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혁의 가슴에 붙어있던 입이 떨어지자, 아영이 연체동물처럼 흘러내렸다.
“아, 미치겠네. 야 정신 차려. 신아영! 무슨 술을 이렇게 많이 마신 거야? 일어나봐!”
흐느적대는 아영을 옆구리에 끼고, 찬혁은 낮에 와서 확인한 이층집 쪽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앞에 겹겹이 놓인 화분을 넘느라 한바탕 소란스러워도 안에서 아무 기척이 없는 것으로 봐서 이 집도 비어있는 게 분명했다.
“어 어 계단 조심!”
그 정신에도 아영이 본능적으로 난간 없는 컴컴한 지하 계단으로 발을 내디뎠다. 찬혁은 양복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플래쉬를 켜고, 발아래 계단을 가늠하며 아영을 바싹 붙들고 더듬더듬 내려갔다. 계단을 다 내려오자 몸 돌릴 공간도 없이 바로 문이 나타났다. 찬혁은 마지막 계단에서 내려서지도 못하고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혀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방이었다. 기가 찼다. 반지하 창문 아래 작은 매트리스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는 게 보였다. 축 처진 아영을 들쳐 안아 매트리스 위에 끄응 내려놓고 양복 재킷 먼저 화다닥 벗었다.
“웁! 하아, 진짜!”
오만 인상에 코까지 틀어막고 멀찍이 들고 가 옷장 문고리에 걸었다.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소매 단추를 풀어 둥둥 걷어 올리고 얼굴에 흘러내리는 땀을 손바닥으로 밀어내며 찬혁은 주변을 휘 돌아보았다. 한 바퀴 돌 것도 없었다. 선 자리가 방이고 부엌이고 현관이었다. 씽크대로 가 눈앞에 달린 캐비닛을 열었다. 모양과 크기가 제각각인 컵 두 개가 나란히 앉아있었다. 그게 다였다. 컵 하나를 꺼내 들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텅 비어있었다. 하는 수 없이 씽크대 수도꼭지를 틀었다.
쏴아~
“물은 나오네. 차아...”
찬혁은 컵에 수돗물을 받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자리에서 얼굴에 땀을 대충 씻어내고 턱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을 손등으로 쓱쓱 밀어내며 돌아섰다. 침대 머리 위 창문에서 부서지는 한 줌 달빛을 받아 아영의 얼굴이 창백하게 빛났다. 찬혁은 씽크대에 기대서서 아영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다시 만나기만 해봐. 벼르고 벼르며 혼자 수도 없이 반복한 수천수만 개의 말이 머릿속에서 모두 지워졌다. 10년의 미움도 원망도 울화통도 연기처럼 날아갔다. 그 빈 자리에 아영이 견뎠을 10년의 세월이 한꺼번에 밀고 들어와 가슴을 아프게 짓눌렀다.
“대단하다. 신아영. 이렇게까지 해야 했냐.”
죽은 듯이 반듯하게 누워있던 아영이 옆으로 돌아누웠다. 찬혁은 매트리스로 다가가 머리맡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얼굴 위에 수북이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손가락 사이에서 차르르 떨어지는 머릿결도, 말랑한 귓불도, 하얀 이마도, 수척한 볼만 빼면 다 그대로였다. 그리고 입맞춤도. 입술 위를 더듬는 찬혁의 손 위에 아영의 손이 포개졌다. 꼭 쥐었다. 가슴 앞에 끌고 가 품에 안고 아영이 몸을 바짝 웅크렸다.
“미안하다. 너무 늦게 와서.”
손을 붙들린 채로 찬혁은 아영의 앞에 마주 누웠다.
***
화들짝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영은 주방 벽에 걸린 동그란 벽시계를 노려보았다.
8:40
“하, 안 늦었네...”
다시 풀썩 누웠다.
“아 머리야...”
머리가 반으로 쪼개질 것 같았다. 게슴츠레 뜬 눈앞에 별이 어지럽게 깜빡였다. 눈을 감았다. 잔영이 반딧불처럼 날아다녔다. 그리고 보이는 찬혁의 얼굴!
“허!”
아영은 스프링처럼 발딱 튀어 올랐다. 일어나 앉자마자 휘둥그레 떠진 눈앞에 양복 상의가 보였다.
띠링.
