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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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혁은 공연히 입술을 쓰윽 쓸어 본다. 예나 지금이나 키스의 여운은 달고 길었다. 좀 전에 맛본 설탕 캔디 키스의 뒤끝처럼 아영과 나누는 키스는 매번 너무 달아 혀가 아릴 정도다. 손끝으로 입술 위를 살살 문질러 그녀의 입술을, 그 촉촉하고 진득한 감촉을 다시 모조리 불러일으켰다.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아영을 만났던 날, 어울리지도 않는 붉은 립스틱을 짙게 바른 입술에 찬혁은 변태 새끼마냥 후끈 달아올랐었다. 투명하리만치 하얀 얼굴 위에 립스틱 치덕치덕 발린 입술만 빨갛게 동동 떠 보였으니까. 순진해 빠진 얼굴에 그렇지 못한 입술을 하고 앉아있는 아영이, 그 부조화의 표상이 묘하게 심장을 간질였다. 찬혁은 돌은 놈답게 입술만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입술이 그게 뭐냐? 쥐 잡아먹고 왔어?' 꼴사나워 속에서 저절로 밉살스러운 소리가 뇌까려졌다. 당장에라도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싹싹 문대서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런 오지랖을 떨고 싶은 병적인 집착이 계속될수록 찬혁은 궁금해졌다. '그러면. 문대버리면.' 물이 올라 도톰한 저 입술을, 새빨간 꽃잎처럼 수줍게 열리는 저 입술을 손가락으로 밀어버리면. '터질까?' 찬혁은 다리를 후딱 꼬았다. 바짝. 대화 내내 아랫입술을 잘근대던 아영은 마치 작정하고 나온 여자 같았다. 도톰한 아랫입술이 작고 하얀 치아 사이에서 오물쪼물 물려 봉긋 부풀어 오를 때마다 그는 다리를 바꿔 꼬아야 했다. 그런데 그때, 거기, 창고 안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손가락이 아닌 입술로 그 꼴불견 같은 시뻘건 립스틱을 낱낱이 빨아 먹어버린 후에도 아영의 입술은 여전히 빨갰다. 물리고 짓이긴 후유증이 아니었다. 창고 문 창살 틈으로 하얗게 갈라져 들어 온 파우더 룸 불빛이 그녀의 얼굴에 얼룩말 같은 그림자를 드리울 때 그는 보았다. 컴컴한 어둠, 한 줄기 빛 속에서 붉고 투명하게 부풀어 오르던 맨 입술을. 붉디붉은 양귀비 꽃잎처럼 피어오르던. 그 골방에 아영을 팽개쳐두고 뛰쳐나와야 했던 이유는 참으로 복잡미묘했다. 다 때려 부수고 싶은 분노를 도저히 억누를 수 없어서, 그래서 차라리 도망쳐버렸다고 하기엔 가슴 안에 열점이 너무 뜨거웠다. 마침내 오랜 휴지기를 끝내고 융기하는 용암 덩어리처럼. "윤 비서." "예. 사장님." "에어컨 틀었습니까? 차 안이 왜 이렇게 덥지?" "아 아직도 더우십니까? 그럼 더 내려드리겠습니다." 앞 좌석을 넘어 훅 불어오는 한기에 흡족해하며, 찬혁은 한 번 더 다리를 바꿔 꼬아야 했다. 그런데도 헤어나올 수 없는 아영의 입술이다. '아 이 미친 새끼.' 미친놈의 집요함은 기어이 첫 키스의 아찔했던 순간, 그날, 그녀의 입술까지 소환해냈다. 유난히 더웠던 날인 걸로 기억한다. 오늘처럼 푹푹 쪘던 그 날, 여느 때처럼 아영과 방과 후 오두막 밀회를 위해 산을 올랐다. 밀회라고 해봐야 학교에서 못다 한 얘기를 나누고 시시한 장난을 쳐가며 친목을 다지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렇게 손장난이 오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깨를 밀치고, 어깨 빵은 곧 등짝 스매싱이 되고, 아프다고 엄살을 떨어대며 손을 낚아채 버리면, 후드려 팰 땐 언제고 아영이 얼굴을 화끈 붉히며 손을 파닥파닥 빼는 통에 갑자기 분위기가 묘하게 과열되곤 했다. '정말 의도치 않았다고 단연코 맹세할 수 있다!' 분위기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흐를라치면 아영은 잽싸게 오두막을 튀어 나가 산책이나 하자고 내빼버렸다. 