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님의 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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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은 반사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동시에 입술을 이 사이에 말아 넣었다. 무의미한 방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해서라도 제 기대심리를 철벽 방어해야 했다. 기대심리 방어. 막아야 하는 건 찬혁이 아니라 저였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갈망에 굴복해 이번에도 무차별적으로 달려드는 찬혁의 입술에 무너져버린다면 그의 말마따나 별은 다른 데 가서 따고 스릴은 그와 즐기는 뻔한 년임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동서남북에서 튀어나와 스토커처럼 매달려도 요지부동일 수밖에 없는 제 상황을 알 리 없는 그의 눈에는 장대로 별을 후려치고 있는, 명예욕에 눈먼 여자로 밖엔 안 보일 테니. 어쩌겠는가. 적어도 정기 특별전이 끝날 때까지는 민 대표의 울타리 안에서 몸을 납작 숙이고 언행에 특히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인걸. 사기 협박범의 오명을 씻을 때까지는. 그리고 나면 찬혁이 야심 차게 추진하고 있는 호텔컨벤션센터 사업자 선정 입찰에 악영향을 끼치게 될 연결고리도 끊어지게 된다. 리나는? 지금 처한 우여곡절에 비하면 리나는 말 그대로 태산 아래 개미 언덕일 뿐이었다. 그러니 가뿐히 넘어 볼 것이다. 그럼. 그때쯤이면 찬혁에게로 향하는 무한 기대에 순응해봐도 되지 않을까. 한 번쯤은 진심을 다해. '그러니까 심장아 나대지마, 제발! 그때까지만 참자! 쫌!' 악착같이 입술을 악물고 고개까지 돌려 외면하는 아영의 모습에 찬혁이 괴로운 신음을 나직이 내쉬었다. 사력을 다해 거부하고 있다. 얼마나 싫으면 틀어버린 목 위에 근육이 필승의 의지를 다지기라도 하듯 각을 세워 돌출되고, 흡 들쳐 올린 어깨 때문에 깊어진 쇄골 우물은 당장 물이라도 퍼 올릴 수 있을 정도로 깊고 가련해 보였다. "야위었다." 도드라져 보이는 광대뼈에 발그레하게 덧바른 볼 터치 위에서 찬혁의 눈이 애잔해졌다. 이내 미간이 구겨졌다. "불 꺼진 거 봐라. 밥은 먹고 다니냐? 쯧." 수척한 모습에 짜증이나 혀가 끌 차졌다. 사경을 헤매는 사람처럼 꼭 감겨있던 아영의 눈이 스르르 떠지고 고개가 서서히 돌아왔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는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올려다본다. 예나 지금이나 눈동자가 새까맣고 투명한 건 한결같다. 그 속에 한가득 고인 제 얼굴이 유리알처럼 반짝였다. 처음엔 사람 눈동자가 이렇게도 반짝일 수 있나, 너무 투명하게 빛나서 깜짝 놀랐었다. 그런 눈으로 올려다볼 때면 하도 티 없이 맑아 순진한 속이 빤히 다 들여다보였다. 특히나 좋을 땐 영락없었다. 놀려먹기도 고백을 받아내기도 참 쉬웠다. 아영아. 응? 네 눈이 말을 해. 뭐라고? 나 좋아한다고. 뭐야... 그렇게 좋아? 아니거든! 근데 왜 똑바로 못 쳐다봐? 야. 나 봐봐. 으응? 이 자식이 반항을 해? 아 몰라! 몰라! 동그란 볼을 쥐고 흔들라치면 도리질로 뿌리치고 쏜살같이 내빼던 아영이었다. 그리고는 들켜버린 속이 부끄러워 종일 눈도 못 마주치던 게. 지금은 잘도 감추고 있다. 그 속이 깜깜하기만 하다.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니. "눈이 말을 안 한다. 아영아." "뭐?" "비밀이래. 