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착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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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자뷰야? 그럼 어제 그건 뭐야? 아영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 앞의 광경에 어이가 없어 벌어진 입은 제 기능을 상실한 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뻔했다. 아영은 또다시 줄다리기 줄이 될 양 손을 후딱 엉덩이 뒤로 감추고 약이라도 올리려는지 빙긋 웃고 서있는 찬혁을 쏘아보았다. 저 미친. "놀랐어?" "아. 아영 씨. 내가 말 안 했죠? 같이 점심 먹자기에 오라고 했어요. 괜찮죠?" "아... 예. 대표님." 아영은 공손히 눈을 내리깔고 입술 대신 혀를 물었다. 꾹. 대체 무슨 장난을 치려고 또 나타난 걸까. 어제 못다 한 괴롭힘이라도 남았단 말인가. 아니겠지. 괴롭힘의 진수를 아는 인간. 새로운 아이디어가 번뜩였겠지. 그걸 또 못 참고 개 구진 초딩 마냥 쪼르르 달려온 꼴이라니! 저 저 웃는 거 봐라. 하아. 찬혁의 보복은 학창 시절부터 유명했었다. 집요했고 회를 거듭할수록 잔인함의 강도가 레벨 업 되었다. 마지막 한 방은 말 그대로 초토화 그 자체였다. 그 첫 희생양은 광배였다. 시골로 전학 간 후 처음 쪽지 편지를 받았을 때였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책상 위에 놓고 갔다. 음료수병 밑에 딱지처럼 접힌 편지에는 광배의 자작시도 담겨있었다. 하늘의 달처럼 내 마음의 별처럼으로 시작하는 유치 찬란한 시 한 수가 왜 그리도 귀엽고 순박하고 흐뭇하던지. 히죽 웃어버렸다. 그게 문제였다. 그날 이후 광배의 쪽지 편지와 음료수는 배달 족족 반송되었다. 편지가 교실 뒤 게시판에 일렬로 빨래처럼 널린 날도 있었다. 그리고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어느 날, 학교 건물 뒤로 끌려나가 영문도 모르고 찬혁의 손에 멱살을 붙들린 채로 광배는 울었다. 왜냐고 묻는 가련한 시인의 외마디에 찬혁은 전교생 앞에서 전학 신고식이라도 하는 양 선언했다. "걔 내 거야! 건들면 죽는다!" 걔. 이름도 모르는 여자의 소유를 주장한 찬혁이었다. 지가 나쁜 남자야 뭐야. 그날 이후 공짜 음료수는커녕 근접하는 남학생의 그림자조차도 없었다. 공부에 찌든 일상을 달래줄 소소한 로맨스에도, 연애 세포에 활력과 낭만을 충전시켜줄 비밀 쪽지 편지에도 영원한 안녕을 고해야 했다. 이제 무엇에 또 안녕을 고해야 하는 걸까. 아영은 두렵고도 설렜다. 아이러니하게도 설렘의 감정은 늘 따라붙었다. 찬혁이 하는 짓엔 다. 개망나니 짓이어도. 지금 이 살 떨리는 순간에조차도. 뭐라도 해서 떨리는 속을 감춰야 했다. 띵~ 다행히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민 대표와 찬혁이 양쪽 문을 하나씩 맡아 철컹 붙들었다. 저절로 알아서 열릴 문을 멋들어지게 열어젖혔다. 움찔하던 아영이 허리에 얹힌 두 남자의 손에 떠밀리듯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두 남자를 좌청룡 우백호처럼 양쪽에 세우자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음. 찬혁아. 안 그래도 얘기하려고 했는데. 목포 호텔 잘 해결했더라. 그제 어제 연이어 9시 뉴스에 크게 보도되던데. 사장 부임하고도 오랫동안 지지부진 끌어왔잖아. 해결하느라 수고가 많았겠다." "수고는요 무슨. 그 정도쯤이야 이제 뭐 일도 아니죠. 부임 1년 만에 성과면 제 능력에 비해 오히려 부진했다고 봐야죠." "차. 뻐기는 건 여전하네. 임원진들이 이제 입 다물고 고개 조아리겠는데? 앞으로 일하기 편해지겠다?" "그 사람들 일일이 신경 쓰면 일 못 해요. 선배. 알잖아요.