앉은뱅이 상 위에서 가방을 가져다 가방 속을 휘저어 휴대폰을 꺼냈다. 찬혁의 메시지였다.
[세탁해놔. 밤에 찾으러 간다.]
너무 놀라 메시지를 눌러버렸다. 1이 지워졌다.
“아, 내가 미쳐!”
아영은 휴대폰을 툭 떨구고 재킷을 쳐다보았다. 시원하게 게워냈는데. 꿈이 아니었다.
'여길 어떻게 찾았지? 이제 어디로 도망치지? 어떡해! 닥치고 짐 싸!'
일생일대의 추격전이 다시 벌어질 판인데 아영은 간밤에 먹은 음식들을 머릿속에 줄 세우고 있었다. 10년의 도피 행각에서 발각된 것보다 어제 먹은 양념 갈비가 더 끔찍했다. 아 진짜 이건 아니지! 아영은 매트리스에 머리를 처박았다.
***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내내 아영은 거울을 힐긋댔다. 초췌해 보일까 봐 신경 써서 덧바른 눈 화장인데 너무 발랐다. 눈이 더 퀭해 보였다. 다행히 빨간 립스틱 덕분에 얼핏 보면 움푹한 눈이 도도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세련된 것도 같고. 나름 얼핏 얼핏 만족스러웠다. 숙취에 시달리느라 머리는 여전히 욱신댔다.
6층? 이런! 한 층 더 올라와 버렸다. 후다닥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제2 전시실 앞이 사람들로 북적대는 게 보였다. 제일 갤러리가 야심 차게 준비한 독일의 유명한 설치미술가 어우겐 슈추리프트의 한국 특별 전시 기간 중이었다. 세계적인 아타스트를 초청해 전시회를 개최할만한 갤러리로는 제일 갤러리가 국내 유일무이한 곳이다. 이런 대단한 곳에서 저도 특별전을 한다니, 너무 감격해 심장이 다 울렁거렸다. 아영은 퍼뜩 한쪽으로 비켜서서, 대표실로 내려가기 전에 화백을 열어 챙겨온 그림들을 다시 확인했다.
“아영씨?”
구부정하게 서서 가방 안을 들여다보다 말고, 아영이 퍼뜩 허리를 세웠다.
“예? 어머 대표님! 안녕하세요!”
반갑게 다가오는 민 대표와 그 뒤를 따르는 한 실장에게 아영이 연이어 고개를 꾸벅댔다.
“언제 왔어요? 왔으면 내려오지 여기서 뭐 해요.”
“그림들 제대로 가져 왔는지 확인하고 있었어요. 기다리셨어요? 죄송합니다.”
“으음 아니. 근데 아영씨가 일찍 왔네. 좀 기다려 줄래요? 전시장 한 바퀴 돌아보고 올게요. 오래 안 걸려요. 괜찮죠?”
“그럼요. 다녀오세요.”
“내려가 있어요. 아, 그러지 말고 아영씨도 갑시다. 어차피 미팅 끝나고 같이 돌아보려고 했는데, 마침 잘됐네. 가죠.”
“아 그럴까요?”
“가방 이리 줘요.”
“괜찮습니다. 안 무거워요.”
“가볍게 갑시다. 한 실장 이거 내방에 갖다 놓지. 나한테 아주 아주 중요한 거니까 조심히 다루고.”
“예? 예. 대표님.”
한 실장의 이마가 움찔 모였다. 옆에 달고 다니는 김 비서 놔두고 굳이 이런 잡일을 아래 직원들 앞에서 서슴없이 제게 시키는 민 대표의 노골적인 무시에 속에서 부아가 끓어 올랐다. 한 실장은 짐짓 태연하게 화백을 곁에 머쓱하게 서 있는 김 비서에게 넘겼다.
“김 비서. 이것 좀...”
“한 실장. 전달하라고 건넨 게 아닌데.”
“예? 예.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올 거 없고, 2층 동편 갤러리 상황 체크하세요.”
“예. 대표님...”
한 실장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한두 번 봐온 광경이 아니라 이젠 무덤덤해질 때도 됐는데, 여전히 아영은 한 실장 보기 무안했다. 오늘은 제 가방을 들려 보내니, 죄송스럽기까지 했다. 달려가 다시 받아야 하나 안절부절못하는데, 민 대표가 길을 재촉했다.