그녀를 따라 날다람쥐처럼 산길을 오르내리던, 진도 더딘 회합이 지리하게 이어지던 어느 날. 정말 뜻하지 않게 역사가 이루어졌다. 미리 오두막에 올라가 아영을 기다렸다. 손바닥만 한 오두막 안은 산자락을 타고 부는 바람과 땅속에서 올라오는 음기에 늘 서늘하고 습했다. 찬혁은 창문과 문을 열어 눅진한 나무 향을 환기시켜놓고 데크 계단에 앉아 고갯길 아래로 목을 빼고 아영을 기다렸다. 곧 있으면 길고 차름한 생머리를 좌우로 찰랑거리며 하얀 얼굴이 언덕 위로 달처럼 떠 오르겠지. 제일 좋아하는 순간이었다. 떠오르는 아영이 매번 가슴 벅찼다. "찬혁아~ 박찬혁~!" "응?" 찬혁은 벌떡 일어났다. 초승달처럼 한 발 한 발 차올라야 할 아영의 얼굴이 산책길 위로 배구공처럼 튀어 올랐다. 축지법이라도 썼는지 한달음에 언덕을 뛰어 올라온 그녀는 집에도 들르지 않고 오는지 교복 차림 그대로였다. '자식. 그렇게 보고 싶디? 그새를 못 참겠지? 차아. 귀여운 녀석.' 책가방까지 등에 매달고 전력 질주해오는 아영의 모습에 뿌듯해하며 찬혁은 침착을 가장해 듬직하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프린스차밍 같은 우아한 손놀림에, 중2병에 뻑이 간 얼굴엔 세상에서 최고로 근사한 미소까지 지어내며. '저러고 달려와 목에 확 안겨야 이게 그림이 되는 건데.' 머릿속으론 드라마 한 장면까지 설정해 놓고, 찬혁은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그놈에 준비는 얼마나 오랫동안 했는지 백만 대군이 쳐들어와도 백전백승일 지경이었다. 찬혁은 걸음도 당당하게 데크 계단을 내려갔다. 몇 걸음 마중을 나가주는 배려까지 베풀며. "야 천천히 와! 너 그러다 또 자빠져서 무릎 깨지.. 헉!" 아영이 거짓말처럼 목에 와 안겼다. 순식간에 날아올라 목을 끌어안는 바람에 찬혁의 허리가 훅 꺾였다. 그녀의 팔에 목이 붙들려 와락 딸려갔다. "야! 너 뭐야 자식아!" 꿈이 현실로! 놀란 건 찬혁이었다. "찬혁아 어떡해! 나 어떡해!" "뭔데? 무슨 일인데? 어? 왜 이래 갑자기?" 떨어지려는 아영을 달래는 척 와락 안아버렸다. "나 붙었어! 국제 청소년 미술 공모전에 합격했어! 나 됐대! 아악~~!" 귀청을 찢는 돌고래 비명에 한쪽 안면이 마비될 것 같은 환희의 순간에도 찬혁은 어리둥절해 어쩔 줄을 몰랐다. 목에 매달려 방방 뛰는 아영을 떼어냈다. "미술? 너 그림 그렸어?" "응.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기대도 안 했거든. 그냥 경험 삼아 해본다고, 이러면서 실력 쌓는다고 한 거란 말이야. 근데 됐어! 아아악~~~!" "근데 난 왜 몰랐지? 그림 그리는 거 본 적도 없는데?" "말했잖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다고. 창피하게 그걸 어떻게 보여줘. 근데 나 잘했지! 대단하지! 그치! 그치!" 다시 팔을 붙들고 깡총 대는 아영이 너무 기특해서였을 것이다. 가슴이 벅찼다. 그래서 그랬던 것 같다. 장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으려 뻗은 손이 그녀의 이마 위에 땀에 젖은 잔머리를 하나하나 밀어 넘겨주었다. 공모전 입상의 기쁨에 들떠 이마 위를 쓰다듬는 찬혁의 손길이 데워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아영은 마냥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축하해. 축하 선물이다." "읍!" 아영의 입술을 한입 물었다. 눈을 감은 건 찬혁이었다. 만반의 준비를 거치며 벼르고 별러왔던 것 같은데 시작과 동시에 꿈결처럼 눈이 감겨버렸다. 그런 진기한 경험 중에도 찬혁은 제가 한 말이 멋있어 가슴이 뭉클해졌다. 감미롭게 서서히 눈을 떴을 때, 놀란 토끼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던 녀석이란. 그러나 뿌듯함도 잠시, 행여 아영이 가슴이라도 후드려 때릴까 봐, 밀쳐놓고 내뺄까 봐, 그래서 역사적인 순간이 씻을 수 없는 흑역사로 남을까 봐 찬혁은 덜컥 겁이 났다. 