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퍼 담고 싶은 샐러드는 없었다. 더 맛보고 싶은 채소는 고사하고 그나마 있던 입맛까지 다 떨어져 버렸다. 무시무시한 짓을 재미 삼아 저지르러 와놓고 철부지 아이 같기만 한 찬혁의 정신상태가 아영은 의심스러웠다. 제정신인 건지, 정상인인 줄 착각하는 소시오패스는 아닌지. 자신이 하려는 행동이 그들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전혀 무감한.
아영은 비상구에 선체로 마녀사냥을 당하듯 뒷담화에 만신창이가 되었던 어제의 악몽보다 찬혁의 말 한마디에 잘려나갈 그들의 인생이 더 끔찍했다. 그들을 향한 동정도 연민도 아니었다. 어차피 갤러리에 입사할 의사도 마음도 없었던 사람이 저였다. 이제 고작 2개월 하고 3주만 잘 버티면 끝인데, 저만 조용히 물러가면 되는데, 굳이 일을 크게 벌이려는 찬혁의 의중이 심히 의심스러웠다. 찬혁의 말마따나 정말 저를 위하려는 게 맞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게 분명했다. 새로운 패턴의 괴롭힘이 확실했다. 작용을 기대하는 작용에 충실한 몸뚱이로 둔갑시켜 놓은 것으로도 모자라 정신적 고통까지 가중하려는 악의적인 의도인 게 다분해 보였다.
아영은 샐러드 바를 벗어 나고도 자리로 선뜻 가지 못하고 디저트 코너 앞에서 몇 분을 더 서성였다. 믿고 기대할 사람은 민 대표뿐이었다. 그는 절대로 찬혁의 고자질 한마디에 직원을 무처럼 단칼에 잘라낼 사람이 아니다. 그것도 15년 동안 갤러리를 위해 헌신한 한 실장을? 결코, 아닐 것이라고 아영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내 쳐다보고 있는 두 남자의 시선에 온몸이 따갑게 타들어 갈 즈음, 공연히 들고 있던 집게를 내려놓고, 아영은 마침내 테이블로 향했다.
"어서 와요. 뭐 좀 맘에 드는 게 더 있었어요? 바 앞을 못 떠나던데."
"아니요. 처음이라 신기한 게 많아서 구경 좀 하느라... 기다리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자 그럼 어서 듭시다. 찬혁아 너도 먹어봐라. 입에 안 맞아도 건강식이라 생각하고 먹어 둬. 이제 건강 챙길 나이 됐잖아."
"건강이라니요. 원기가 넘쳐서 주체가 안 되는 사람한테. 드시죠."
햇살이 아담하게 들이치는 창가 원탁에 둘러앉은 세 사람의 모습이 창에 예쁘게 어렸다. 아름다운 모습에 그렇지 못한 관계를 숨기고 다들 식사를 시작했다.
풀떼기 먹인다고 구시렁대더니, 찬혁은 드레싱에 버무린 샐러드를 호밀 빵 사이에 듬뿍 끼워 넣고 치즈까지 얹어 와작와작 잘도 베어 먹었다. 싱그러운 채소가 그의 이 사이에서 아삭대는 소리까지, 참 맛있어 보였다. 음식이면 뭐든 맛있게 잘 먹는 모습도 한결같은 찬혁이다. 그런데 오늘은 밉다 밉다 하니 그 모습마저도 밉상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아영은 민 대표 쪽으로 흘깃 시선을 돌렸다. 갤러리 대표다운 미적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해 멋들어지게 담은 샐러드 접시였다. 감탄해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그걸 또 색 조합을 고려해 가지가지 헤쳐 모아 전병에 보기 좋게 싸서 한입에 쏙 깔끔하게 밀어 넣고 냅킨으로 입을 꼭꼭 누르며 점잖게 우울 우물 맛을 음미한다. 그레이 수트에 포켓스퀘어 그리고 퍼플 폴카닷 콤비 넥타이를 매치시킨 패션 감각까지 영국 신사 뺨치는 민 대표의 매너와 고상함을 한층 더 부각시켰다.
하아. 찬혁만 아니면. 영국 어느 카페에서 브런치를 즐기는 기분을 만끽하고 있을 텐데. 저 밉상! 아영은 찬혁이 얹어준 연어 살 두 점을 샐러드 속에 파묻어버렸다. 깊숙이.
"아영 씨 왜요. 입에 안 맞아요? 입에는 대지도 않고 들추고만 있네요? 뭐 다른 것 좀 가져다줘요?"
"아뇨. 괜찮습니다. 좋은데요."
