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우수에 젖어있었나 싶게 찬혁이 산뜻하게 일어나 앞서 나갔다. 나가려다 말고, 어이없는 얼굴로 눌러앉아 있는 아영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고갯짓으로 까딱 불러냈다. 목줄도 없이 개 끌리듯 아영이 뒤따라 나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아영은 구입 물품 리스트를 들여다보았다. 일분일초라도 빨리 찬혁을 떼어내려면 어디로 해서 어디로 한 바퀴 돌아야 할지 먼저 동선부터 파악해야 했다. 후딱 돌 참이었다. 열중하는 사이 오른쪽 어깨가 묵직이 내려앉았다.
"뭐 사 오래?"
찬혁의 얼굴이 어깨 위에 능청스럽게 턱을 괴고 휴대폰 화면을 스캔하고 있었다. 파리 쫓듯 어깨를 파닥 털어내고 아영이 인사동 쪽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털어낸 그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뭐 이 딴 걸 작가한테 시키지? 선배 미친 거 아냐? 아니 그리고 요즘도 도장 파는 사람이 있나?"
그러게. 소리가 절로 나올 법도 했다. 누가 봐도 시간 끌기 딱 좋은 구입 물품 목록이었다. 특히 벼락 맞은 박달나무에 새긴 도장에서는 민 대표의 의도가 뻔해졌다. 너무 뻔해 저절로 걸음이 느려졌다. 갤러리에서 일어나고 있을 일이 눈앞에 선했다.
"넌 자존심도 없냐. 이렇게까지 잔심부름이나 해가며 그래도 거기 붙어있는 거 보면 속이 없는 놈인 건 맞고. 그놈의 별이 뭐라고 기어이 별을 따야겠단다. 내가 참 할 말이 없다."
"별 같은 소리 한다. 나 이제 인턴이거든? 투잡 뛰는 중이라고. 두 번이나 깽판 쳐서 내 밥줄 끊어놓은 누구 덕분에."
아영의 눈이 찬혁에게 하얗게 돌아갔다. 어느새 느려진 걸음이 그와 발을 맞춰 걷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행실을 미루어 짐작건대, 이쯤이면 적어도 한번은 헤드락 걸듯 어깨동무를 해서 끌고 가거나 골목마다 밀어 넣고 입을 들이밀었을 사람인데, 웬일로 얌전히 걸어준다. 나란히. 아영은 조금 더 오래 걸어도 좋을 것 같았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아쉽고 아까웠다.
"인턴? 누구 맘대로? 그런 거 시작하기 전에 왜 의논을 안 하지?"
"의논? 누구랑. 너랑? 완전히 길에 나앉을 일 있니? 이렇게 발끈하면서 훼방이나 놓을 게 뻔한데? 나 아직 회원비 8회분 정산할 거 남았다. 1회분 겨우 갚았다고. 이번에도 깽판 치기만 해."
"왜. 이르게? 대표니임~ 하면서?"
"어. 아주 아주 귀엽게."
"뭐? 야! 이게 진짜! 어딜 도망가!"
아영이 도장 가게로 날쌔게 내뺐다. 가게 안은 다행히 손님이 많았다. 도장이 기념품 화 된 요즘, 관광객들에겐 꽤 괜찮은 선물이라더니, 정말 외국인 손님이 대부분인 것 같았다. 아영은 중국말로 대화하고 있는 여자들 뒤에 냉큼 줄을 섰다. 득달같이 쫓아와 아영의 뒤에 찰싹 달라붙은 채로, 찬혁이 턱 밑 정수리에 뜨거운 콧김을 씩씩 뿜어댔다. 속닥임이 약이 바짝 올랐다.
"너 아주 많이 변했다? 나한텐 그렇게 안 하잖아. 어?"
"사람 봐가면서 하는 거지. 아무한테나 할까 봐?"
깍쟁이처럼 쏘아주고, 고소해 아영이 히죽 웃었다. 찬혁이 과연 그런 아양을 듣게 될 수나 있을까. 회의적이었다. 콧소리 시작과 동시에 안고 뒹굴 게 뻔하니까. 아영은 그런 뻔한 날도 버킷리스트에 담아 본다.
"야. 명예에 눈이 멀었네. 멀었어. 별을 아주 후드려 따라. 따."
"응. 아주 야무지게 따보려고."
"어쭈 점점. 하! 차!"
약이 머리끝까지 올라 찬혁이 줄에서 이탈했다. 아영은 열이 뻗쳐 밖으로 팩 나가버리는 그를 비죽 돌아보았다. 너른 어깨가 아이처럼 씩씩대는 꼴을 보고 있자니 그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유치함이 귀여워 저절로 치 웃음이 일었다. 어쩜 사람이 저렇게 단순 무구한지. 골려 먹기 딱 맞다.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찬혁은.
아영은 그가 없는 틈을 타 민 대표 도장에 제 도장도 끼워 주문을 넣었다. 박찬혁과 신아영의 도장. 신박. 벼락 맞은 박달나무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흥분해 다소 충동적으로 저지르긴 했지만, 생각할수록 참 신박한 아이디어 같았다. 다시 히죽 웃음이 났다.
