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영은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아직이네...'
이틀째 답이 없다. 경찰서에서 나와 민 대표에게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뒤 찬혁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자초지종은 뺐다. 자초지종을 납득하기는커녕 제 목이 올가미에 걸린 줄 알고도 야생마처럼 길길이 날뛸 찬혁이었다. 결국, 스스로 제 숨통을 조일 텐데도 찬혁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 정기 특별전이 끝날 때까지 협업이 필요해 부득이하게 대표님 댁에 머물기로 했어.]
자초지종을 뺐더니 구차한 변명만 남았다. 앙꼬 없는 찐빵처럼 허무맹랑해졌다. 뭔가 안에 있을 것 같아 손을 대보지만 빠삭 납작하게 무너져 내리는 속 빈 공갈 빵. 그걸 보내놓고 눈이 빠지게 답을 기다리고 있다. 어떤 답이 와도 아영은 두렵다. 그런데도 몇 분 간격으로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이유는...
"아영 씨. 끝났어요?"
"아 네. 대표님. 이제 막 정리하려던 참이었어요."
"이야. 진척이 눈에 띄게 보이는데요? 정면에 보이는 설치 벽 아주 좋네요. 역시 작가와 함께 작업하니 방향이 명확해져서 좋군요."
"아닙니다. 과찬이세요. 제가 오히려 방해만 되는 것 같아서 전 몸 둘 바를 모르겠는걸요. 앞으로 저는 웬만하면 현장에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안 그래도 오후에 문 큐레이터와 얘기 나눴어요. 아영 씨가 부담스러워하는 건 당연한 거고, 정 원치 않으면 내일이라도 당장 현장에서 빠지면 되지만 담당 큐레이터를 뺄 순 없으니까. 조금이라도 불만 사항이 있다면 나는 문 큐레이터 편을 들 겁니다. 이곳 제1 갤러리만 놓고 보자면 문 큐레이터가 우선이니까. 그런데 문 큐레이터 말로는 아영 씨 덕분에 작업 속도가 절반 이상 빨라질 것 같다고 하던데. 아영 씨가 적극적이고 열성적으로 참여해줘서 오히려 고맙다고 하던 걸 뭐. 정리 끝났으면 나갈까?"
"아, 예. 그렇게 말씀해주셨다니 다행이네요. 가능하면 적극적으로 참여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너무 나서지는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잠깐 돕는다고 온 게 낙하산처럼 보이면 안 되니까요. 게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작가가 현장에 나타나서 감 놔라 배나라 한다고 괜한 미움까지 살까 조심스럽기도 하고요."
"아영 씨 낙하산 맞는데. 이번처럼 대놓고 사람 꽂은 적 없거든. 다들 보라고 그런 겁니다. 아영 씨 뒤에 누가 있는지. 그러니까 졸지 말고 맘 놓고 작업에만 전념해요. 전시회 3개월 전입니다. 굳이 아닌 척 모르는 척하느라 자신을 낮추고 빼면 더 오만해 보일 수 있다는 거 알아요?"
"낙하산이라니요?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여기 취직이라도 됐단 소린가요?"
"말 그대롭니다. 특채. 그렇다고 당장 정직원 시켜 줄 만큼 호락호락하진 않으니까 각오하고 일해요. 3개월 수습 기간 끝나고 그때 정식으로 계약하죠."
한빛 갤러리 자선 인의 밤 파티 일일 파트너가 끝이 아니었다. 바톤을 이어받을 주자가 분명 기다리고 있으리란 추측은 했지만 이렇게 숨 기쁘게 이어질 줄은 몰랐다. 난파된 배에서 떨어져 정신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아영은 거센 조류에 휩쓸려 의지와 상관없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제 상황이 어려워 보여서 도와주시는 거라면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제 앞은 제가 잘 알아서.."
"제 앞가림. 잘 못 하던데. 전시회까지 3개월 동안 다른 문제로 신경 쓰지 않았으면 해서 생각해낸 나름의 배렵니다. 특히 돈 문제로 다른 데 가서 열과 성을 낭비하진 맙시다."
하아! 기가 차 속에서 헛웃음이 터졌지만, 아영은 동시에 쥐구멍에라도 파고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조목조목 넘치는 민 대표의 배려심에 결국 정곡을 찔렸다. 반박하기엔 싸질러놓은 똥이 너무 무지막지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있자니 사기 협박 누명을 인정하는 꼴이 될 것 같았다. 아영은 잘근대던 입을 어렵사리 열었다.