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그런데. 떠드는 입들이 많으면 어떻게 되려나?" 중간에서 핑퐁 테이블처럼 반듯하게 얼어붙은 채 서서 양쪽으로 한 번씩 날아가는 말에 얻어맞으며 바짝 긴장하고 있던 아영이 흠칫 소스라쳤다. 어제 비상구에서 양파 까듯 신나게 까대던 뒷담화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아 참. 목포 갔다 와서 우리 라면 먹기로 한 거. 아직 유효한 거지? 난 분명히 말했다. 곱배기라고. 하나로는 감질나서 영 성에 안 차거든." 오. 마이. 갓. 하마터면 아영이 그 자리에 주저앉을뻔했다. 무릎이 와들 떨려 저도 모르게 엘리베이터 벽에 등이 턱 붙어버렸다. 찬혁이 말하는 그 라면이 신라면도 안성탕면도 아니라는 것은 그가 목포에 내려가기 전날 밤 반지하 방에 쳐들어왔을 때 알게 되었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온 모양이다. 그 낯뜨거운 소리를 철면피처럼 하고 있다. 기가 막혀 아영은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건 라면 먹고 갈래? 한 건 다름 아닌 저였다. 없던 거로 무르기엔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집요한 찬혁이다. 빚쟁이처럼 라면 곱배기를 독촉하겠지! 호흡 곤란에 이어 아영의 눈앞이 노래졌다. "라면? 야 아영 씨 이거 서운한데요? 나도 라면 좋아해요. 나도 초대해줄래요? 라면?" 뒤따라 나온 민 대표의 부탁에 뒤통수를 강타당한 충격으로 아득해지던 아영의 정신이 찬혁의 맞장구에 결국 하얗게 날아가 버렸다. "볼만 하겠다. 셋이 먹는 라면." 띵~ 드디어 영원 같던 시간의 종료를 알리는 알람과 동시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기도 전에 이미 아영의 허리께에서 대기하고 있던 두 남자의 손을 피해 아영이 우사인 볼트의 피치로 튀어 나갔다. 피식 웃는 찬혁과 갸우뚱하는 민 대표를 뒤에 두고 아영은 종종종 잰걸음으로 갤러리를 빠져나갔다. SALAD BOWL BAR "아영 씨 점심으로 샐러드 괜찮죠? 여기 오픈 한 지 얼마 안 돼서 깔끔하고 샐러드 바도 종류가 아주 다양해요. 쿠스쿠스나 퀴노아도 있고." "네. 전 샐러드 좋습니다. 식후에도 가벼워서 식곤증 걱정 없겠는데요? 찝찝한 기분도 리프레쉬 해질 것 같고요." 들으라고 덧붙인 끝말에 찬혁이 얄밉게 토를 달았다. "좋아하는 거 좋아하네. 차. 아영이 아침 안 먹어요. 아침도 거르는 사람한테 점심에 무슨 풀떼기를 먹여요. 선배는? 아 진짜 돈도 많은 분이? 아니면. 나이 들더니 식성이 바뀌기라도 한 거야? 뭐가 매 좋대?" "찬혁이는 샐러드 별로면 다른 데 가던가. 우린 들어가죠 아영 씨." "네!" 짧고 굵게 답을 달고 아영이 샐러드 바로 들어가는 민 대표 뒤를 쪼르르 따라갔다. 어쭈. 찬혁이 냉큼 쫓아 가 아영의 팔을 턱 붙들었다. "토끼야? 무슨 풀떼기를 점심으로 먹어? 가. 딴 거 사줄게." "나 디톡스 중이거든. 너나 먹어 딴 거." 팩 뿌리치고 아영이 잽싸게 안으로 들어갔다. "하! 그런다 이거지." 찬혁이 씩씩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는 떫은 표정으로 접시를 턱 주워들고 샐러드 바 줄에 나란히 붙어 서 있는 민 대표와 아영의 뒤에 달라붙었다. 포크를 잊고 온 듯 다시 가서 포크를 챙겨 오더니, 아영의 정수리에 한마디를 내리꽂는 것도 잊지 않고 챙겼다. "디톡스 같은 소리 하네. 보톡스가 시급한 얼굴을 해가지고. 거울 좀 보고 말해. 주름이 어우 야." 나쁜 놈! 하루라도 더 어려 보이려고 나날이 도드라지는 광대에 핑크 볼 터치를 꼼꼼히도 덧발라 봤건만. 아홉 수에 접어들면서 흘러내리기 시작한 얼굴을 조금이라도 당겨보려 머리까지 바짝 올려 묶고 왔건만. 그 모든 경건한 노력을 처절한 발악으로 뒤바꿔버리는, 실로 놀라운 입담으로 찬혁이 아영에게 제대로 한 방을 날렸다. 막 흙에서 갓 뽑아 온 듯 파릇파릇 쌩쌩한 온갖 풀떼기 앞에서 아영은 갑자기 시든 꽃처럼 고개를 숙여 버렸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참 우울한 생장 과정이다. 