다." "......" 탄로 나기라도 할까 두려워 아영은 재빨리 눈을 떨구었다. 갑자기 소환된 추억 한 장면에 코끝이 따가워졌다. 아 미쳐. 눈물이 어려 눈앞이 일렁거렸다. 이 상황을 벗어나야 했다. 15분 제한시간으로 압박을 줄 참이다. 아영은 손목시계를 얼른 확인했다. "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15분 다 돼가! 하고 싶다는 말이 뭐야. 얼른 말해. 대표님 기다리.." 찬혁의 입술이 종알종알 다급하게 재촉하는 아영의 입술을 툭 건드렸다. 콕 누르고 물러갔다. 내리깔고 있던 눈을 반짝 들었다. 피할 새도 없이 잔뜩 고개를 기울이고 들여다보는 찬혁의 눈과 마주쳤다. 깊고 그윽했다. 속을 알 수 없는 검은 심연. 마치 블랙홀처럼 훅 끌어당겼다. 문어 다리 빨판 같은 흡착력으로 붙들고 빨아당겨 남의 속을 낱낱이 파헤치는 건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변한 게 없다. 이러고 속을 다 꿰뚫어 놓고 되묻는 것까지. "원하냐고." "아니." 아영이 매몰차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따라와 눈을 맞춘 채, 찬혁이 다시 입술을 부딪쳤다. 꾹 눌렀다 떨어졌다. 강도가 세졌다. 위험 신호다. "거짓말이래. 네 눈이." 픽. 찬혁이 조소를 날렸다. 경고 등을 켜기엔 이미 때는 늦었다. 여기에서 물러서면 큰일이다. 다급해진 아영이 팩 쏘아붙이려 고개를 발끈 쳐들었다. 그러나 찬혁에겐 찬스일 뿐이었다. 반박하려고 움찔 도드라지는 도톰한 윗입술이 물렸다. 입술 사이에 물고 혀로 달래고 어르고 종용했다. 열라고. 몹쓸 짓을 당한 사람처럼 미간을 와락 일그러뜨리고 노려보면서도 아영의 입술은 뜨겁게 부풀었다. 이성을 배신한 본능이 오늘도 찬혁에게 정직하게 순응하고 있었다. "... 이러지 마 제발... 하고 싶은.. 말... 얼른 하고.. 가줘... 하.." 마침내 가까스로 터지는 말문을 비집고 찬혁의 혀가 쑥 밀고 들어왔다. 가득히. 깊숙이. 휘돌았다. 하... 마치 다리 사이를 헤 집힌 것처럼 젖어버렸다. 순간 당황해 아영은 아랫배를 움찔 조이고 다리를 꼭 오므렸다. 찬혁을 다시 만난 날, 차 안에서 나눈 격정적인 키스 이후부터 시작된 몸의 변화였다. 안돼. 이건 아니지. 머리가 악을 쓰면 쓸수록 뜨겁게 젖어 들었다. 처음이라 충격은 소스라치게 왔다. 그 이후 아영의 몸은 작용 반작용의 물리 법칙을 거스르기 시작했다. 생각만으로도 뜨거워졌다. 작용을 기대하는 작용. 삼십의 몸뚱이는 이제 더는 기다릴 인내심을 상실한 듯 반란을 일으켰다. 흠뻑 젖어 들었다. 더는 버티지 못하고 아영은 찬혁의 어깨를 와락 붙들고 사납게 밀쳤다. 꼼짝도 안 했다. "할 말 없으면 비켜!" "말? 무슨 말. 이러려고 왔다. 기다릴까 봐. 이제 막 1일 시작했는데 꼭꼭 숨어 있어서 만날 수가 있어야 말이지. 찾아가는 서비스 몰라? 뜨거워 너. 너무. 뭐 이 정도로 이렇게 달아오르고 그래. 예열하고 기다렸어? 나 흥분시키려고? 여기서 뭘 어쩌라고 자식아. 그렇게 좋아? 젖었어?" "하아! 뭐? 이런 저질! 사람 수치스럽게 만들어서 열 뻗치게 해놓고 뜨겁다고? 좋냐고? 너 뭔가 대단한 착각 속에 빠져 사나 보네. 이런 뻑은 중2병도 아니고, 프린스 챠밍 증후군도 아니고 너무 유치하거든?" "뻑이 무슨 뜻인지 알기나 하고 쓰는 거야? 센 척하지마. 알지도 못하는 비속어 막 갖다 붙이지 말라고. 우스워 보여." "파라오 때 알아봤다. 뻔한 여자들이랑만 놀더니 다 뻔한 줄 아는 거야 뭐야!"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뻔한 애들은 헛물 켜다 안되면 알아서들 꺼지던데. 넌 특이 종이라 파악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네. 발정 난 개처럼 미친놈 만들어 놓고, 꼬리치면서 내빼니까. 이게 뭐지? 싶어서 자꾸 돌아오게 되잖아. 