"억울한 일 당한 사람한테 배려 차원에서 하실 말씀은 아니시네요. 돈 문제, 채 대표한테 들어서 이미 다 아실 테니 아닌 척하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는 이번과 같은 일 절대 없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죠.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미안해요. 자. 타요. 설마 전철 타고 가겠다고 우길 건 아니죠?"
조수석 문을 열고 서서 민 대표가 아영의 속까지 꿰뚫고 있다. 깎아지른 절벽처럼 꼿꼿하게 서서 자존심 굽히지 않겠다고 버텨본들 같은 대문으로 들어갈 사이였다. 한발 늦은 귀가가 자존심 한 뼘 세워줄 일도 못 됐다. 아영은 차에 올랐다.
턱
차 문이 닫히고 발끈 열렸던 자존심 뚜껑도 소리 없이 닫혔다.
"신인 작가에게 특별전 내주는 거 우리 갤러리 입장에선 파격적인 행봅니다. 그만큼 세간의 이목이 쏠려있어요. 조심하자는 차원이니 너무 발끈하지 말아요. 서운해지려 하니까. 필사적으로 노아 사건 입막음한 거 괜한 짓 만들면 안 되죠. 안 그래요?"
"......"
"인턴 된 거 축하해요. 그냥 넘어갈 순 없죠. 간단하게 한잔하고 갑시다. 괜찮죠?"
침묵은 강한 긍정이라는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처럼 두 번 묻지도 않고 민 대표는 핸들을 돌렸다. 축하를 받고도 암담한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아영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이제 침묵과 네. 두 개뿐이었다. 침묵은 상대의 요구를 무효화시킬 수 있는 암묵적 힘을 가진 줄 알았지만, 강한 긍정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니 아영의 대답은 ‘네’ 하나다. 언제부터 네. 만 하면 만사 오케이인 긍정형 인생이 된 걸까. ‘아니오’에 ‘네’ 하는 고장 난 인형처럼 아영은 한없이 무력해졌다.
DEVIL'S WHISPER
"여기 루프탑 바에 와본 적 있죠?"
"아뇨. 없습니다."
다들 멤버쉽 카드를 꺼내 보이고 들어갔다. 멤버쉽 카드 없이도 자리를 안내받는 민 대표는 오아시스 나이트클럽 앞에서 본 그들처럼 VIP일 테지. 이런 곳에 와봤냐고 물어주는 예의상 질문이 고깝게 들리는 건 기분 탓일까. 꼴에 자존심인 걸까. 아영은 리나의 갤러리에 불려가 세워졌을 때처럼 을이 되어 찌그러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번엔 반박의 여지 없이 을이었다. 보스와 함께 왔으니.
"그럼 잘됐네요. 지난번 프렌치 레스토랑 갔을 때 아영 씨가 아주 맘에 들어 하길래 제대로 된 바에 같이 와보고 싶었어요. 여기도 야경이 끝내주거든. 자리 어때요. 맘에 들어요?"
"말씀하신 대로네요. 멋집니다."
"맘에 든다니 다행이군요. 음~ 어디 보자. 아영 씨는 슬링샷 어때요. 오늘은 입사 축하 자리니까 화끈하게 한잔하죠. 좀 센 거로. 그럼 나는..."
"대표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지난번 어우겐 슈추리프트 설치 전시 때 다녀왔는데, 와 대단하던데요? 한국에서 그런 대작을 볼 수 있다니.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래요? 이번 가을 정기 특별전도 기대해도 좋아요. 여기. 작가분 입니다. 오늘 잘 좀 모셔봐요."
"아 대단하신 아티스트를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뭘로 준비해 드릴까요?"
"이분은 슬링샷으로. 나는 매드독."
"슬링샷에 민트 스프릭 추가하시겠습니까?"
"아영 씨 어때요?"
"아뇨. 됐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매드독에 스카치위스키 추가해드릴까요 대표님."
"음. 더블로 하지."
"네.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매끈하고 살가운 매너의 매니저가 물러가자 아영은 둘만의 자리가 갑자기 어색해졌다. 자의 반 타의 반도 아닌, 타의에 의해 끌려온 무미건조한 술자리만큼 불편한 게 또 있을까. 그것도 타의가 다름 아닌 하늘 같아진 상사이니. 아영은 칵테일이 준비될 때까지 잠시 피신이 필요했다.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도망가는 건 아니죠? 하하 농담. 다녀와요."
"네..."
그러고 싶은 속도 들킨 게 당황스러워 아영은 태연을 가장해 황급히 자리를 떴다.
