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애라? 애라 씨? 너 아영이 찾겠다고 대학 때 전국에 있는 미술 동아리란 동아리는 죄다 찾아다니면서 남에 동아리방 전전할 때 만났던 그 친구? 자살로 종결되지 않았나? 그걸 뭐 하러 다시 봐?"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는데. 그냥 다시 확인 좀 해줘."
"알고 싶은 게 뭐야."
"다."
"급한 거야?"
"가능한 한 빨리 부탁한다."
"흠. 너 불안 불안하다. 내 촉은 못 속여. 뭐 있다 너. 내가 도와줄 게 정말 그게 다야?"
"어. 다야. 확인한 거 알려만 줘."
"무슨 짓 저지르기 전에 보고 먼저 한다고 약속해. 지난번처럼 낙원 꼴 내지 말고. 안 그럼 국물도 없어. 약속하라고 얼른?"
"아 알았다고. 이제 됐냐?"
"요즘 비상 걸려서 좀 바쁘다. 며칠만 기다려."
"그래. 고맙다. 수고해라."
찬혁은 성호와 통화를 마치고 휴대폰을 안주머니에 넣다 말고 도로 꺼냈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역시나 아영에게선 문자 한 통이 없었다. 인사동 길 한복판에 꿀 먹여 벙어리로 만들어 세워놓고 그냥 와버렸다. 오후 일정을 미뤄가며 따라 다니느라 스케쥴이 바짝바짝 밀려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뒤 한번 돌아볼 겨를 없이 급히 자리를 떴다. 그러고 남겨졌으면 문자로 쌍욕이라도 날리던가. 또 어딘가에 찌그러져 눈물 콧물 찍어내며 혼자 곱씹고 있는 거 아니냐 너. 기껏 울려 놓고 걱정하는 건 또 무슨 불치병인지, 제 심술이지만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혹시나 하다가 결국 역시나 하면서도 찬혁은 아영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답장이라도 해주길 바라며. 그런 의미에서 한 통 보내기로.
[잘 들어갔어? 너 도와주느라 뒤에 내 스케줄 다 꼬였다. 완전 개판으로. 그거 하나하나 해결하느라 나 아직 저녁도 못 먹었어. 책임져라. 지금. 호텔로 올래? 룸서비스 부르게.]
띠링~
아영은 비닐봉지 손잡이를 손목에 줄줄이 끼우고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
"미친! 네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졸졸 쫓아다니면서 사람 약만 바짝 올려놓고? 짐을 들어주길 했어? 뭘 했어? 그래 놓고 길바닥에 버리고 가버릴 땐 언제고 어딜 오라고? 호텔? 룸서비스? 제정신이니? 이 저질!"
아영은 휴대폰 화면에다 대고 왕왕 대들었다.
띠링~
찬혁의 문자가 화답했다.
[싫으면 말고. 열 받는다고 화면에 입 갖다 대고 씩씩대지 마. 흥분돼. 지금 뭘 어쩌라고 자식아.]
"허! 뭐야?"
아영은 마치 도청이라도 당하는 사람처럼 소스라치게 놀라 엘리베이터 안을 휘휘 돌아보았다. 팬트하우스 전용 엘리베이터였다. 그럴 일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꿰뚫어 보고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찬혁이 아닌가. 장난을 치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아영은 매의 눈으로 천장 구석구석을 살폈다.
"어디로 뭐가 보이는 거야?"
CCTV까지 의심의 눈초리로 노려보게 만드는 섬뜩한 답장을 보내 놓고 키득대고 있을 찬혁을 떠올리자 가라앉혀 놓은 열불이 다시 뻗치기 시작했다. 아영은 날숨을 푸! 거칠게 내쉬었다. 이마에 흐트러진 잔머리가 훅 날렸다.
띠링~
아영이 다시 화들짝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오늘 내 덕에 재밌었지. 실타래 캔디도 먹어보고. 앞으로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추접스럽게 가게 앞에 그러고 서 있지 말고 재깍 말해라. 오빠가 다 사줄게.]
"오빠는 무슨. 치이."
[그리고. 오빠만 믿어. 아무 걱정하지 말고. 나 아니면 누가 널 챙겨. 안 그래?]
"뭐 자꾸 오빠래. 유치하게."