"억지로 먹을 필요 없어요. 해산물 좋아한다고 했죠? 오늘 저녁은 일식집으로 가죠. 영양 보충합시다."
"아 네. 저 신경 쓰지 마시고 대표님도 어서 드세요."
"음. 그래요. 찬혁아. 잘 먹네? 먹을만한가 보다?"
"뭐 못 먹을 정도는 아니네요."
"싹싹 다 먹어놓고 튕기기는."
몇 번의 깨작임 끝에 아영은 포크를 내려놓았다. 사라진 입맛에 억지로 밀어 넣은 쓰디쓴 샐러드가 역겹기 그지없었다. 아영의 포크가 내려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찬혁이 커피와 블루베리 조각 케이크를 날라왔다. 아영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찬혁이 픽 웃었다. 식사는 자연스럽게 티타임으로 이어졌다. 민 대표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음. 시간 여유 있네. 그나저나 찬혁이 너는 리나 파티에 못 온다며? 리나가 무척 서운해하던데. 웬만하면 시간 좀 내주지 그래. 대표부임하고 맞는 첫 자선 파틴데, 너한테 얼마나 보여주고 싶겠어. 실망할 만도 하지."
"바빠서 못 가요. 그리고. 선배는 왜 그렇게 우릴 못 붙여놔서 몸이 단 겁니까?"
"너희 둘 바늘과 실사인 거 하루 이틀 안 것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굴긴. 그러지 말고 곁에서 잘 좀 보살펴 줘. 괜히 튕겨서 애 엇나가게 하지 말고."
"사춘기도 아니고 엇나가긴 뭘. 리나 성격 선배도 잘 알잖아요. 엇나가 봤자 며칠 잠수타는 거. 그러다 금세 헤헤거리며 나타날 거면서. 리나 심심한 거 못 참아서 잠수도 오래 못 타요."
"모르는 소리. 요즘 칼을 가는 것 같던데. 한 맺혔더라니까. 너 자꾸 한눈판다고."
찬혁이 파티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희소식에 블루베리 케이크를 더없이 맛나게 즐기던 아영이 조용히 포크를 내렸다. 칼을 가는 리나의 모습을 상상해버렸다. 온통 씁쓸하기만 한 입안을 커피로 헹궜다. 텁텁했다.
"아. 아영 씨. 리나 말로는 파티 하이라이트로 깜짝 선물이 있다고 하네요. 경품추첨? 그 녀석 기발하고 특이한 거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그런 이벤트를 기획했을 줄은 몰랐는데요? 우리 갤러리도 분발해야겠어요."
"아 그래요? 무슨 추첨 이길래요?"
아영이 영혼 없이 대화를 받았다.
"커플 해외여행 당첨 이벤트라는군요. 후원에 감사하는 뜻으로. 기대되는데요?"
"아...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네요..."
너무 기발하다 못해 기가 막혀 버렸다. 무슨 예능 쇼도 아니고. 후원인들 끌어모으려고 참 가지가지 한다 싶어, 아영은 리나가 갑자기 측은해졌다. 속으로 코웃음까지 픽 터졌다.
"아영 씨 기대해요. 내가 운발이 끝내주거든. 오죽하면 어릴 때 별명이 뽑기 왕이었다니까. 뽑는 족족 당첨이었거든. 여름 휴가도 반납하고 일하는데, 이번에 나랑 바람이나 쐬고 옵시다!"
아영의 심장이 철렁 떨어졌다. 대표님과 떠나는 커플 해외여행이라니! 말도 안 돼!
"리나가 웬일로 한 건 제대로 올리겠는데요. 참석. 재고해보죠."
이런 망할! 기어이 따라올 찬혁이다. 지구 끝까지라도!
"이벤트 때문에 참석 여부를 재고하기엔 너무 무리한 도박 아니니 찬혁아? 운발이 뽑기 왕 정도나 되면 모를까."
"운발 좋은 사람이 운발 만들어내는 사람은 못 당하죠. 선배. 오죽하면 어릴 때 별명이 신의 손이었을 까봐요. 못 만들어내는 운은 없다. 이게 제 인생 좌우명입니다."
말 같지도 않은 궤변을 늘어놓으며 찬혁이 또다시 민 대표와 도토리 키 재기를 하고 있다. 아영은 유치 찬란해지는 두 남자를 더는 봐줄 수 없어 커피 리필을 핑계로 자리를 얼른 벗어났다.