툭 떨군 아영의 눈앞에 빨간 방울토마토 한 알이 접시 위에서 동그랑 굴렀다. "우리 시작이에요. 가죠." "아 네." "이거 먹어봐요. 루꼴라라고, 이태리 갔을 때 피자나 파스타에 토핑으로 곁들여 나온 거예요. 쌉쌀한 첫맛에 비해 식감은 부드럽고 산뜻한 게 입맛 돋우는 덴 최고." "아 그래요? 열무 배추 썰어놓은 것 같네요. 신기해라." 민 대표가 엄지를 치켜세워가며 강추를 해준다. 아영의 집게 대신 민 대표의 집게가 루꼴라를 대심 퍼 담아 주었다. "이것도 트라이 해봐요. 라디치오. 적상추 같아 보이지만 치커리 일종이죠. 치커리가 뭔지는 알죠?" "그럼요~ 그 정도는 알죠. 고슬고슬하게 생긴 거 맞죠?" "하하 고슬고슬. 그 표현 맘에 드네요. 딱 맞혔어요. 이것도 담아 줄까요?" "아뇨. 이제 제가 하겠습니다. 저 신경 쓰지 마시고 대표님도 담으세요. 어 앞에 줄." 접시 위에 수북이 쌓인 샐러드를 보고 난감해져 민 대표의 호의를 겨우 마다해놓고 아영은 뒤에서 밀어 대는 찬혁의 심술에 못 이겨 민 대표를 앞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는 남몰래 빛의 속도로 뒤를 팩 흘겨보았다. 그러는 사이 온통 푸른 채소 위에 빛깔도 영롱한 연 핑크 연어 살 두 점이 살포시 올려졌다. "아직 해산물 좋아하지?" "......" 찬혁은 기억하고 있었다. 다. 아영의 눈이 연어 살 위에서 감동으로 그렁그렁 해지기 무섭게 그의 이죽거림이 틈새를 놓치지 않고 치고 들어왔다. "연어가 다크서클에 좋은 건 알지? 눈 밑이 뭐냐 그게. 가 얼른. 뒤에 사람들 기다려." 그럼 그렇지! 하아! 아영이 팩 돌아서서 쌩 앞서 나갔다. 그사이 민 대표는 이미 한 접시 소담스럽게 담아 들고 자리로 이동하고 있었다. 앞 사람의 뒤통수를 보고 이동하면서도 아영의 입은 뒤로 볼썽사납게 돌아갔다. "오늘은 왜 또 나타난 거야? 나 피 말려 죽일 작정이야? 정기 특별전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나 좀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안되니!" "그러는 너는. 그때까지 너 가만 내버려 두란 소리는 멀찍이 꺼지라는 건데. 나 피 말려 죽일 일 있어?" "뭐? 그럼 매일 이러겠단 소리야 뭐야? 분명히 말하는데, 이런다고 달라질 건 없어. 알아?" "그럴까? 정말? 이래도?" "하아! 허리에서 손 떼! 미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갖다 대지 말고. 대표님 앞이야." 미리 자리를 잡고 앉아 해맑게 손을 흔들어주는 민 대표에게 고개를 까닥해 보이며 아영이 찬혁의 손을 재빨리 털어냈다. "매너 손. 몰라?" 포기를 모르는 끈끈한 손이 다시 은근히 허리에 붙었다. 아영은 혼신의 허리 털기로 찬혁의 장난을 방어했다. 숨죽여 쏘아붙였다. "치우라고!" "긴장하지마. 흥분돼. 여기서 뭘 어쩌라고 자식아." "이런 미친!" "나 먼저 자리로 간다. 더 퍼 담아 와라." 매끈하게 허리를 쓸며 떠나다 말고 찬혁의 손이 다시 달라붙었다.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옆 통수에 입을 대고 뜨겁게 말을 쏟아부었다. "어제 일 끝내려고 왔다. 당하고 살지 말라고. 뻔한 년들 다 잘라 줄게. 정기 특별전까지 맘 편히 일해. 나 아니면 누가 널 챙겨. 안 그래?" 아영은 하마터면 들고 있던 접시를 떨어뜨릴 뻔했다. 비상구 뒷담화의 주인공 얼굴들이 뇌리에 주마등처럼 스쳤다. 순식간에 얼어버린 심장에서 두려움과 공포가 냉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사람을 기겁시켜놓고 찬혁이 씨익 웃는다.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기어이 한마디를 더 단다. "나 착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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