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알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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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 같은 키스의 달뜬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냉정과 열정 사이, 그 어디쯤에서 아영의 혼이 수증기처럼 하얗게 날아가 버렸다. 길 한복판에 엉뚱하게 심어진 가로수마냥 성가신 꼴로, 아영은 한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마다 제 일에 집중하느라 한눈을 팔고 길을 걷다가 앞에 버티고 선 아영에 놀라 양 옆으로 화들짝 피했다. 말복 더위에 진이 마른 고목처럼, 생기 잃어 창백해진 아영을 중심으로 인파가 홍해처럼 갈라졌다. 기적을 일으키는 중에도 기적은 없었다. 양손에 바리바리 들린 비닐봉지가 오가는 무릎에 신경질적으로 채여 앞뒤로 격한 진자운동을 할 때쯤, 아영은 그제야 최면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황망한 얼굴로 걸음을 떼어놓았다. 찬혁의 모습은 이미 인파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설탕 인형처럼 영롱한 얼굴로 달디단 키스를 퍼붓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사람답게 그는 미련 없이 가버렸다. 사람을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들어 놓고,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져 소스라치게 놀라게 하는 스릴까지. 그가 남긴 키스는 달콤살벌 그 자체였다. 걷는 내내 찬혁의 질문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왜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리나를 모르는 체했는지. 차마 꺼내지 못한 대답이 아영의 머릿속에서 곱 씹혀 상처 위에 또다시 상처를 덧입혔다. 리나는. 어릴 때 엄마와 저를 버리고 떠나 어딘가로 증발해버린, 지금은 얼굴도 가물가물한 아빠라는 사람의 비리를 낱낱이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모른 체가 아니라 몰랐으면 좋았을 사람. 그 비리 사실을 알려준 사람도, 그 사실을 찬혁에게 다 폭로해버리겠다고 협박한 사람도 리나였으니까. 그러므로 찬혁의 곁에 리나가 있는 한, 아영은 떠나야 하고 리나를 모른 체해야 하는 운명인 것이다. 하필 그 비리란 게 저를 이용해 파라다이스 호텔에 빌 불어 재기를 노리려는 아빠의 꼼수였다. 찬혁이 분개하며 다그쳐 물었던 파라다이스 호텔 3층 신화당 알박이. 그것은 시작에 불과할 테지. 아빠의 그 얄팍함에, 그 비열함에 아영은 치가 떨렸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엄마를 찬혁의 아버지와 내연관계로 만들어 찬혁의 어머니를 벼랑 끝으로 내몰아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해놓고,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그 혼란한 와중에 파라다이스 호텔 명당자리에 신화당 자리를 찜해놓은 사람이 아빠였다. 그것도 남도 아닌 딸의 이름을 이용해 그 짓을 해놓다니. 생각만으로도 구역질이 났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았다. 현기증과 동시에 부실한 점심 식사로 헛헛하게 빈속에서 신물이 넘어왔다. 아영은 기력을 잃어 무거워진 다리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바닥에 달라붙는 발을 겨우 옮겨 길 가 나무 아래 벤치에 아무렇게나 털썩 주저앉았다. 손에서 해방된 비닐봉지가 와르르 곁에 함께 널브러졌다. '궁지에 몰린 사람이 무슨 짓인들 못 할까...' 그러나 그것이 가족을 위한, 오롯이 아빠 혼자만의 처절한 몸부림이고 안간힘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아빠는 본인이 희생을 감수하는 대신 엄마를 재물로 이용했고, 찬혁의 어머니를 희생양으로 만들어버렸다. 사람이 죽었다. 결국엔 아빠가 죽인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찬혁의 곁을 떠나야 할 이유로 충분했다. 10년의 도피와 은둔은 속죄양이 받을 죗값으로는 부족했던 것일까. 그와 가까스로 재회한 이 시점에, 정말 말 그대로 날벼락처럼, 신화당이라는 실적이 마른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손 하나 까딱 않고 일궈낸, 참으로 경악스러운 실적이 아닐 수 없다. 찬혁의 말마따나 기가 막힌 알박이가 맞다. 