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혁은 더 이상 할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반듯한 이마가 험악하게 구겨졌다. 서슬 퍼래진 그의 기분엔 아랑곳하지 않고 민 대표가 다시 시계를 들여다 보며 차분히 자리를 정리했다.
"난 할 일이 있어서 먼저 들어가봐야 할 것 같은데."
민 대표가 먼저 일어섰다. 아영도 주섬주섬 가방을 들었다.
"아영씨는 더 있다 들어와요."
"네?"
민 대표 답지 않았다. 찬혁으로부터의 철벽보호를 결의한 사람답게 전방위로 아영을 에워싸주던 그였다. 그런데 찬혁과 둘만 남겨놓고 가려 한다. 그리 살갑지도 않았던 점심 회동 후였다. 민대표의 완화된 경계를 끌어내기엔 점심 식사가 갖는 의미가 너무나 하찮았다. 오히려 뽑기 왕과 신의 손의 한판 대결을 예고한 웃지 못할 자리였다. 어쨌거나 아영은 자리를 떠야 했다. 민 대표의 경계령이 완화되자 아영의 자기방어 시스템이 요란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저도 들어가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나온 김에 심부름 좀 해줄래요?"
"심부름이요? 아, 예. 뭐든 시키세요."
"그래요. 사무실에서 메시지 보낼 테니 그대로 구입하면 돼요. 내가 쓸 거니까 신경 좀 써주고."
"네. 그러겠습니다."
민 대표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 일어서는 아영을 만류해놓고 돌아서다 말고, 목석처럼 버티는 찬혁을 내려다보았다.
"찬혁아. 우린 다음에 또 보자. 다음이라 봐야 금요일이겠네. 파티에서 보지 뭐."
대꾸를 기대한 게 아니었는지 민 대표는 두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그가 가고도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각별했던 망자의 죽음을 기리는 건지 찬혁은 그 자세 그대로 말이 없었다. 아영도 말없이 자리를 지켰다. 당장에라도 자리를 떠야 하는데, 선뜻 일어설 수가 없었다. 복잡한 심경이 여실히 드러난 찬혁의 무표정이 맘에 걸렸다. 표정을 읽을 수 없을 때 그는 늘 복잡했다. 각별함의 깊이만큼이나 심란할 테지. 3년 전이면 그리 오래된 연인도 아니고. 아영은 찬혁의 묵상을 위해 차라리 자리를 피해 주기로 했다. 한편으론 죽은 여자를 회고하느라 심연처럼 앉아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심란한 생각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제 속사정에도 저만의 정리 시간이 필요했다.
"그만 일어날게. 부탁하신 일도 있고."
"메시지 보낸다며. 받고 가. 하릴없이 길에서 어정대지 말고."
무슨 심부름인지 모르니 어디 근처에서 어정대야 할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죽은 여자와 합석한 기분도 탐탁지는 않았다. 어정쩡해져 버렸다.
"네가 상상하는 일. 아냐."
아영은 일으키던 엉덩이를 다시 조용히 내려놓았다. 이젠 하다 하다 독심술까지 하는지, 제 속을 콕 집어 자리에 앉힌다. 질문 없이도 알아서 이어져 나올 찬혁의 답을 들어보기로 했다. 그간의 행실로 미루어 고해성사 같을 테지만.
"각별한 사이였지. 그런 앤 본적이 없었으니까. 특이 종에 끌리는 거 보면 내 취향이 독특한 건 맞고."
괜히 듣기로 했다.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제 와 일어나기 애매한 타이밍이 되어버렸다. 꼭 이런다. 주저하고 봐주다가 저가 제 발목 잡는 거. 동급으로 묶여 있는 그 여자가 경험했을 찬혁이 불현듯 꼴 보기 싫어졌다. 그가 그 여자에게 저질렀을 만행이 그대로 상상됐기 때문이 아닌 건 분명했다. 보나 마나 그때도 괴롭혔겠지. 죽은 이가 겪었을 괴롭힘을 애석해하기보다 그 만행의 강도를 가늠해 제 것과 비교하고 있는 씁쓸함이란. 그의 괴롭힘은 좋아함의 강도와 비례하니까. 하아. 아영은 깊은 한숨을 여과 없이 내쉬었다. 속을 잘도 숨기더니 이 진심은 왜 은폐가 안 되는지 모르겠다.
"여자 사람 친구 자식아. 한숨은. 차. 설마 죽은 친구 애도하는데 질투라도 한 거야 뭐야."