도장이 완성될 동안 아영은 나머지 물품들을 먼저 다 구입하기로 했다. 토라질 땐 언제고, 그 길로 가버릴 줄 알았던 찬혁이 다시 곁을 걸었다. 네 군데 상점을 다 돌 때까지도 떠나지 않고 졸졸 따라다니며 참견하고 윽박지르고 삐지기를 반복했다. 패턴일 뻔해지자 다루기도 쉬웠다. 오는 길에 야수의 본능은 어디에 흘리기라도 했는지, 폭력성이 사라지자 찬혁의 다음 행동 또한 예측이 가능해졌다. 아영은 한결 가볍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찬혁을 즐겼다. 딱 그 표현이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참 좋은 기분.
"무거워? 뭐. 오빠가 좀 들어줘?"
"참 빨리도 묻는다. 됐거든. 그리고 태어난 거로 따지자면 내가 너보다 삼 개월이나 먼저 세상에 나왔네요. 내가 누나라고. 나 백일잔치할 때 응애하고 나온 주제에 오빠는 무슨."
빈말인 줄은 알았지만, 찬혁은 역시나 거들 생각이 없었다. 얄미워! 아영은 양손에 바리바리 든 비닐봉지를 시위하듯 들 척 고쳐 들었다.
"난 연상도 좋아. 미리 알아서 다 해주지, 내숭 안 떨고 요구하는 족족 기가 막히게 해주지, 노련하지, 화끈하지."
"사람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니?"
"내가? 뭘?"
"어떻게 된 게 머릿속이 온통... 매 그런 야한 쪽으로만 돌아가냐고."
"연상녀의 연륜에서 비롯된 사무 능력을 논하고 있었는데 그걸 그렇게 해석하나? 야~ 너. 어쩐지 볼 때마다 기대 무지하게 하더라. 오늘은 한 박자 쉬어 갈랬더니. 왜. 그냥 헤어지기 아쉬워? 해줘? 좀 쉬어가?"
"아 진짜! 그런 소리가 아무렇지 않게 나와? 난 네 퇴폐적인 사고체계를 이해할 수가 없다. 연애감정 이런 건 다 건너뛰고 바로 침대로 직행해버리는 네 그 정신상태 말이야. 저질."
"그게 바로 건강하단 뜻이야. 혈기왕성. 넌 다행인 줄 알아야 해."
대체 뭘 다행인 줄 알아야 한다는 건지. 아영은 상상해버렸다. 볼이 화끈 달아올랐다.
"저질이라고 하면서 원하는 거. 저질이지만 좋은 거. 그게 너잖아. 누가 더 제 감정에 솔직한 것 같은데? 진심 속여가며 고상한 척 정숙한 척 밀어내는 거 그게 더 밥맛이야. 뻔히 속 보이는 줄 모르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싫어서 밀어냈으면 좋았을걸. 매번 결국엔 매달렸다. 아영은 수치스러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찌르르 심장이 찔리는 걸 보니 정곡을 찔린 탓인 것 같다. 고개를 틀어버렸다. 화제 전환이 시급했다. 다행히 걸음을 멈칫 세우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난 점잔 빼면서 돌려 말하고 몸 훅 다는데 아닌 척 참고 이런 거 체질상 못해. 왜. 뭐. 저거 먹고 싶어?"
"아니. 신기해서. 저게 설탕이라잖아. 어떻게 저렇게 하늘하늘 가닥가닥 실타래 같지? 여기 지나다닐 때마다 보면서 늘 신기했거든."
"신기하기는. 자장면 면발 뽑는 거랑 똑같구만. 가 그럼. 앞에 가서 봐."
찬혁이 멀찍이 서 있는 아영을 상점 앞으로 등 떠밀었다. 실타래가 가늘어질수록 아영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찬혁은 서른이 다 된 여자의 그런 모습이 더 신기했다. 종일도 보고 서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쁜 언니를 연발하며 호객 행위 하는 입담 좋은 훈남 실타래 제조원만 아니면 두고두고 아껴 볼 광경이었다.
"이봐 아저씨. 예쁜 언니 그만 찾고. 이거 색깔 별로 하나씩 담아보죠?"
"사게?"
"못 먹어봤다며. 안 사주면 다음에도 이러고 멍하니 서 있을 거 아냐."
"누가 못 먹어봤데?"
"저게 설탕이라잖아. 그 소린 뭐야 그럼. 돈 벌어서 뭐 했냐. 이런 것도 안 사 먹고."
"혼자 청승 떨일 있니. 이런 건 같이 먹을 사람이 있어야 제맛인 거야."
"넌 이런 거같이 먹어줄 친구도 없어?"
"없어. 사느라 바빠서."