이게 내 탓이야? 뻔뻔한 네 책임이지." "미친! 누가 누구더러 뻔뻔하대? 꼬리? 하! 흔들어댈 꼬리도 없지만 있어도 너한텐 흔들일 없거든. 넌 그냥 미친개니까. 개! 돌아오라고 한 적 없어. 알아들어? 이제 가줄래? 대표님 기다리셔." "그놈에 대표님! 대표님! 세뇌라도 당했어? 밤마다 최면 걸디? 대표님 소리가 꿀처럼 입에 아주 착착 엉기네. 이게 바로 뻔뻔하다는 거야 알아?"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대체." "신화당." "뭐?" 순간 온몸에 힘이 쫙 풀렸다. 어깨를 밀어내던 아영의 손이 찬혁의 가슴으로 맥없이 흘러내렸다. "우리 호텔 3층에 신화당 자리 찜해놨던데? 그것도 제일 좋은 명당자리에. 네 이름으로 돼 있더라. 아예 알 박이 한 거야? 어머니 장례식 치르자마자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더라고. 그러니 어떡해. 잊어 줄 만하면 이딴 식으로 치고 들어오는데. 사람 미치고 환장해 안 해." 주관식이면 해명이나 해주지! 환장할 사람을 앞에 두고 환장해버린 찬혁이 어이없어 아영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다른 의미로는 리나의 말이 이제야 명확히 이해가 돼 머릿속이 새하얘져 버렸다고 해야 맞다. 파라다이스 호텔에 신화당 찜해놓고. 실적 좋더라? 살면서 한 번도 올려보지 못한 실적을, 이제야 막 쌓아볼까 하는 사람한테 실적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날벼락처럼 머리 위에 떨어졌다. 머리가 산산이 깨질 것만 같았다. "난 모르는 일이야. 그러니까 처분하든지 말든지 네가 알아서 해. 네 호텔 일이야. 건수 물고 나 찾아와서 협박하지 마. 그 핑계로 사람 맘대로 휘두를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이제 알았으니 어림없을 줄 알아.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니까.” "왜. 보호자라도 부르게? 너의 그 잘난 대표님?" "너 정말..." 철컹 1층 비상구 문이 여닫혔다. 순간 숨을 몰아 삼키고 찬혁의 품 안에 갇힌 채, 아영이 그 자세로 얼어붙었다. 나가자고 밀치고 눈총을 따갑게 퍼부어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입꼬리가 빙긋 밀려 올라간 걸 보니 제대로 망신을 줄 요량 같았다. 괴롭힘의 시작이었다. 심장이 철렁 무섭게 떨어졌다. 그 와중에도 시선은 아래층으로 쏠렸다. 다행히 올라올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러나 말소리가 두런두런 이 층까지 올라왔다. 또렷이. 조금 전까지도 도망갈 궁리에 빠져있던 온 신경이 대화 소리에 촉각을 곤두세우느라 일시 정지 상태가 되어버렸다. 귀에 익은 음성들이었다. "어머머. 실장님 그게 정말이에요? 웬일이야. 우리 대표님 신 작가한테 완전히 빠지셨나 보네요?" "누가 아니래. 김 큐레이터한테 2층 카페 공사 현장 내벽 컬러랑 몰딩 디자인 일임 해주셨다던데, 오늘 그걸 신 작가한테 완전 한큐에 몰아줬다잖아. 김 큐레이터가 얼굴이 벌게져서 왔더라니까. 사람들 앞에서 개 쪽 당했다고." "문 큐레이터네는 어때? 거긴 잠잠한 거야? 신 작가 거기서 살다시피 한다며." "왜 없겠어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낙하산도 그런 낙하산은 첨 본다니까요. 우리 팀 윤 코디가 첨에 멋도 모르고 신 작가한테 요것조것 부탁했다가 그날 바로 대표님 방에 불려갔다니까? 울고 나온 것 같던데 뭘." "설치 벽은 또 어떻고. 6번 전시실 다들 아시잖아요. 거기 오픈 룸인 거. 근데 신 작가가 설치 벽을 세워달라는 바람에 디스플레이 계획안 새로 다시 다 짜 맞추느라 저 완전 사흘 밤 꼴딱 샜잖아요." "그나저나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래? 