"... 돌아가신 분한테 질투는 무슨... 사리 분별 떨어지는 사람으로 매도할 일 있어? 연인이었다 해도 그런 유치한 짓은 안 하겠다."
거짓말이 국수가락 뽑히듯 잘도 이어졌다. 그게 무슨 자존심 세울 일이라고 진심을 또 한 번 속여놓고 연인이 아니었음을 다행스러워하고 있다. 아영은 직진하지 못하고 요리조리 발뺌하기 바쁜 제 현실이 참으로 갑갑하기만 했다. 그렇지만 2달 하고 3주만 견디면 끝이다. 그러니 질투도 기대도 미루기는 딱 그때까지만이다.
"좀 유치해지면 어때서. 난 네 잘난 그 대표님 소리 때문에 매일매일 질투나 돌아버리겠는데. 그럼 난 뭐가 되냐?"
"질투할 걸 해. 직장 상사야. 그것도 하늘 같은 보스. 이번 개인전 그분 손에 달렸어. 잘하고 싶고 성공하고 싶어."
"언제부터 민 대표가 네 하늘 같은 직장 상사로 둔갑한 거야? 아주 대표님 소리가 찰지게도 입에 붙었더라? 너 한국을 빛낸 100인의 아티스트라며. 이렇게 저자세로 기어야 해?"
"본분을 다하느라 애쓰는 중인데 기는 거로 보였다니 유감이네. 근데 이제 아예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어야 하는데 어쩌지? 오늘일. 대체 왜 그랬어? 이제 그 사람들 어쩔 거냐고."
"네 걱정이나 해. 두 귀로 똑똑히 듣고도 화가 안 나? 네 치부를 다 파헤쳐 난도질하는데 그게 그냥 넘어가 져? 숙맥.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하면서 남 걱정은. 그래서 네가 힘들게 사는 거야. 인생이 피곤한 거라고."
피곤한 거 맞다. 그 말을 듣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아영의 이마에 수심이 주름져 일었다. 피곤하고 고단한 삶을 선택한 건 저였다. 고행자도 선각자도 아닌, 그저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한 여자가 견디기엔 결코, 쉽지 않은 은둔생활이었다. 그래도 그땐 비록 헛꿈을 꿀지언정 행복했었다. 찬혁을 다시 만난다면. 실체 없이 꾸는 꿈은 비록 개꿈이어도 깨기 전까지는 판타지니까.
깨지 말았어야 했다. 찬혁과의 예기치 않은 재회는 더 큰 고난을 예고하는 전초전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의 불행 위에 또 하나의 불행이 얹어지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불행은 시간 차를 두는 따위의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는 불문율은 어김없이 지켜졌다. 걷잡을 수 없는 해일이 되어 한꺼번에 밀려왔다. 머리 위에 떨어질 거대한 파도에 기겁해 정신을 못 차리는 숨 막히는 순간에도 아영은 온통 저 아닌 다른 사람 걱정뿐이었다. 불행을 하나하나 야무지게도 쌓아 올려준 한 사람. 박찬혁.
저가 불행제조기인 줄도 모르고 떠들어대고 있는 찬혁이, 그의 핀잔이 그래서 무척 피곤했다. 아영은 가만히 앉아서 폭삭 늙고 있는 착각에 빠져버렸다. 그의 공염불 같은 소리는 그칠 줄 모르고 이어졌다.
"민 대표 얘기 못 들었어? 어제오늘 일 아니라잖아. 너 아니어도 언젠간 터질 일이었어.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고개 빳빳이 들고 일해. 알겠어? 아 인상 좀 펴. 이마 주름 봐라."
찬혁의 손가락이 아영의 이마를 콕콕 쪼아댔다. 밉살스러운 손을 쳐내고 아영이 이마를 싹싹 문질러 다렸다.
"너는 매사가 그런 식이야. 말 참 쉽게 해. 다 쉬워. 그건 너 정도 되는 부와 지위를 가진 사람들 세상 얘기라고. 동화. 판타지. 잔소리건 조언이건 해주려면 공감 능력부터 좀 길러보는 건 어때."
"공감 능력 200라서 한 행동이야. 그런 인간들 때문에 너 질질 짜는 꼴 다신 보기 싫어."
"... 우는 거 보니 가슴이 아팠다고 해주면 입이 돌아간 대니 혀가 꼬부라진다니... 꼭 한마디 더 해서 사람 무안하게 만들어..."
