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관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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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대표의 호의와 배려는 DEVIL'S WHISPER 전과 후로 결이 다르게 다가왔다. 살가웠다. 물심양면이라는 점에서 공들임의 정도가 달라진 게 없으니 대외적으로 보이는 피상적인 관계 구도는 같아 보였다. 갤러리 대표와 애정하는 작가. 살가운 게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다. 그러나 그 살가움이 속정에서 손끝으로 옮겨갔다는 게 문제였다. 살며시 언뜻언뜻 몸에 닿는 터치가 추가되었다. 전에 없던 일이라 당황은 소스라치게 왔다. 은밀하면서도 뻔한 의도를 내포해 불쾌감을 주는 그런 노골적인 저질 신체접촉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난감했다. 쳐내는 여자가 오버스러워지는 호위와 보호의 차원이니.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슬링 샷에 결국 정신을 잃은 후 끊어진 필름은 아무리 재생을 시켜봐도 깜깜하기만 했다. 2층에 지정된 제 잠자리를 두고 1층 서재 침대에서 깨어났다. 민 대표의 잠자리다. 거기까지 제 발로 갔다고? 흐트러진 꼴이야 술주정의 여파라 쳐도 왜 술주정을 남에 방에 가서 했냐고! 자초지종을 캐묻는 아영에게 돌아온 민 대표의 대답은 쿨 했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져 버렸다. "무슨 일? 아아. 걱정하지 말아요. 책임지라고 안 할 테니." 제 몸을 제가 모를까. 그러나 책임 추궁을 면한 짓이 단지 술주정이었다 해도, 대체 어디까지 망가진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안 그래도 하얗게 날아가 버린 머릿속에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민 대표의 쿨내 진동하는 답변까지 좌충우돌 메아리쳤다. 아영의 미간에 복잡한 심경이 바짝 모였다. "아영 씨. 주름 생겨요. 인상 펴요." 설치 벽 앞에서 정지화면처럼 서 있던 아영이 손가락에 미간을 콕 밀리고 나서야 혈이 풀린 사람처럼 화들짝 깨어났다. 이런 손장난도. "아 대표님!" "무슨 구상을 하길래 그렇게 심각해요? 이미 계획안 다 나와 있는데. 바꿀 생각 말아요. 그거 힘들게 결론 난 거니까." "아, 아니요. 바꾸다니요. 그럴 리가요. 완벽합니다." 아영이 손에 들린 디스플레이 계획안을 내려다보았다. "휴. 그럼 다행이고. 계획안 들고 설치 벽 심각하게 째려보고 있길래 인제 와서 바꿔 달랄까 봐 십년감수 했네. 나갈까요? 곧 작업 시작될 것 같은데." 민 대표가 고갯짓으로 입구 쪽을 가리켰다. 페인트 작업이 준비 중이었다. "네." "우린 2층 동편 갤러리 카페 공사 상황 둘러보고 점심 식사하러 나가죠. 아. 잠시만. 문 큐레이터!" "네. 대표님." 마침 전시실로 들어오던 문 큐레이터가 민 대표를 향해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그가 마주 다가갔다. 열띤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그제야 아영은 미간을 찌른 민 대표의 손가락에 뒤늦게 눈이라도 찔린 사람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그 또한 없던 장난이었다. 대처하기 어려워졌다. 웃어넘겨야 할지 정색해야 할지. 짚고 넘어가기 참 애매했다. 문 큐레이터가 고개를 몇 번 진지하게 끄덕이더니 인사를 하고 전시실을 도로 나갔다. "아영 씨 가죠." "네." 동편 갤러리는 내부에 보관되어있던 실내 장식 조형물들과 각종 시청각 자료와 집기가 이미 깨끗이 비워진 후였다. 룸 중앙에 놓인 긴 작업 테이블에 빙 둘러 모인 공사 관계자들과 갤러리 작업 책임자들이 천정에 그려진 "The Ceiling of the Apollo"에 걸맞는 인테리어를 논의 중이었다. "대표님. 