대표님 완전히 달라지셨죠, 그렇죠?" "갑자기는 갑자긴데. 자기 누구 오나 좀 봐봐. 이거 일급비밀이거든." 1층 비상구 문이 빼꼼 다시 열렸다가 살짝궁 닫혔다. "아무도 안 와요. 뭔데요 실장님?" "자기들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면 큰일 난다 진짜? 소문나면 다 자기들 책임이야 알지?" "그럼요. 그럼요. 뭔데요?" 목소리들이 한층 낮아졌다. 그러나 텐션은 최고조 상태였다. 한 실장이 클라이맥스를 열기라도 하듯 흥미진진한 목소리로 좌중을 집중시켰다. 문 큐레이터와 1층 오픈 갤러리 정 코디가 숨죽이는 소리에 2층까지 덩달아 긴장이 흘렀다. 이미 눈물이 고인 눈을 내리깔고 아영이 사형 선고라도 기다리는 사람처럼 입술을 꾹 물었다. 이윽고 한 실장의 폭로가 떨어졌다. "한남동 사원 아파트 알지? 제일 그룹 임원진들이랑 갤러리 이사진들 전용? 거기 팬트하우스에 우리 대표님 사시잖아. 며칠 전에 신 작가가 술이 만취돼서 대표님이랑 휘청휘청 올라가더래." "허! 진짜요?" "아이 뭐 그럴 수도 있지 않나? 그 정도로 애정하는 작간데 술 한잔쯤이 뭐가 대수라고?" "끝까지 들어봐 문 큐레이터. 그걸로 끝이면 누가 뭐래. 그다음 날부터 바로 동거 시작한 것 같다잖아. 매일 같이 내려오고 같이 들어가니까 말이 나온 거지." "동거요? 와. 어쩐지. 상전도 그런 상전이 없더라. 아니 근데 사람을 어떻게 구워삶아 놨길래 하루아침에 대표님이 저렇게 돌변하신대요?" "생긴 거 봐. 예쁘장하게 생겨서 순진한 척 요조숙녀인 척할 때 알아봤다니까. 그런 여자들이 밤엔 더 끝내주는 법이거든. 다리 사이에 끼고 바짝 조여놓나 보지. 꼼짝 못 하게. 대표님만 봐도 알지 않아?" "아이 실장님. 뭐야. 뭐야. 야해!" "정 코디 우리 막내 귀 막아야겠다. 실장님 음담패설 시작이야. 못 말리셔, 진짜. 어머 점심시간 거의 다 됐네요. 아 수다 더 떨고 싶은데~" "저녁에 치맥 콜? 거기 가서 마저 풀어볼까?" "뭐가 더 있어요? 웬일이야. 좋아요!" "콜!" "들어가자~" 철컹 웃음소리와 아쉬운 한숨 소리가 한 덩어리로 뭉쳐 비상구를 빠져나갔다. 아영의 어깨가 흐흐흡 떨었다. 눈물이 투두둑 시멘트 바닥에 떨어져 어둡게 번져갔다. 신나게 털어놓고 아직도 못다 푼 뒷담화는 뭐란 말인가. 지금까지의 언어폭력도 모자라 2차를 계획했다는 게 기가 막혔다. 더 기가 막힌 건, 그들의 험담은 거짓으로 갖다 붙인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일어난 일이었고 그들의 관점에서 재해석되어 각자의 입담에 맞게 맛깔스러운 묘사를 더 했을 뿐이었다. 찬혁이 말없이 뒤로 한발 물러섰다. 터덕. 심경을 담고 있는 무거운 발소리였다. 그중에서도 한 실장의 음담패설의 사실 여부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강력한 무언의 몸동작이었다. 아영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하나뿐인 입으로도 할 수 있는 거라곤 있지도 않았던 일에 대한 변명뿐인 게 너무 구차해서, 그 가소로움이 너무 하찮고 견딜 수 없어서 시위하듯 입을 굳게 닫아버렸다. 한 번 더 눈물이 또르륵 굴러떨어졌다. 찬혁의 한숨 소리가 아팠다. 그의 말은 더 아팠다. "하나만 하지. 뻔하던가 뻔뻔하던가." 몇 걸음 더 터덕터덕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덧정 없이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이사이로 내뱉은 그의 혼자 말이 아영의 심장을 꿰뚫었다. "뻔한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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