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을 내려가며 찬혁은 넥타이 매듭에 손가락을 걸어 훅 잡아당겼다. 굳이 좌우로 한 번씩 더 팩팩 당겨 뚜껑이 제대로 열렸음을 보여주었다. 단정하게 채워진 셔츠 단추까지 투둑 풀어헤쳤다. 가슴부터 벌겋게 달아오른 화기가 목으로 번지고 있었다. 위험 신호였다.
"뻔한 년."
뻔한 년이 뻔한 소릴 지껄이고 다니는 꼴이라니. 한쪽 눈썹이 역겨움을 참을 수 없어 치켜 올라가 서슬 퍼런 이마를 밀어 올렸다. 불쾌함을 여실히 드러냈다. 화가 치밀어 스팀이 머리꼭지를 열어젖힌 와중에도 찬혁의 온 신경은 이 층 비상구 벽에 세워 놓고 온 아영에게로 온통 쏠려 있었다. 흑흑 숨죽여 흐느끼는 아영의 울음소리가 계단을 타고 흘러내렸다. 발이 젖어 질척였다. 금세 심장까지 잠겨버렸다. 터덕. 터. 덕. 돌아가려고 움찔 멈춰 서다 말고 찬혁은 다시 빠르게 계단을 치고 내려갔다.
'바보 새끼! 울긴 왜 울어. 대단한 상전 납셨다는데. 낙하산도 그런 낙하산이 없다는데. 그러려고 그 잘난 대표 등에 업었으면 쫓아가서 본때를 보여줘야지. 아가리를 날려버려야지. 왜. 뭐가 겁나서. 등신같이 숨어서 질질 짜냐고!'
숙맥 같이 울고만 있는 아영이, 그 처량함이 찬혁은 견딜 수가 없었다. 꼴 보기 싫었다. 두고만 볼 수 없었다. 걸음이 빨라졌다. 1층 비상구 문을 열자 여전히 두런두런 말소리가 모퉁이 뒤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막간을 참 알뜰하게도 쓰고 있는 뻔한 년의 주둥이가 어이없어 찬혁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애라? 정애라 씨요?"
비상구 문으로 성큼 들어서자마자 찬혁이 닫히려는 문을 반사적으로 턱 잡았다. 아는 이름이었다. 그 이름이 맞다 면, 이미 3년 전부터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화염에 휩싸여 시뻘겋게 타오르던 심장이 일순 찬물을 뒤집어썼다. 일시에 꺼진 불 위로 서릿발이 휘몰아쳐 움켜쥔 문손잡이부터 하얗게 얼려갔다.
"정 작가가 왜요? 3년 전인가 우리 갤러리 떠날 때 유학 간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돌아왔대요?"
"유학은 무슨. 가지도 않았어."
"진짜요?"
"그렇다니까. 정 작가가 갤러리에서 받은 혜택으로 말하자면 진짜 역대 최고급이었지. 정 코디 없으니까 하는 말인데, 문 큐레이터는 아마 모를 거야. 그때 정 작가 때도 대표님이 맘을 흠뻑 쓰셨거든. 물심양면으로. 그때도 동거했지 아마? 이번 어우겐 슈추리프트 설치 전 그거 원래 정 작가 쇼였잖아. 세계적인 아티스트로 데뷔시킨다고 3년 동안 독일로 파리로 데리고 다니면서 공들여 키운 거 아냐."
"정말요? 근데 왜 나갔대요? 갤러리 혜택 200프로 누려놓고? 키워준 사람 쌩까고? 대표님 엿 먹인 거예요?"
"아니. 엿은 정 작가가 먹었지."
"대표님한테요? 그럼 쫓겨난 거네?"
"그런 셈이지. 엿은 딴사람이 먹이고."
"누가요?"
"누군 누구겠어. 뉴페이스. 신아영."
"웬일! 굴러 온 돌이 박힌 돌 뺀다더니! 제대로 쳐낸 거네요? 와, 신 작가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무서운 사람이네."
"근데 더 무서운 건. 가까이 와봐. 누가 들을라."
"뭐가 또 있어요? 예. 뭔데요?"
"정 작가 죽었어. 갤러리 나가자마자 자살했잖아. 비관 자살."
"허어억! 웬일! 으, 소름 끼쳐!"
철컹!
찬혁이 문손잡이를 놔버리고 모퉁이를 바람처럼 돌았다. 노기 어린 찬 서리가 먼저 모퉁이를 돌아 복도를 하얗게 냉각시키기 시작했다.
"아 깜짝이야!"
