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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슥 슥 슥 "... 누구..." 슥 슥 슥 "... 아... 거기 누구세..." "아영 씨." "......?" "아영 씨?" 아영의 눈이 번쩍 떠졌다. 다 뜬 줄 알았다. 게슴츠레 떠진 눈꺼풀을 힘주어 껌뻑였다. 뭐지? 발소리가 제 이름을 불렀다. 반쯤 열린 창으로 아침부터 열기가 후끈 끼치고 있었다. 꿈과 현실 사이에 애매하게 걸려 있던 정신이 확 깼다. "아... 꿈이었네..." 활짝 열린 커튼 때문에 따가운 아침 햇살이 여과 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영은 겨우 반쯤 떠진 눈을 찡그렸다. 밤새 얼굴 없는 발소리에 쫓기느라 잠을 잔 것 같지도 않았다. 민 대표의 특효 음료가 무색하게도, 전날 찬혁에게 시달린 피로감 위에 악몽의 후유증이 켜켜이 쌓여버렸다. 아영은 동공을 찌르는 태양을 피해 돌아누웠다. 똑 똑 똑 똑 "아영 씨!" "허!" 아영이 용수철처럼 벌떡 튀어 올랐다. "네! 대표님!" "아영 씨 일어났어요? 괜찮아요? 출근 시간이 다 됐는데 기척이 없어서 올라와 봤어요. 나갈 준비 됐죠? 들어가도 돼요?" "벌써요! 어머!" 아영이 침대에서 후다닥 일어나 침실 전용 응접실 문으로 달려갔다. "아뇨! 들어오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문고리를 쥐고 있던 민 대표의 손이 물러갔다. "아 이런. 미안해요. 그럼 마저 준비하고 내려와요." "네! 죄송합니다!" 슥 슥 슥 "......" 그의 슬리퍼가 대리석 바닥을 스치며 멀어져 갔다. 아영은 재빨리 욕실로 들어갔다. "완전히 기절해버렸네! 이런 적 한 번도 없었는데! 웬일이야…!" 주경야독의 아이콘이었던 아영이 신처럼 믿고 의지했던 건 다름 아닌 제 정신력이었다. 신도 저버린 운명이 믿을 구석이라곤 그게 전부이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무너져 버리면 갈 곳은 딱 정해져 있었으니까. 옥상. 벼랑 끝. 다리 위. 밀린 과제를 할 때도, 졸업 전 준비 때도, 공모전 때도, 경아의 배신으로 제 앞에 떨어진 빚까지 갚느라 날밤을 새워가며 의뢰 작을 그릴 때도 없었던 기절이었다. 정말 기절초풍을 할 일이었다. 내일모레면 삼십이라는 나이를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누가 그런 속 모르는 소릴 했을까. 중력을 거스르던 젊음이 속절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거운 몸을 빠릿빠릿 재촉해가며, 아영은 세면대 수도꼭지를 쏴아 틀었다. "허!" 거울에 비친 제 몰골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기암을 토했다. 화장도 안 지우고, 고양이 세수도 못 하고 그냥 뻗어버리다니! 물만 찍어 바르고 나가기엔 꼴이 너무 처참했다. 아영은 하는 수 없이 민 대표에게 양해를 구해야 했다. 응접실로 나가 아래층 응접실로 전화를 돌렸다. "아 저기. 대표님. 죄송한데요. 오늘은 제가 조금 늦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어디가 불편해요? 아파요?" "아니요. 어제 좀 많이 피곤했던 것 같습니다. 준비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요. 먼저 출근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이거 미안한데요. 어제 내가 너무 부려먹었나 보네. 그래요. 먼저 갈 테니 천천히 준비하고 나와요. 월차는 안되고 반 차는 내줄 테니, 좀 더 누워있다 와요." "아, 예. 감사합니다. 그럼 오후에 뵐게요." "점심 같이할 수 있을까?" "미리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이따 봅시다." "네." 수화기를 내려놓고 아영은 그대로 소파에 털썩 쓰러졌다. 시간 여유만큼이나 긴 안도의 한숨이 휴우 터졌다. 그 자세로 누워 오전 시간의 활용방안을 진지하게 계획했다. 기절 덕분에 공으로 떨어진 황금 같은 개인 시간을 매우 유용하게 쓰기로 했다. 리나를 만나기로. 금요일 삼자대면이 바로 내일로 다가왔다. 리나를 혼자 만나면 가만두지 않겠다던 찬혁의 엄포는 아영의 조바심을 한층 가중시켰다. 마음이 급해졌다. 다시 벌떡 일어나 침실로 들어갔다.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리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단호한 마음과 달리 손끝이 달달 떨렸다. 