한마디 더 이죽거리려고 입을 열려다 말고, 찬혁이 입을 다물었다.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따라 나온 대답엔 고단함이 그대로 묻어있었다. 그의 이마에 주름이 지나갔다. 정작 말하는 아영은 아무렇지도 않아서 더 아프게 다가왔다. 잘 나가다가 애잔해지냐고. 차. 찬혁은 동그랗게 한입 크기로 말린 실타래 캔디가 일렬로 조로록 담긴 상자를 받아 계산까지 마쳤다. 그리고 길을 걸으며 제 입에 먼저 하나를 쏙 털어 넣었다.
"음~ 어우 야. 달다. 이게 뭔 맛있다고. 어우 달어."
단 거 먹고 오만상은 또 뭔데? 찬혁의 무배려에 열이 뻗쳐 아영의 머리꼭지가 열렸다. 또 하나 제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아영을 돌아보았다. 황당한 얼굴로 어이없게 올려다보는 게 귀여워 두 번째 실타래도 제 입에 홀랑 넣어버렸다.
"하나 줘?"
"됐거든! 혼자 다 처먹어라! 이 돼지 새끼!"
딴에는 쌍욕이라고 내질러놓고 아영이 팩 앞서간다. 피식. 찬혁이 냉큼 따라갔다.
"자. 자. 뭘 또 먹는 거 갖고 삐지고 그래. 애기 같이. 아 해. 아~ 으응? 얼른. 사람들 보잖아. 아."
찬혁이 실타래 캔디로 아영의 입술을 톡톡 건드려 댔다. 이걸 그냥! 양손 가득 짐을 든 터라 확 쳐낼 수도 없고. 아영이 못 이기는 척 소심하게 입을 벌렸다.
"더 크게 벌려야지. 이게 그리로 어떻게 다 들어가. 아. 크게."
"아..."
줄 것처럼 입술에 대고 있던 실타래 캔디를 슬쩍 당겨본다. 아영의 입이 반사적으로 따라왔다. 시선은 오직 캔디에 집중한 채, 하얀 설탕 가루가 묻은 입을 벌리고. 기껏 캔디 앞까지 마중 나온 아영의 입을 저버리고 찬혁은 또다시 짓궂게 캔디를 제 입에 물었다.
"하아! 이런 미친! 널 믿은 내가...!"
캔디를 받아먹으려고 벌린 입이 기가 막혀 다물어지지 않는 틈에 찬혁의 입이 아영의 입으로 캔디를 옮겼다. 벌건 대낮에 길 한복판에서! 이성이 벌떡 일어날 겨를도 없이 표실 포실하고 몽실몽실한 실타래가 찬혁의 입속에서 사르르 녹아 아영의 혀에 찐득하게 감겼다. 달았다. 너무. 달디단 게 그의 혀인지, 그 혀에 코팅된 설탕인지 가늠할 틈도 없이 아영의 눈이 꿈결처럼 스르르 감겼다. 끈끈하게 달라붙은 두 입술 사이에서 실타래 캔디가 꿀물처럼 녹아 흘렀다. 제 입으로 들어간 걸 나눠준 게 아깝기라도 했는지 찬혁의 혀가 집요하게 아영의 입속을 핥았다. 혀를 물고 가 단맛을 남김없이 빨아 삼켰다. 달큰한 설탕 향만 남기고 찬혁의 입술이 쩍 떨어졌다. 그 소리가 웃겼는지 그가 큭 웃었다. 아영이 눈을 떴다. 눈앞에 한가득 찬혁의 얼굴이 설탕공예 인형처럼 반들반들 영롱했다.
"맛있어? 더 먹여줘?"
"......"
아영은 얼른 고개를 떨구어 버렸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는지, 더 줘 소리도 못 하고 바라고만 있다.
"자. 아 해. 장난 안 할게. 제대로 음미해봐. 폭신폭신한 게 식감이 재밌네. 아."
"... 아..."
웬일로 고분고분 입에 물려준다. 양손에 바리바리 든 짐 때문에 입술로 물고 혀로 당기는 묘기를 부리고 있을 때 찬혁의 못다 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너. 왜 그때 거짓말했어?"
아영의 필사의 우물거림이 멈췄다.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리나 만난 거. 처음 아니었잖아. 왜 속였어?"
소스라치게 놀라, 아영의 입이 허! 벌어졌다. 거의 입속으로 다 넘어온 실타래 캔디가 허무하게 바닥으로 추락했다. 예상을 빗나간 질문이었다. 한반도 예행연습을 해본 적 없는, 답할 수 없는 질문이 터졌다.
"왜 대답 못 해?"
"......"
"말하기 싫어?"
"......"
"그래 그럼. 리나한테 물어보지 뭐. 그게 더 빠르고 정확하겠다. 금요일 날 삼자대면하면 되겠네."
공포에 질린 눈으로 올려다보는 아영을 자비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며, 찬혁은 아영의 입술에 묻은 하얀 설탕 가루를 엄지손가락으로 쓱 밀어냈다.
"예쁘게 하고 와라. 간다."
남은 실타래 캔디 한 뭉치를 냅킨에 둘둘 말아 아영의 손에 들린 비닐봉지 속에 쑤셔 넣어주는 선심을 베풀고 찬혁이 떠났다.
발 앞에 구르는, 흙 범벅이 된 눅진한 실타래 캔디 위로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