"어머!"
귓속말을 주고받던 한 실장과 문 큐레이터가 화들짝 돌아섰다. 문소리에 놀란 가슴이 훅 끼치는 냉기에 아연실색하자마자 시커먼 아우라를 뿜어내며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찬혁의 모습에 기겁을 해버렸다.
"어머! 박 사장님! 여긴 어쩐 일로. 아니, 왜 거기서 나오세요!"
한 실장의 낯빛이 사색이 되어버렸다. 성질 더럽기로 악명이 자자한 박찬혁 사장이다. 더러운 성질만큼이나 막 나가는 입담은 더 가관이라고 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가차 없이 퍼붓는다고 했다. 냉혈한이라고도 했다. 파라다이스 호텔 비서실 측근을 통해 전해 들은 오아시스 나이트클럽 낙원 대참사는 새삼스럽지도 놀랍지도 않았다. 게다가 민 대표의 후배다! 그런데 왜 하필 이 타이밍에! 그것도 비상구에서! 모퉁이를 돌아 나온 찬혁이 한 실장 눈에는 저승사자인 것만 같았다.
'혹시 귀에 거슬린 말이 있었을까?'
제가 뱉은 말들을 거슬러 올라가느라 한 실장의 눈동자가 흰자위에서 좌충우돌 마구 흔들렸다. 동태처럼 딱딱하게 얼어붙은 한 실장 모습에 지레 기겁해 문 큐레이터가 덩달아 다소곳해졌다. 진땀이 배어 나오는 두 손을 배 앞에 공손히 맞잡고 한 실장 뒤에 찌그러졌다. 묻지도 않은 답까지 자동으로 올렸다.
"아 안녕하십니까. 박 사장님. 대표님 점심 식사 나가셨는데요... 지금쯤 들어오실 때가 되셨는데... 길이 엇갈리셨나 봅니다... 무슨 남기실 말씀이라도..."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삐딱하게 선 찬혁이 잔뜩 주눅이 든 두 사람을 냉소적으로 응시했다. 표정을 읽을 수 없어서 더 섬뜩한, 얼음송곳 같은 시선에 폐부를 깊숙이 찔리기라도 한 사람들처럼 시린 호흡을 허허헙 가까스로 들이마셨다.
"이봐요. 한 실장."
"아 네! 박 사장님."
"뭐 내가 물을 일은 아닌데. 그런데 그냥은 못 넘기겠는데? 한번 물어봅시다."
"예? 예. 무엇을 말씀이신지요..."
"여기 얼마나 오래 다녔습니까?"
"여기요? 거의 15년이 다 되어 가는데, 그건 갑자기 왜 물으시는지요..."
"15년이라. 갤러리 초창기 맴버네? 어쩐지. 썩은 내가 진동을 하더라니. 너무 고여있었네 한 실장."
고여있었다고? 썩은 내? 한 실장의 미간이 움찔 모였다. 소심하게 내비친 반박이자 항의였지만 속에선 열불이 뻗쳤다. 15년. 절대 짧지 않은, 할 만큼 다한, 더는 할 수 없을 만큼 온몸을 불살라 이룩한 경력이었다. 새파란 나이에 부모 잘 만나 최연소 주식 부자 타이틀 거머쥔 덕분에 에스컬레이터 타고 쉽게 오른 자리에 앉은 주제가 감히 함부로 비하할 경력이 아니었다. 뜨거운 콧김을 푸 내쉬며 한 실장이 공손을 가장해 또박또박 맞받았다.
"무슨 근거로 그런 심한 말씀을 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박 사장님. 혹시 비상구에서 저희끼리 악의 없이 나눈 수다를 엿들으시고 하시는 말씀이라면 유감스럽단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직원들 사이에서 오간 수다를 근거로 고여서 썩었다고 하신 말씀은 모욕을 넘어 15년간 쌓아 온 제 경력과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신 발언이신데요. 매우 불쾌합니다."
"15년간 쌓아 올린 명예 좋아하네. 차. 아들 잘 있어요? 이제 중학생 됐나? 민 선배가 까마득한 동생이라고 신경 좀 써주나?"
"예? 아니, 그건..."
"한남동 팬트하우스, 하우스매니저가 국내 최대 규모인 제일 갤러리 실장 자리까지 올라갔으니 뭐 대단한 건 인정. 다른 물건도 아니고 국내 굴지의 제일 그룹 회장님, 그 노인네 물건을 벌떡 일으킬 정도면 대단한 인재인 건 맞고. 우리 어머니 살아생전에 하도 요망한 년이라고 욕을 하시길래. 다리 벌려 사다리 타는 년이라고. 재주가 참 비상해, 한 실장?"