“자 우린 갈까요?”
“네.”
아영은 민 대표의 안내로 7층 제1 전시실로 올라갔다.
“한국을 빛낸 100인의 아티스트에 올라간 거 다시 한번 축하해요. 앞으로는 아영씨 얼굴 보기 힘들어지겠는데. 여기저기에서 서로 모셔가려고 할 거 아냐.”
“감사합니다. 모셔가긴요. 이제 겨우 이름 올린 새내기 작가인걸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겸손해할 거 없어요, 아영씨. 100인 100색 초대전 때도 그렇고, 자선의 밤 행사 때도 아영씨 작품에만 관심이 쏠렸는걸. 그 정도면 목에 힘주고 시작해도 되지.”
“아. 부끄럽습니다. 다시 이런 소중한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벌써 기대 많이 하고 있으니, 이번에도 잘해봅시다. 이쪽으로. 들어가죠”
“네.”
“대표님. 오셨습니까? 신 작가님 안녕하세요?”
제1 전시실 문 큐레이터가 달려와 민 대표와 아영을 맞이해 전시실로 안내했다.
“공간은 작지만, 전시장 내부가 탁 트여서 어떻게 디스플레이를 하느냐에 따라 오히려 시각적으로 넓어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영씨 생각은 어때요.”
“100인 초대전 때만큼 넓은데요? 더 작은 전시실이면 좋겠습니다. 아니, 1층 오픈 갤러리 한쪽에 개인 전시 벽 하나 세워주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제일 갤러리 연례 정기 특별전인데, 그렇게 할 순 없죠. 갤러리 이미지도 있고.”
“아, 네 그렇죠.”
“잘 둘러봐요. 뭐가 필요한지. 구조물이 없어서 너무 휑하면 저기 정면 중앙에 설치벽 하나 세워도 좋고. 아영씨 생각은 어때요?”
“설치 벽이 있으면 전시효과에도 좋고, 작품 감상 시 이동 동선에도 변화를 줘서 덜 지루할 것도 같고. 저는 좋은데, 일하시는 분들이 너무 번거로워질 것 같아요.”
“그래요? 그럼, 세웁시다. 문 큐레이터 설치 벽 세우는 거로 변경해서 디스플레이 계획안 다시 짜도록 해요.”
“예? 다시요? 예. 대표님...”
“2층 동편 갤러리 공사 관계자들 와있을 거야. 문 큐레이터는 지금 내려가서 설치 벽 의논해서 오늘 중으로 결과 보고해요. 내려가 봐요.”
“예. 대표님.”
문 큐레이터가 인사를 남기고 황급히 물러갔다.
“또 필요한 게 생각나거든 그때그때 부담 없이 말해줘요. 가능하면 디스플레이 계획안 나오기 전에. 그 후엔 바꾸려면 나도 문 큐레이터 눈치 봐야 하거든. 하하.”
“예. 감사합니다.”
“작품은 갤러리 명성 믿고 보는 거니까, 장소 개의치 말고, 아영씨는 작품에 전념해요. 나머지는 갤러리에서 다 알아서 준비할 테니.”
“정말 감사합니다. 첫 데뷔 전 때부터 엄청난 기회를 주셨는데. 사실 제일 갤러리에서 데뷔 전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작가 입장에서는 굉장한 영광이고 행운이거든요. 이제 막 시작한 신예작가인 저에게 이런 파격적인 기회를 계속 주시니 꿈만 같고, 기분이 아직 얼떨떨해요.”
“나 지금 아영 씨한테 공들이는 중인데. 몰랐어요?”
“예?”
“아영씨 오래오래 우리 갤러리에 잡아두려고.”
“아... 말씀만으로도 감사해요.”
“빈말 아니고. 내 옆에 딱 붙여줄 테니, 오래오래 잘해봅시다.”
“아, 예.”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아영씨 오후에 바빠요?”
“아니요. 시간 여유롭습니다. 지금 바쁘시면 그림 두고 갈 테니 보시고 연락 주세요. 다시 찾아뵐게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일 보세요.”
“으음 그게 아니고, 후배 녀석이 아영씨 소개 좀 해 달라고 하도 졸라서, 오늘 아영씨 만나는 김에 함께 보려고 불렀는데, 점심 식사 같이 먼저 하고, 우리는 다시 와서 그림 보며 얘기 나누죠.”