게다가 절묘한 타이밍까지. 십 년간 오늘을 기다리며 몸을 사렸을 아빠가 어딘가에서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섬뜩했다. 아영은 본능적으로 주위를 휙휙 돌아보았다. 숨어서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아 등골이 오싹해졌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쩍. 쩌억. 걸음을 떼자마자 발이 땅에 달라붙었다 떨어졌다. 껌이라도 붙었나, 발을 올려 발바닥을 들어 보았다. 입에서 눅진하게 녹아 바닥으로 추락한 실타래 캔디가 납작한 단화 밑창에 붙어 있었다. 그걸 밟고 왔다. 맥이 빠져 발이 바닥에 달라붙는 줄 알았는데, 발걸음을 붙든 건 맛도 못 보고 흘린 설탕이었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이제 막 다시 꿈꾸기 시작했는데. 달력 날짜 위에 굳이 엑스를 그어가며 2달 하고도 3주가 끝나기만을 고대하고 있는데. 오늘 처음 버킷리스트도 만들어봤는데. 맛도 못 보고 놓친 설탕 과자처럼 시작해 보기도 전에 꿈이 깨졌다. 아영은 발바닥을 튀어나온 보도블록 위에 대고 박박 문질렀다. 떼어내는 건 설탕이 아니었다. 찬혁이었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영은 그 길로 도장을 찾으러 갔다. 주인은 민 대표의 도장을 인주에 찍어 확인시켜 주고 상자에 담아 주었다. 상자를 받아 비닐봉지 안에 잘 간추려 넣는 사이, 이번에는 아영의 도장이 찍힌 종이를 들어 보였다. 신박 신아영과 박찬혁의 도장. 정말 기념품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될 줄 알고 판 사람 같다. 코끝이 다시 찡 따가워졌다. 아영은 제 도장이 담긴 상자를 받아 가방 안쪽 포켓에 고이 넣고 지퍼를 꼭 닫았다. 도장 가게를 나서자 어느새 거리에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벤치에 얼마나 오래 앉아 있은 건지, 아영은 겹겹이 들린 비닐봉지 손잡이를 손목에 줄줄이 끼우고 휴대폰을 꺼냈다. "허! 벌써 저녁 8시가 넘었네!" 민 대표에게도 갤러리에서도 연락 온 게 없었다. 지금까지 연락 한 통 없었다는 게 이상했다. 특히 민 대표는 눈앞에 안 보이면 중간중간 반드시 확인 전화를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오늘은 심부름을 시켜놓고 퇴근 시간이 넘도록 전화도 문자도 없다니. 갤러리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게 분명했다. 아영은 불안해졌다. 찬혁의 폭로가 갤러리에 불러일으켰을 후폭풍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해졌다. 된서리를 맞고 초상집 분위기에 빠져있을 텐데. 그 된서리를 일으킨 뒷담화 속 핵심 인물이 다름 아닌 저였다. 잘려나갈 가해자보다 남겨진 피해자가 더 조마조마 떨어야 하는 이 상황이 아영은 기가 막혔다. 기어이 이런 꼴을 만들어버린 찬혁의 공감 200프로가 고마울 리 만무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망설이고 있을 때 다행히 민 대표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아영은 벨과 동시에 전화를 받았다. "네! 대표님! 연락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개인적인 용무도 좀 보느라 늦어졌네요. 시간이 이렇게 된 줄도 모르고..." "음. 괜찮아요. 나도 들어오자마자 처리할 일들이 밀려있어서 연락해도 못 받았을 거예요. 중간에 확인 전화 못 해줘서 미안해요." "아 아닙니다. 말씀하신 물품은 다 구입했어요. 아직 사무실에 계시면 지금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럴 거 없어요. 난 지금 집이에요. 찬혁이랑 같이 있어요?" "예? 아, 아뇨. 벌써 헤어지고 혼잡니다." "그럼 좀 더 일찍 전화할 걸 그랬군요. 저녁은 먹었어요?" "아직 안 먹었습니다." "이런. 연락이 없길래 둘이 같이 저녁 먹고 들어오는 줄 알고 난 따로 먹었는데. 어쩌나." "괜찮습니다! 잘하셨어요. 전 그럼 저녁 먹고 들어가겠습니다." "혼자? 지금 어디 있습니까?" 데리러 올 기세다. 차 키를 주섬주섬 챙겨 현관으로 나오는 슬리퍼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지금 식당에 앉아 있어요! 어. 주문한 음식이 나왔네요! 얼른 먹고 들어가겠습니다." "아, 이거 미안한데. 그럼 오늘만 봐줘요. 갤러리 일로 머리가 복잡해서 일찍 들어와 버렸더니 이런 일이 생기네." "어우, 아녜요! 미안은요 무슨! 그럼 쉬세요. 저도 이제 얼른 먹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요. 맛있게 먹어요. 조심히 들어오고." "네. 들어가세요." 휴! 