한 실장 뒤에 가려 서 있던 문 큐레이터가 순간 두 손으로 입을 헙 가리고 한 실장 뒤통수를 홱 돌아보았다. 대박 소리가 손에 막혀 무음 처리가 되었다.
"뻔한 년들은 다 자기들 같은 줄 아니까. 남 잘되는 꼴은 다 다리 사이에서 된 일인 줄 알지. 다리 사이에 물고 조져버리는 기술. 안 그래요?"
항변하느라 벌겋게 달아올랐던 한 실장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할 말을 잃고 벌어진 입이 어버버 움찔대는 사이 찬혁의 마지막 일격이 날아왔다.
"내가 웬만하면 못들을 척하고 지나가려고 했는데. 신아영 씨. 한 실장이 뒤에서 수다거리로 씹어대는 사람."
"아 그게, 박 사장님! 그냥 못 들으신 거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 저기, 신 작가님은 박 사장님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분이고, 또 현재 그분이 우리 대표님과 열애 중이시라 만약 대표님께서 아시게 되면 제 입장이 무척 난처해지거든요. 그건 어디까지나 농담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열애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차. 그러니까 말이야.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고. 주둥이 단속 잘했어야지. 한 실장이랑 같은 급으로 싸잡아서 농담 따먹기를 하기엔 신아영 씨는 급이 다른 사람이거든. 나한테 특별한. 매우 막역한. 각별한. 알아!"
"하! 죄송합니다! 두 분께서 그런 사이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알면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용서하십시오! 박 사장님!"
온 힘을 다해 굽실대는 한 실장의 모습은 비굴하기 짝이 없었다. 뒤에 숨은 문 큐레이터가 그 불똥이 제게로 튈까 두려워 알아서 낮게 설설 기었다. 그리고 계시처럼 뇌리에 스친 엘리베이터 앞에서 세 사람의 줄다리기 모습이 떠올랐다! 신 작가를 사이에 두고 문 대표와 힘겨루기를 하던 박 사장이었다. 특별한 사람이란 대표님과 동급으로 신 작가를 여긴다는 뜻! 순간 문 큐레이터의 가벼운 입이 이사이로 말려 들어갔다.
찬혁은 일말의 동정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동정 따윈 태생적으로 지니지도 않았지만, 그는 뻔한 여자를 다루는 법을 잘 알았다. 가차 없이 쳐내기.
"민 선배도 아나? 예정해 마지 않는 초대 작가가 먹여 살려줄 직원들이 그 은혜도 모르고 주둥이 놀리고 다니는 거? 뒤에서 개 껌처럼 씹히는 거?"
"아, 아이고 박 사장님! 한 번만 눈감아 주시면 다시는 다~시는 이런 일 재발하지 않도록 직원들 입단속 인성교육 철저히 시키겠습니다! 한 번만 눈감아 주세요. 제발 요! 예?"
한 실장의 애원에 문 큐레이터의 눈자위가 허옇게 돌아갔다. 그 입단속과 인성교육은 남도 아닌 한 실장 저를 두고 하는 소리 구만! 상종 못 할 인간! 엮여도 더럽게 엮였다. 문 큐레이터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찬혁의 최종 선고에 선처를 호소했다.
"어쩌나.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라 내가. 민 선배한테 애원해 보던가. 안 그래도 배다른 형제들 등쌀에 골머리 꽤나 썩던데. 이번에 하나 쳐내려는지. 한번 두고 보지. 볼만 하겠어 한 실장."
찬혁은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로 망연자실 서 있는 한 실장과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지 비죽 웃음을 흘리고 있는 문 큐레이터를 모퉁이 앞에 정지 자세로 세워두고 찬바람을 휑 일으키며 돌아섰다.
"아. 그리고 두 사람."
찬혁이 몇 걸음 후 다시 서서히 돌아섰다. 드라마틱 했다. 지옥의 문이 열리는 것처럼 공포스럽게.
"예?"
"허!"
"사자 명예 훼손이라고 들어봤나?"
"아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지!"
송장처럼 잿빛으로 변해버린 얼굴로 한 실장이 휘청 흔들렸다. 한통속으로 묶인 문 큐레이터가 동지애를 발휘해서 한 실장을 부축했다. 거의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찬혁을 두렵게 올려다보았다.
"정애라. 당신들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
허어억! 동시에 입을 틀어막고 한 실장과 문 큐레이터가 뒤로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