오셨습니까!" "수고하십니다. 진척이 좀 있습니까?" "아, 예. 거의 결론 단계입니다. 그런데 저 위에 그림이 너무 엔틱 해서 내벽 몰딩 디자인과 컬러 선택에 의견이 엇갈려 지금 조율 중입니다. 저 그림만 아니면 벌써 끝났을 텐데. 고민스럽네요." 공사 책임자의 답변에는 그림을 지우면 어떨까 하는 무언의 건의가 담겨 있었다. 재고의 여지 없이 민 대표는 묵살했다. "그래요? 현대적으로 어떻게 재조명될지 기대됩니다. 김 큐레이터 생각은 어때요. Pitti Palace에 함께 다녀왔으니 뭐 좀 아이디어가 남다를 것 같은데? Residential Room 이미지를 떠올렸을 때 여기 어울리는 컬러가 안 떠오릅니까?" "네 대표님. 승천의 이미지가 강한 작품이라 자칫하면 종교적 색채가 강해질까 그게 우선 우려돼서 컬러 초이스에 신중을 기하고 있습니다. 갤러리의 모던하고 젠 한 이미지를 고려해서 흑과 백을 그림과 조화롭게 매치시켜볼까 고민 중입니다." "음." 민 대표는 수긍했고 긍정의 고갯짓을 끄덕였다. 의견이 좁혀진 분위기였다. 민 대표의 입에서 떨어질 결정을 기다리는 눈치들이었다. 민 대표가 곧이어 음. 이후의 침묵을 깼다. "아영 씨. 흑과 백. 어때요. 저 그림 아영 씨 위해서 남기는 거니까 아영 씨가 결론 지어 봐요. 바로 공사 진행할 수 있게." 뜻밖에도 결정권이 아영에게 넘겨졌다. 작업 테이블의 모든 시선이 일시에 아영에게로 쏠렸다. 자연스럽게 민 대표의 손이 아영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토닥이고 감쌌다. 손가락 장난보다 한층 진지해졌다. 월권의 승인이고 수여의 몸짓이었다. 그렇게 비쳤고 다들 묵인하는 분위기였다. 아영은 난색을 표했지만, 뭐라도 한마디 내놓아야 할 상황에 내몰려버렸다. 글쎄요. 나 잘 모르겠습니다. 와 같은 겸양의 미덕을 내비칠 자리가 아니었다. 민 대표의 오판을 증명할 뿐이었다. 아영은 어렵사리 입을 뗐다. "아. 감히 제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저도 김 큐레이터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림을 에워싼 구름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몰딩으로 천정을 두르고 내벽은 천정과 연결해서 하늘의 이미지를 표현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착시 효과죠. 하나 더 덧붙이자면, 몰딩과 창문 실링 그리고 벽에 붙은 조형물들을 금색으로 칠하면 실내 분위기가 무거운 종교적 색채를 벗어나면서도 가볍지만은 않은, 볼만한 장관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팔짱을 끼고 경청하던 민 대표가 손을 올려 턱을 괴고 손가락으로 입술을 쓸었다. 심사숙고의 몸짓이었다. 모두의 주목을 받으면서도 그 자세는 잠시 더 이어졌다. 그리고 이내 민 대표의 결과 발표가 뒤따랐다. "자. 됐습니까? 그대로 진행하시죠." 마침내 내려진 결론에 작업 테이블 주변이 분주해졌다. 짐을 덜고 활기차졌다. 아영 혼자 바짝 얼어 있었다. 민 대표의 손이 아영의 어깨를 톡 건드려 얼빠진 정신을 일깨웠다. "우린 이만 점심 식사하러 나가죠." "네..." "아영 씨 대단한데요? 사실 그림이 걸림돌이긴 했거든. 문제를 한 큐에 해결해버리네." "아닙니다. 이미 나온 아이디어에 몇 마디 얹은 것뿐인걸요. 예고 없이 지목하셔서 너무 당황스러웠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돌발 상황 종종 있을 건데. 정신 바짝 차리고 일해요. 갤러리 돌아가는 전반적인 상황 일일이 다 체크해서 숙지하고 있는 게 좋을 겁니다." "아 잠시만요. 전 제1 갤러리 소속 인턴 이라고..." "누가 그래요? 제1 갤러리라는 부서는 우리 갤러리에 없는데. 아영 씨는 제일 갤러리 소속입니다. 오늘 눈도장 제대로 찍었네요. 신고식으로 아주 훌륭했습니다. 잘했어요." 민 대표의 손이 아영의 허리로 올라왔다. 길을 리드하며 자연스럽게 따라 나온 매너의 몸짓이었지만 닿기도 전에 아영은 움찔했다. 이쯤에서 주의가 내려질 필요가 있었다. 선을 그어야 했다. "대표님. 드릴 말씀이..." "허리에서 손 떼시죠! 