조마조마한 입을 겨우 열었다. "다시 할 거야. 피하고 싶으면 피해." "......" 아 이런 젠장! 다시 한다면서 피할 테면 피하라고 호기를 부렸다. 피할까 봐 심장이 콩알만 해져 버렸다. 찬혁은 주춤 추춤 입술로 다가갔다. 이번엔 아영이 먼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이 사이에 말려들어 가 있던 입술이 이 사이에서 만개하는 꽃잎처럼 서서히 피어올랐다. 투명하고 매끈한 입술은 발간 꽃물로 채워진 말캉한 고무풍선 같았다. 물고 터뜨리고 싶은 충동에 잇몸이 다 찌릿찌릿 저렸다. 그때 살포시 열리던 아영의 오동통한 입술. '아하. 미치겠네.' 빳빳해지는 하체로 열기가 후끈 뭉쳤다. "윤 비서." "아 네. 사장님." "에어컨 고장 났나? 세게 좀 안됩니까?" "예? 더 세게요? 아, 예!" 윤 비서의 파리한 손이 에어컨을 최저로 내렸다. 뭘 잘못 먹었는지, 먹어도 왜 하필 더위를 먹고 온 건지, 벌써 세 번째 호통이었다. 더는 내려갈 수 없는 극한의 한파 속에서 살까지 덜덜 떨어가며 윤 비서는 뒷목을 잔뜩 움츠렸다. 오늘따라 차는 왜 이렇게 막히는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호텔이 천 리 길만 같았다. 도착도 전에 얼어 죽게 생겼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핸들을 움켜쥐었다. 빙하기에 앉아 말초신경부터 얼어붙고 있는 윤 비서가 와들와들 고개를 들어 백미러로 뒷좌석을 힐긋 넘겨다 보았다. 찬혁의 얼굴이 벌겠다. 아직도 더운 거야?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서릿발 같은 냉기가 앞 좌석을 넘다 말고 한풀 꺾여 시원섭섭하게 불어왔다. 찬혁은 제 속에서 터져버린 열증을 애꿎은 에어컨 탓으로 돌려놓고, 다리를 반대로 꼬았다. 냉 샤워가 시급했다. 냉탕에 얼음까지 띄우고 반신욕을 해야 할 판이다. '이러니 내가 너 때문에 미쳐 안 미쳐. 공감 능력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 사정엔 눈곱만큼도 공감 못 하는 놈이.' 찬혁의 화풀이가 에어컨에서 아영에게로 날아갔다. 제 앞가림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아영이, 제 처지가 지금 어찌 돼가는지는 안중에도 없으면서 남 걱정한답시고 기어이 입을 꾹 다물어 버리고 마는 아영이 가슴에 사무쳤다. 그 걱정이 온통 저 때문이라서, 아영의 공감의 발현이란 결국 도망이어서, 찬혁은 너무 아팠다. 그렇게 좁힐 듯 멀어지는 거리를 다시 좁히며 위태롭게 아영을 쫓고 있다. 아직은. 찬혁은 뭐가 번뜩 생각난 사람처럼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다. 후끈 달아오른 뒷좌석 공기가 일순 냉하게 식었다. "성호야. 나다." "어~ 안 그래도 전화 한번 하려고 했지! 영미가 너무 좋아하더라. 고마워 죽을라 그런다 아주. 영미 고모 거기 포차 거리에 전통주점 여신 댄다.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영미가 아주 난리야. 니가 웬일이냐? 남 사정도 다 살필 줄 알고? 철들었네! 박찬혁이! 사랑의 힘이냐?" "사랑의 힘 같은 소리 한다. 힘들어 죽겠구만." "왜. 뭐가 잘 안돼? 아영이가 속 썩이디? 이 형이 뭐 좀 도와줘 봐?" "미친놈. 사랑은 소녀경에서나 배운 모태 솔로 주제가 까분다 또. 아 됐고. 뭐 하나만 알아봐 줘라." "뭐. 또 사람 찾으라고? 내가 이산가족 상봉 도우려고 형사 된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딴 건 이제 흥신소에 맡겨 자식아." "그런 거 아니고. 사건 기록 하나만 확인해줘." "사건? 뭐냐 이거. 왜 갑자기." "안전거리 좀 없애보려는데." "누구 하나 또 깨지는 거냐? 누군지 볼만하겠다. 말해. 무슨 사건." "정애라." 차 안이 순식간에 쨍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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