술잔이 차기 무섭게 비웠다. 2차에서 겨우 빠져나오니, 어느새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술기운을 후 몰아 쉬고, 전신주에 대롱 이는 전구 알을 세어가며, 흐느적흐느적 언덕을 올라갔다. 가로등 불빛이 골목 어귀마다 노랗게 부서져 내렸다. “하아. 좋다.” 아영은 이 언덕길이 참 좋았다. 매일 올라도 매일 좋았다. 교복 치마를 휘날리며 찬혁을 만나러 한달음에 뛰어오르던 그 산길 같았다. 아영에게는 추억으로 들어서는 언덕길이었다. 찬혁에게 가는 길. 올라가고 올라가다 보면 오두막이 나오고, 고갯마루에 서서 그가 손을 흔들었다. 어느새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 그의 이마에 맺혀있던 땀방울, 이마에 달라붙은 잔머리를 넘겨주던 그의 손길. 여름 오후처럼 후끈하고 달큰 했던 첫 키스... 점점 가팔라지는 언덕 중간에서 아영은 목을 길게 빼고 아련한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언덕 끝 마지막 전신주에 달린 전구 알이 오늘도 제멋대로 깜빡이고 있었다. 탁 켜졌다 탁 꺼지는 전등불 아래 어김없이 추억 속 찬혁이 서 있었다. 아영이 손을 흔들었다. 아영은 오늘도 그렇게 추억을 걸었다. 후들대는 다리가 주저앉을세라 난간을 부여잡고 언덕 위에 겨우 올라섰다. 찬혁의 환영은 어느새 연기처럼 사라지고, 꿈에서 깨니, 취기가 확 올라왔다. 술기운을 후후 몰아 쉬자 메스껍던 속이 위로 확 쏠렸다. 우웁. “신아영!” “웁?” 비틀비틀 구부정하게 서서, 아영은 게슴츠레한 눈에 힘을 모았다. 이미 역류하기 시작한 속이 입안 가득 고였다. “잘한다. 지금 시간이 몇 시야?” 찬혁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꿈이 총천연색이었다. 입체적이었다. 우와. 신기했다. “술을 얼마나 마셨길래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거야! 이리와!” “우웁! 우욱! 파하…” “... 아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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