선배." 허! 아영이 순간 소스라쳤다. 목소리만으로도 머리 위에 빨간 경고 등이 켜졌다. 사이렌이 울렸다. 사이렌 환청에 고막이 다 얼얼해지는 환각에 빠질 지경이었다. 황당한 건 민 대표가 더 해 보였다. 돌아봄과 동시에 아영의 허리를 곁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찬혁아. 어서 와라. 연락 없이 여긴 어쩐 일이야." "사내에서 대놓고 이래도 돼요, 선배? 개방적인 분위기 그리 좋아 보이진 않네요. 잠시 빌릴게요. 둘이서 긴히 할 얘기가 있어서." 찬혁이 아영의 손목을 낚아채 와락 끌고 갔다. 놓치지 않고 민 대표의 손이 아영의 다른 손을 턱 붙들었다. 이런 미친! 아영이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졸지에 줄다리기 밧줄이 된 아영이 둘 사이에서 팽팽하게 당겨졌다. 도발한 찬혁이 오히려 민 대표의 돌발 대응에 어이를 상실해 버렸다. 험악해졌다. "잠시만요! 두 분 이 손 좀 놓고 말씀하시죠!" 아영이 양쪽 손을 팩 뿌리쳤다. "보는 눈들이 있으니 그만하자 찬혁아. 너도 온 김에 우리랑 점심 같이 하던가." "둘이 긴히 할 얘기가 있어서 왔다고 말했잖아요. 오늘은 선배가 빠져 줘요. 신아영 씨 나 좀 봅시다." "그건 곤란한데. 내가 지금 아영 씨 보호 중이거든." "보호관찰이겠죠. 사기 협박범 데려다 옴짝달싹 못 하게 가둬놓고. 재발 방지 차원이라고 하기엔 속이 너무 뻔하잖아요. 선배." "박찬혁!" "대표님! 진정하세요!" 점점 과격하게 다가서는 둘 사이에 파고 들어가 아영이 민 대표를 진정시켰다. "대표님. 먼저가 계세요. 금방 뒤따라 가겠습니다." "정말 괜찮겠어요? 나 때문이라면 그럴 필요 없어요. 같이 있어 줄게요." "아니요. 보내고 곧 뒤따라가겠습니다." "... 좋습니다. 그럼 딱 15분 주죠. 그 이상은 못 기다립니다." "네..." "찬혁아. 먼저 간다. 다음부터는 연락하고 오는 게 좋을 거야. 입구에서 쫓겨나기 싫거든." 민 대표가 아영의 어깨를 토닥이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문이 닫히자 아영은 곧장 비상구로 대피했다. "기다려! 어디로 자꾸 내빼!" "너 지금 남에 직장에 와서 뭐 하는 거야?" 뒤따라 오는 찬혁을 향해 팩 돌아서며 아영이 숨죽여 소리를 질렀다. "뭐하냐고 묻잖아! 깽판 쳐서 결국 누드 수업 파토 내놓고 갤러리도 문 닫게 만들더니 여기서도 쫓겨나게 하려고? 신아영 씨는 또 뭔데? 유치하게. 장단을 맞출 수 있게 좀 놀아봐." "알았어, 그럼. 아영아. 신아영. 됐어?" "용건이 뭐야. 들었잖아. 15분. 빨리 말해. 기다리셔" "언제부터 민 선배한테 쩔쩔맨 거야? 왜 저자세냐고. 끼어든 선배보다 시간 체크 하면서 안절부절못하는 네가 더 기분 나빠. 술 취해서 해롱해롱 실려 가더니 뭐야 너. 잤어?" "하! 말조심해! 다 너 같은 줄 알아?" "아냐? 말해!" "아냐! 아니라고! 나 스토킹하니? 그게 궁금해서 온 거면 아니라고 했다. 됐으면 그만 가. 갈게." "어딜 도망가!" "아!" "나 아직 본론 시작도 안 했어." "이거 놓고 말해! 아파! 여기도 사람들 오가는 통로야. 이러지 마, 제발." 붙들어 쥐고 벽에 못 박은 아영의 손을 풀어주고 찬혁이 한발 뒤로 양보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삐딱하게 서서, 벽에 납작 붙어선 아영을 감상하듯 찬찬히 훑었다. 간밤의 주사를 투시라도 해보겠다는 듯, 촘촘히 스캔해 내려갔다. 그의 밀착 시선에 몸 둘 바를 몰라 아영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손 하나 까딱 않고 위에서부터 하나하나 발가벗기는 기분이었다. 아무 짓도 안 하고 수치스러운 건, 아니 수줍어 죽겠는 건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영은 심장이 찌르르 조여드는 기대심리를 들킬까 두려워 고개를 틀어 찬혁을 외면해버렸다. 스캔이 완료되었다. 준비를 마친 사람처럼 찬혁이 다시 성큼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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