입술이 씰룩 웃으려 꿈틀대다 말았다. 다시는 찬혁의 유치한 말장난에 휘둘리지 말아야지 맘을 단단히 먹어보지만, 매번 실패했다. 영원히 실패할 미래도 아영은 예언할 수 있다. 찬혁이니까. 믿고 싶고, 걱정도 놓아버리고 싶다. 누가 누굴 챙긴다는 건지. 길바닥에 버리고 가는 인간의 헛소리일망정 아영은 그래 주길 간절히 바랐다. 조금만 더 참고 저를 봐주길. 기다려주길. 리나와의 담판이 끝날 때까지만. 스스로 비밀에서 빠져나와 당당히 모든 것을 밝힐 수 있을 그 순간까지만. 제발.
아영의 손가락이 OK 이모티콘 위에서 주저주저 망설이는 사이 굿나잇 멘트가 날아왔다.
[분명히 말했다. 삼자대면이라고. 나 몰래 혼자 리나 만날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라고. 그랬다가는 가만 안 둬. 새겨들어. 그럼 잘 자라. 내 꿈 꾸고.]
"허! 귀신! 꿈에 나올까 무서운 인간!"
속내까지 간파해버린 찬혁이었다. 아영은 속을 들켜버린 흥분과 긴장으로 벌렁대는 심장을 가눌 길이 없었다. 휴대폰을 가방 안에 쑤셔 넣어 버렸다.
띠리링 띠리링~ 띠리링 띠리링~
"확인 전화까지 해야겠니? 너 정말! 어머!"
찬혁인 줄 알고 발끈하다 말고 재빨리 태세를 전환해 공손하게 전화를 받았다. 민 대표였다.
"네! 대표님!"
"아영 씨 너무 늦네? 어디예요? 데리러 갈게요."
"지금 올라가고 있어요! 엘리베이터 안입니다."
"아 그래요. 아까 데리러 갈걸. 안 와서 걱정했어요. 그럼 올라와요."
"네. 올라가서 뵐게요."
휴대폰을 가방에 도로 넣으며 아영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빨간 불이 숫자 위를 징검다리 건너듯 옮겨가고 있었다. 25. 26. 27. 건너 뛸 숫자가 8개 남았다. 다행히 팬트하우스 전용 엘리베이터를 중간에 붙잡을 사람은 없었다. 이 건물에 살면서 그거 하나는 맘에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민 대표와 동거인 관계가 된 이상 아침저녁으로 이용할 수밖에 없는 엘리베이터다. 위장 전입이라는 말 못 할 속사정 때문에 일거수일투족이 부자연스러워지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이웃 주민과 엘리베이터에서 원치 않는 대면을 하고, 인사를 나누고, 불필요한 말을 섞어야 한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띵~
응? 아영의 두 눈이 엘리베이터 문 위에 일렬로 서있는 숫자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30 위에서 징검다리 뛰기가 멈췄다. 그럴 리 없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육중한 쇳소리를 내며 서서히 열렸다. 전에 없던 일이라 소름이 끼쳤다. 반사적으로 뒤로 한걸음 물러나 닫힌 버튼 위에 손가락을 대기한 채, 기다렸다. 엘리베이터 불빛이 카펫처럼 바닥에 깔렸다. 그만큼 밖은 캄캄했다. 열린 문 앞엔 아무도 없었다.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확인할 용기는 죽어도 없었다. 아영은 닫힌 버튼을 눌러버렸다. 꾹꾹꾹꾹. 서서히 닫히는 문이, 단 몇 초의 시간이 영원처럼 길었다. 닫히려는 순간 손 하나가 쑥! 치고 들어올 것만 같았다. 극도의 공포를 조장하며 문은 마지막까지 공포스럽게 닫혔다. 아영은 숫자 위를 다시 건너뛰는 빨간 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뛰어내릴 참이었다. 보이지 않는 뭔가가 30층에서부터 엘리베이터 밑에 붙어온 것만 같았다. 발바닥에서부터 소름이 쉴새 없이 밀고 올라왔다. 35층.
띵~
"아악!"
문이 벌어지자마자 손 하나가 불쑥 튀어 들어왔다. 뒤로 와다다 넘어질 듯 물러나며 아영이 비명을 질렀다.
"아영 씨! 왜 그래요! 괜찮아요?"
"... 대표님?!"
"아 이런. 손 보고 놀랐어요? 미안해요!"
민 대표가 사색이 되어 달려 들어왔다. 손에 바리바리 들린 짐을 가져가 아영의 손을 자유롭게 해준 후 그녀를 부축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손을 왜 집어넣고 그러세요! 심장마비 걸릴 뻔했잖아요!"
"놀라게 하려고 그런 게 아닌데, 미안해요. 하도 안 와서 기다리는 내내 몸이 달아있었나 봐. 문틈으로 아영씨 보이는데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그만 손이 먼저 앞섰네. 들어갑시다. 이제 좀 진정이 돼요?"