"꼴 보기 싫을 만큼 아팠다고."
"......"
"이미 오래전에 해결했어야 할 일이야. 그랬으면 애라가 갤러리를 나올 일도 없었겠지. 죽을 일도 없었을 테고"
"뭐? 그럼... 그 사람들 때문에 죽었단 소리야?"
"그런 건 아니지만 발단은 그 인간들 그 더러운 주둥이 때문이었으니까. 못 견디고 갤러리를 나온 게 화근이었지."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분이 그렇게 말했어? 그 사람들 때문이라고?"
"그때 난 영국 유학 중이었고. 승승장구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애가 어느 날 영국으로 날 찾아왔더라고. 힘들다고. 그래서 도망쳤다고. 그런데 그런 애를 돌려보냈다. 힘든 거 당연히 이해한다는 개소릴 해가며. 조금만 참고 견디면 스타 돼서 힘들게 한 인간들 즈려 밟아줄 날 올 거라고 되지도 않은 조언을 했다고. 얼른 성공하라고 응원한다고 같잖은 격려까지 아끼지 않고 등 떠밀었다 내가. 얼른 가라고. 가는 애 뒤통수에다 대고 화이팅 이 지랄까지 해가면서. 그러고 돌려보낸 애가 죽었다는 소식으로 돌아왔어."
"... 어떻게... 돌아가신 거야. 설마..."
"극단적인 선택을 했더라고. 기껏 SOS까지 직접 써 들고 친구라고 찾아왔는데 친구라는 새끼가 못 알아 처먹었으니..."
"자책하지마... 너도 어떻게 해주지 못하는 상황이었잖아. 그 상황에서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거 아냐..."
"최선? 차아. 배운 건 있지. 널 이해해. 힘들겠구나. 힘내. 이따위 공감이 궁지에 빠진 사람한텐 얼마나 공허한 헛소린지 그때 뼈저리게 느꼈다."
"......"
"내 공감은 가차 없는 복수야. 그러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질질 짜고만 있을 거면서 나한테 공감 능력 운운하지 말라고. 차라리 도와달라고 해."
"내가 원치 않으면? 친구 잃고 자책감과 상실감이 트라우마로 남은 건 너무 가슴 아픈데, 하지만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쳐들어와서 복수한다니. 이건 너무 아이러니잖아. 결국, 네 맘 편해지자고 하는 복수야. 죄책감 덜고 싶은 거잖아. 난 더 깊은 궁지에 빠졌고."
찬혁이 대답하지 않고 말없이 응시했다. 표정이 없어서 복잡한 속이 여실히 드러났다. 아영은 긴장했다.
"아영아."
"어..."
"하나만 묻자. 두 번 안 물어. 그러니까 내 눈 똑바로 보고 솔직하게 대답해."
"......"
아영의 심장이 순간 무섭게 철렁 내려앉았다. 일격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처럼 비장한 얼굴로 찬혁이 그녀의 눈을 매섭게 응시했다. 예상 질문이 아영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왜 떠났어? 왜 도망치는 거야? 유치장에 버려두고 간 이유는? 왜 하필 민 대표 집이야? 수도 없이 반복된 질문들이었다. 답은 이미 준비되어있다. 또 뭐가 있지? 아영의 머리가 쳇바퀴처럼 미친 듯 돌아갔다. 현기증이 나서 빈속이 다 울렁거렸다. 위로 다 쏠릴 지경이었다.
"너. 그때 왜"
띠링~
메시지! 구원이 도착했다. 아영은 퍼뜩 돌아앉아 평소보다 더 부산스럽게 가방을 뒤져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했다.
"대표님 문자 보내셨다!! 나 이제 가볼게. 너도 이제 가야지. 가서 일해. 바쁠 텐데..."
"같이 가줄게."
"어딜 같이 가? 왜 또?"
또 소리가 소스라치게 붙었다. 찬혁의 질문이 채 끝나지도 않았다. 그걸로 사람 물고 늘어져서 또 무슨 못된 짓을 하려고! 아영의 얼굴이 그의 집요함에 하얗게 질려버렸다.
"또는 무슨. 이럴 줄 알았으면서 새삼스럽게. 기대해놓고 아닌 척 발끈하는 거는 아주 도가 텄네. 원하는 대로 해줄게. 가자고. 일어나 얼른."
운을 만들어 내는 신의 손이라더니, 찬혁은 기회까지도 만들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