야경의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함인지 바 내부의 조명은 게슴츠레하고 침침했다. 덕분에 화장실 가는 길에 내다 보는 야경은 가히 황홀경 그 자체였다. 화장실로 통하는 복도로 막 들어서자마자 조금 전의 감흥을 깨부수는 목소리가 날아왔다.
"협업을 바에서 하나?"
아영이 화들짝 돌아섰다. 복도 입구에 찬혁이 삐딱하게 버티고 서있었다.
"업무 장소가 주로 유흥업소네. 신아영 씨."
씨? 무슨 뜻인지 단박에 이해했다. 아영의 미간이 불쾌하게 움찔 모였다. 제 이름에 붙은 타인의 칭호 때문이 아니었다. 장단을 맞추기엔 너무 유치했다. 뭐라 장단 맞출 틈도 없이 찬혁이 밀고 들어왔다.
"사람들 오가는 통로야. 이러지 마."
"이러지 말라니. 통로를 막고 서서 할 소린 아니지. 아. 뭘 또 기대하셨나?"
훅 끼치는 숨에서 술기운이 뜨거웠다.
"경찰서 일은..."
"하나만 묻자. 이유가 있어? 피치 못할?"
"......"
"나 봐. 내 눈 똑바로 보고 대답해. 사람 헷갈리게 하지 말고. 이유가 뭐야. 그러고 나 유치장에 버리고 가야만 했던 이유. 뭐냐고."
"말했잖아. 일 때문이.."
쿵!
“악!’
찬혁의 주먹이 아영의 얼굴을 빗겨 벽을 쳤다. 술주정이라 하기엔 악의적인 고의성이 다분했다. 아슬아슬 운 좋게 비껴갔다는 안도감 보다 후속타의 공포가 엄습했다. 그러나 아영은 피하지 않았다. 차라리 한 대 맞고 이 상황에서 실려 나갈 수만 있다면! 제 발로는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에 빠지고 궁지에 몰린 쥐새끼처럼 아영은 악에 받쳤다. 도발하듯 찬혁을 똑바로 마주 노려보았다.
"사람 미치게 하는 지능범인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상습범이네. 재밌었냐? 드라마틱하게 나타나서 물고 빨아주니 스릴 넘치디?"
"말 가려서 해! 저질스럽게 굴어봤자 네 입만 더러워질 뿐이야. 드라마틱 엔트리 기대한 적 없어. 함부로 입 대라고 한 적 없어. 제멋대로 해놓고 나한테 다 미루니까 맘이 편하니? 파렴치하단 생각 안 들어?"
"좋았잖아. 아냐? 아. 저질스러운 거에 뻑 가는 그런 순진한 여자 아니라고 했지. 깜박 속았다. 내가.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이제야 똑똑히 알았다고. 잡힐 것처럼 하다가 내빼야 하니까 감질나잖아. 아쉬웠을 거 아냐. 차라리 솔직해지는 게 어때."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예술로 승화된 불모의 영혼, 신아영. 별이 되어 빛나다."
"......"
"차. 별은 딴 데 가서 되고 사랑은 나랑 하고. 그게 네가 원하는 거 아냐. 자극적이고. 좋네. 난 언제든 환영이야. 아. 사랑 아니지. 섹스.."
짝!
아영의 손이 찬혁의 뒷말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홱 돌아간 얼굴을 서서히 돌리고 찬혁이 픽 코웃음을 쳤다. 모욕과 모멸을 넘어 사람을 쓰레기 취급하는 망언을 해놓고 웃음을 날리고 있다. 치욕이 뭔지 정확히 알려주는 행위였다. 상대의 분노마저도 비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릴 만큼 그는 잔인해져서 돌아왔다. 그 책임을 물을 곳이 다름 아닌 저라서 아영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입술을 아프게 물었다. 삼킬 겨를도 없이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찬혁의 손가락이 눈물을 콕 찍어 볼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갔다.
"거짓말. 청개구리 새끼. 악어의 눈물. 부정하고 부인하더니 그걸로는 성에 안 찼니? 인터뷰 감명 깊게 잘 읽었다. 함께 한 시간은 다 지워놓고 왜. 인제 와서 왜 우는데?"
깨달음의 울음이 흐흐흡 아영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입을 틀어막고 울음을 삼켰다.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내가 맞춰볼까? 이렇게 끝날까 봐 겁나지? 미친놈처럼 쫓아와서 쥐고 흔들어줘야 하는데. 안 그래? 걱정하지 마. 나만 지옥에서 구를 순 없잖아. 그러니까 기대해."
찬혁의 마지막 저주가 떨어졌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메시지를 기다린 이유를 아영은 그제야 알게 되었다.
"오늘부터 우리 1일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