거듭 미안해하며 민 대표가 아영을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현관에 들어서자 그제야 등 뒤에 따라붙던 뭔가가 차단된 것 같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있었다.
"이제 괜찮습니다. 아하. 놀래라. 아까 30층에서 갑자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바람에 너무 무서워서 바짝 긴장하고 있었거든요."
"30층에서? 음. 간혹 그럴 수 있죠. 기계도 어쨌거나 사람의 손을 거친 물건이니까. 아니면 누가 실수로 눌러놓고 옆의 거 타고 올라갔거나."
별스럽지 않게 반응하며 민 대표가 응접실 테이블 위에 구입 물품을 쏟아부었다. 그의 말은 전적으로 일리가 있었다. 밤이고 혼자 겪은 일이라 공포가 엄습했나 보다. 공포 영화를 그만 봐야 할 것도 같고. 아영은 안도했다.
"이야~ 도장! 아영 씨 이거 진짭니까?"
아영이 곁으로 다가갔다.
"이게 진짜 있어요?"
"네. 저도 벼락 맞은 박달나무가 있을 줄은 몰랐어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야 이거. 귀한 물건인데? 덕분에 두고두고 간직할 물건이 생겼네요. 고마워요."
"없는 줄 아시면서 그 물건을 구해 오라고 시키신 이유가 혹시..."
"아... 눈치챘을 거로 생각했어요. 맞아요. 좀 시끄러웠어요. 갤러리 내부 분란 아영 씨한테 보이기 싫었거든."
"전 분명히 괜찮다고 말씀드렸는데 왜 그러셨어요? 이제 전시회까지 겨우 두 달 남았는데요."
"내가 말했죠. 오래전부터 곯아 온 일이라고. 진작 처리했으면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죠."
정애라! 아영은 민 대표가 언급한 그런 일이란 게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찬혁의 말이 맞았다. 제 앞에 뭐가 있는지 한 치 앞도 못 보면서 남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단지 악의 없는 수다였다 항변한다 해도 사람이 죽었으니까. 유능한 재원을 잃은 민 대표로선 어찌 됐든 그들에게 도의적인 책임을 물어야 했을 테지. 아영은 이쯤에서 절대 제 의견을 피력하지 않기로 했다.
"아영 씨가 신경 쓸 일 아니에요. 다들 유능한 직원들이니 아영 씨 작업하는데 전혀 차질 없을 겁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네. 잘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올라가 보겠습니다. 오늘 유난히 피곤한 날이네요."
"그래요. 오늘 정말 고생했어요. 특히 도장!"
민 대표는 도장을 치켜들고 다시 한번 감격에 겨운 얼굴로 해맑게 웃었다. 트로피라도 되는 양.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아영도 흐뭇하게 웃었다.
"올라가 봐요. 아. 피곤했을 텐데 샤워하고 한 잔 쭉 마시고 자요. 푹 잘 수 있을 거예요. 달달 한 피로회복제. 내 특효 음료거든. 잘 자요."
"아 네. 감사합니다. 그럼 안녕히 주무 세요."
아영은 민대표가 냉장고에서 꺼내 준 텀블러를 받아 들었다. 자신의 음료가 든 잔을 들어 아영의 손에 들린 텀블러를 가리키며 건배 시늉을 하고는 그가 음료를 쭉 들이켰다. 아영도 예의상 텀블러를 들어 보이고, 이 층으로 냉큼 올라왔다. 갈증이 나던 참이었다. 침대에 털썩 앉자마자 텀블러 뚜껑을 열고 한 모금 맛을 봤다.
"꿀물인가?"
달짝지근한 음료가 시원하기까지 하니 꿀꺽꿀꺽 잘도 넘어갔다. 한잔을 쭈욱 비워 내고 입을 쓰윽 닦았다. 효과는 바로 따라왔다. 신기했다. 피로감이 해소되자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샤워고 뭐고, 아영은 침대에 모로 누웠다.
"잠시만 이러고 있자... 아... 좋다..."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 정신이 아득해졌다. 천 길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환각에 빠졌다. 짜릿했다. 그런데도 몸은 천근만근 나른하고 무기력하기만 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끝을 까딱하려던 의지마저도 잠 속으로 훅 빨려 들어갔다. 캄캄한 잠. 미미하게 살아있는 청각만이 제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슥 슥 슥
꿈결처럼 아련히 들리는 발소리. 꿈속에서 누군가가 아영의 뒤를 쫓고 있었다.
"... 누구.. 세요...."
슥 슥 슥
"......"
청력마저도 곧바로 저승 잠에 잠식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