커피포트 스탠드 가에 서서 호록호록 한잔을 다 비우고 나서야 이래저래 뒤집힌 속이 좀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한잔을 더 내려 들고 돌아섰다. 그리고 그대로 흠칫 멈춰버렸다. 찬혁의 얘기를 경청하는 민 대표의 자세가 사뭇 진지해 보였다. 다리를 꼬꼬 가슴 앞에 팔짱을 낀 게 단호해 보였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손가락으로 입술을 쓸었다. 심사숙고의 몸짓이었다.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 전임을 암시했다. 아영의 심장이 무섭게 쿵쿵 널을 뛰기 시작했다. 서둘러 자리로 돌아갔다. 찬혁을 막아야 했다.
"음. 그런 일이 있었던 거였군."
아영이 자리에 앉았을 때는 찬혁의 고자질이 이미 다 끝난 후였다.
"아영 씨가 그래서 점심 식사에 못 왔군요. 찬혁이 때문에 운 건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고. 아영 씨. 지금은 괜찮습니까?"
"예. 전 괜찮습니다. 무슨 말씀을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분들 말 틀린 거 하나도 없었습니다. 제가..."
"내 잘못이라는 소리로 들리는군요. 아영 씨를 그 자리에 꽂아 넣은 걸 탓하고 싶은 거예요?"
"아.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면. 다 내 탓이다 나만 참고 넘기면 된다. 뭐 그겁니까?"
"제 탓이라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그렇게까지 자기 비애에 빠질 만큼 제 상황이 여유롭지도 못하고요. 자비로운 성격은 더더욱 아니라서요. 다만, 정기 특별전 코앞에 두고 잘 짜놓은 팀을 흔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일 뿐입니다."
"팀이야 다시 잘 짜면 되고. 아영 씨 작업에 절대 지장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이런 일 눈감고 넘어가 줬을 뿐, 몰랐던 것도 아니고. 어제오늘 일 아닙니다."
"이참에 물갈이 한번 하시죠. 선배. 한 실장."
"어제 일, 자초지종을 얘기해준 건 고마운데, 거기까지 나서는 건 아니라고 보는데. 선은 넘지 마라. 찬혁아."
"선을 넘은 건 한 실장이고.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죠. 선배. 떠드는 입이 많으면 배 가라앉습니다."
"흠. 대표 사생활을 뒷담화로 좀 들먹거렸다고 선을 넘었다 하기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네. 앞에서 대놓고 떠들었으면 또 모를까. 그 문제라면 이 자리에서 더는 언급 하지 마라."
"애라는요. 한 실장 입에서 개 껌처럼 씹히던데, 그것도 괜찮습니까?"
민 대표의 커피잔이 딸그락 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생전 처음 보는 그의의 당황하는 모습에 놀라기도 잠시, 아영은 낯선 이름에 신경이 곤두섰다. 어제 들은 뒷담화에 등장했던 이름이 아니었다. 혹시 지나쳤나? 아영은 기억을 더듬어 올라갔다. 그 이름은 없었다.
"아영 씨도 다 들었을 테니 알겠군요. 정애라 씨."
"예? 전 모르는 분인데요.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그래요? 이렇게 말이 나왔으니, 아영 씨도 곧 알게 되겠군요. 그 사람 우리 갤러리에서 굉장히 밀던 설치 아트 작가였습니다. 아영 씨 전에 3년 같이 일했죠. 실력으로 보나 예술성 면에서 보나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훌륭한 재원이었죠. 그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찬혁이와 각별한 사이였던 사람이라 특별히 신경을 썼던 작가였고."
"아..."
각별한. 아영이 시선을 떨구고 고개를 희미하게 끄덕였다. 찬혁의 이마에 퍼렇게 힘줄이 돋았다. 표정이 순간 싸늘하게 식었다. 각별한 사이? 불필요한 부연을 덧붙여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있었다. 찬혁이 발끈 나섰다.
"그런 얘기는 지금 이 상황에서 왜 꺼내는 겁니까! 한 실장이 직원들 모아놓고 애라의 죽음까지 씹고 다닌다는 게 문제의 핵심인 거 몰라요, 선배? 대표님의 그 화려한 사생활. 아주 야무지게 돌려 까고 있던데. 저랑 각별한 사이요? 들어 보니, 선배의 각별함에 비하면 전 명함도 못 내밀겠던데요?"
죽은 사람! 아영이 흠칫 놀랐다. 지금 망자를 두고 열띤 언쟁을 벌이고 있는 거야? 죽은 사람이 갑자기 모든 문제의 핵심 인물로 부활했다. 아영은 마치 자신이 그 여자의 자리에 잘못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등 뒤에 망령이 서 있기라도 한 듯 소스라치게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듣도 보도 못한, 이미 고인이 된, 두 남자에게 각별한 한 여자가 줄다리기 줄이 되어 찬혁과 민 대표 사이에서 팽팽히 당겨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