아영은 휴대폰을 가방에 밀어 넣고 길가에 보이는 아무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라면을 시키려다 주춤 그만두고, 김밥 한 줄에 어묵 국물을 시켰다. 라면 곱배기를 제 것인 양 당당히 요구하던 찬혁의 그 뻔뻔한 면상이... 보고 싶었다. 너무. 좁아진 목구멍으로 넘어가지도 않는 김밥을 억지로 몇 알 씹어 삼키고 일어나야 했다. 전철 안은 다행히 한산했지만 앉을 자리는 없었다. 문가 기둥에 어깨를 기대고 아영은 종일 시달린 고단한 몸을 겨우 가누었다. 양손이 발개지도록 가득 든 짐이 보기 안쓰러웠는지, 무릎을 건드리는 비닐봉지가 신경 쓰였는지, 앞에 앉은 뿔테 안경을 쓴 남학생이 벌떡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 괜찮다고 호의를 만류할 처지가 아니었다. 종아리가 터질 것 같았다. 고맙다는 인사에 무뚝뚝하게 고개만 까딱하고 휴대폰에 다시 열중하는 남학생의 무심한 배려가 시크 했다. 얼굴이 발그레해진 걸 보니 감사 인사가 오히려 부끄러웠나 보다. 덩치는 산만 한 게 수줍어하기는. 너무 힘든 하루였다. 작고 소박한 친절의 몸짓 하나에도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영의 입가에 미소가 일었다 사라졌다. 짐을 무릎에 한가득 쌓아 올리고 좌석 등받이에 푹 기댔다. 하. 오늘 하루 처음 내쉬는 안도의 숨이었다. 편안하게 머리까지 벽에 기대고 눈앞에 서 있는 남학생의 교복을 멀거니 보고 있자니, 그날 그 시간으로 기억이 불현듯 날아갔다. 다신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을 마주한 듯, 아영은 눈을 꼭 감아 버렸다. 리나를 만난 건 두 번이었다. 처음엔 만났다기보다는 목격이었다. 다리를 다쳐 요양 차 내려왔다는 별장집 남학생이 하필 같은 반으로 전학을 왔다. 찬혁이었다. 안부가 궁금해 산책길을 올라가던 중, 고갯마루 오두막을 지날 때였다. 활짝 열린 문 안에서 찬혁이 여자와 부둥켜안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난생처음 보는 격한 몸짓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을 쳤었다. 찬혁과 가까워진 이후에도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해 묻지 못했다. 그 여자는 누구고 대체 무슨 짓이었는지. 리나를 정식으로 만난 건, 고3 겨울 방학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찬혁의 어머님 장례식장에서 막 돌아온 후였고, 장례식장을 찾은 저를 밀치며 꺼지라고 소리 지르던 찬혁의 분노한 모습이 트라우마로 남아 그 충격에서 벗어날 겨를도 없을 때였다. 리나가 학교 앞으로 찾아왔다. 오두막에서 포옹하고 있던 여자가 리나라는 사실도 그날 알게 되었다. 내내 풀이 죽어있던 저를 위로한다고 시간을 내준 영미와 성호를 교문 앞에서 먼저 보내고, 리나의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전해 들은 아빠의 만행과 비리. '왜! 대체 왜 그런 짓을! 아빠도 아냐! 사람도 아냐!' 십 년을 돌고 돌아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실체도 없는 아빠라는 사람이 아영을 다시 불행의 원점에 세웠다. 도망치고 숨느라 아무것도 가질 수도 없었다. 가진 건 포기해야 했다. 소유는 금물이었다. '십 년의 시간 동안 그렇게 텅 비우느라 잃어버린 나를 이제야 찾아보려는데, 왜 지금! 하필 왜 지금이냐고!' 있지도 않은 사람에게 악을 쓰고 있다. 제 심장이 지르는 원한이고 울분이었다. '어떻게! 사람이면 대체 어떻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순간 아영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좌석 등받이에 무너져 있던 등이 서서히 일어섰다. 등줄기가 긴장해 꼿꼿해졌다. 무릎에 쌓여있던 비닐봉지가 중심을 잃고 흐트러져 흘러내렸다. 미처 잡을 새도 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영은 잡을 생각은커녕 떨어진 것조차 감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넋이 빠진 사람 같았다. 앞에 선 남학생이 화들짝 놀라 쭈뼛쭈뼛 대신 주워 무릎에 올려주는 중에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겨우 받아 드는 손이 와들와들 떨렸다. '그러니까 어떻게... 정말 어떻게... 너는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니?' 부릅뜬 아영의 눈이 시공간을 꿰뚫고 날아가 문제의 핵심을 관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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