“후배분이 누구신데 저를 왜...”
“이번에 새로 오픈 한 로얄 그룹 한빛 갤러리 대표예요. 그 녀석이 욕심도 많고 의욕도 보통이 아닌데, 우리 갤러리에서 아영씨 밀어주는 거 알고 보고 싶다고 난리예요. 꽤 규모가 큰 갤러리고, 기업 자금으로 운영되는 곳이니 구애할 때 만나 봐요. 인맥도 쌓을 겸, 나쁠 건 없잖아. 어때요.”
“그런 기회라면 저야 당연히 좋죠. 자리 일부러 만들어 주셔서 저는 감사한 데, 대표님 안 그래도 바쁘신데 시간 뺏는 것 같아서 죄송해서요.”
“그런 걱정이라면 됐어요. 나도 조만간 아영씨 소개하려고 했으니까. 그럼 갑시다. 내 차로 같이 가죠.”
“예.”
약속 장소인 로얄 호텔은 갤러리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차로 10분도 안 걸리는 거리였지만, 금요일 오후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과 차량으로 명동 일대는 북새통을 이뤘다. 느리게 이동하는 차 안에서 아영은 길가에 웅장하게 솟은 파라다이스 호텔을 바라보고 있었다. 폭우 속, 호텔 앞에서 있었던 일들이 다시 떠올랐다. 찬혁의 모진 말에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입도 뻥긋은커녕 다시 줄행랑을 놔야 했다. 리나가 있었다. 찬혁의 곁에.
“대표님, 도착했습니다.”
김 비서가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운전석에서 재빨리 뛰어내려 뒷좌석 문을 열었다.
“아영씨 가죠.”
“네.”
“여기 루프탑에 프렌치 레스토랑 와 본 적 있어요?”
“아니요. 로얄 호텔은 처음 와봐요.”
“거기 스테이크 타르타르 유명해요. 강력추천. 잘됐네. 나 믿고 오늘 한번 먹어봐요. 육회랑 비슷하다 보면 되는데, 아 육회 먹어요?”
“아 네. 고기는 살아있든 죽어있든 먹는 거면 다 좋아합니다.”
“하하하 그래요? 식성이 나랑 같네. 반가운데요. 미식 여행 한번 갑시다. 이거 맛있어야 할 텐데. 추천 값 못하면 어쩌지? 음 여기. 다 왔어요. 내리죠.”
“예.”
10층 루프탑에서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눈앞에 파리의 노천카페를 연출해놓은 프렌치 레스토랑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매니저가 달려와 민 대표를 깍듯이 맞이해 썬루프와 차양이 쳐진 VIP석으로 안내했다. 명동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밤에 오면 그야말로 환상적인 야경을 감상할 수 있는, 말 그대로 명당자리였다.
“장소 맘에 들어요?”
“너무 좋은데요? 밤에 오면 더 멋질 것 같아요.”
“그럼 언제 밤에도 한 번 오죠. 밤에는 저기 바도 오픈해요. 한잔하러 옵시다.”
“대표님, 오셨습니까. 식전 음료는 늘 드시는 거로 준비해드릴까요?”
“난 그걸로 주고, 아영씨는 뭐 마실래요.”
"저도 대표님 드시는 거로 할게요."
“우리 스피리츠 두잔.”
“예. 준비하겠습니다.”
“스피리츠. 기억 해둬야겠어요. 늘 드시는 거면 특별할 것 같은데요.”
“특별한 건 아니고. 이태리에서 흔하게 먹는 식전주라 출장 갔을 때 식전에 꼭 한 잔씩 했는데, 이렇게 노천카페에서 마셨던 기억이 좋아서 와서도 찾게 되네. 어떤지 직접 맛을 보고 솔직한 평을 해줘 봐요.”
“네 대표님 입맛 정확히 평가해 드릴게요.”
“하하하 그래 줘요. 나도 슬슬 바꿔볼까 생각 중이거든.”
“두 분 뭐가 그렇게 재밌는 거예요? 우리 껴도 되는 거 맞아요?”
“어라 둘이 오네?”
엘리베이터를 등지고 앉은 아영이 돌아보려 의자에서 몸을 세웠다.
“어 리나야, 찬혁아 어서 와라!”
그리고 그 자세로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