몇 번의 통화음 끝에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갔다. 벼르고 별러놓고 막상 통화가 불발되자 안도감이 밀려왔다. 마음의 준비가 더 필요한 것 같았다. 그러나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아영은 재발신을 대신 문자를 찍었다. [나야. 신아영. 오전에 좀 만났으면 해. 우리 아빠에 대해 궁금한 게 있거든. 네가 나보다 우리 아빠를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길래. 시간 내길 바란다.] 메시지를 전송하고 아영은 휴대폰을 얼른 가방에 넣어버렸다. 당장에라도 리나의 전화가 득달같이 걸려올까 무서웠다. 그러나 이젠 피할 수도 숨어서 숨 고르기도 더는 할 수 없게 되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띠링~ 휴대폰을 퍼뜩 꺼냈다. 리나의 답이었다. [이런 날이 생각보다 늦게 왔네. 그냥 넘어가 줄랬더니, 굳이 알아야겠다는데 누가 말려. 12시 전까지 갤러리에 있을 거야. 알고 싶은 게 뭔진 몰라도, 들을 자신 있거든 와. 난 언제든 환영이야.] 리나의 당당함에 심장이 철렁 무섭게 떨어졌다. 그동안 알고 있었던 아빠의 비리가 그게 다가 아닌 모양이다. 떨어야 할 사람은 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제 손에 들린 휴대폰이 덜덜덜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아영은 판도라의 상자를 잘못 건드린 것 같은 낭패감에 빠져 버렸다. 그러나 찬혁과 같이 뚜껑을 열 자신은 없었다. 서둘러 채비를 했다. 한빛 갤러리 내부는 내일 있을 자선 인의 밤 파티 준비로 입구부터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혼잡스러웠다. 대표부임 후 주최하는 첫 행사라더니, 리나가 후원금에 거는 기대가 얼마나 원대한지를 가히 짐작게 했다. 아영은 바로 프론트 데스크로 다가갔다. "어서 오십시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채리나 대표를 만나러 왔는데요." "아. 신아영 님 되시나요?" "예." "올라가십시오. 7층. 우측 복도 끝 방입니다." "감사합니다." 아영은 인부들을 요리조리 피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으로 올라갔다. 우측 좌측 따질 것도 없이 7층엔 방이 딱 하나뿐이었다. 7층 전체가 리나의 놀이터 같아 보였다. 온갖 골동품과 기원을 가늠할 수조차 없을 만큼 유구해 보이는 엔틱 소품들이 빼곡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독특한 취향을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한마디로 허영심과 자부심의 극치를 제대로 과시하고 있었다. 아영은 유럽의 어느 고성 복도에 서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육중한 철문 앞에 섰다. 똑 똑 똑 "네. 들어와요." 심호흡을 크게 몰아 쉬고 안으로 들어갔다. 리나가 소파 상석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정말 왔네? 생각보다 배짱 좋은데? 뻔뻔한 거는 니네 집안 내력이라 알았다만." 첫마디부터 싹수가 노랬다. 순간 노란 떡잎이 리나인지 저인지 아영은 혼란스러웠다. "벌서니? 앉아." 아영은 용기를 끌어모아 리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본론만 말할게. 시간 끌지 말자." "바라던 바야. 봤겠지만, 너한테 내줄 시간 없거든. 알고 싶은 게 뭐야." "우리 아빠에 대한 거. 십 년 전에 날 찾아와서 네가 알려준 그 모든 사실. 그때 넌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야?" "난 또 뭐라고. 그게 왜 중요하지? 설마 내가 지어내기라도 했을까 봐?" "그런 의심 없다고 말 못 하겠다. 그러니까 사실대로 말해줘." "그런 얘기 너한테 굳이 할 필요도 없지만, 네가 말도 안 되는 소설 꾸며내서 찬혁이 홀릴까 봐 말해준다. 우리 엄마랑 찬혁이 어머니, 두 분 둘도 없는, 친자매보다 더 가까운 사이셨어. 없으면 죽고 못 사는 언니 동생 사이. 오죽하면 찬혁이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 엄마 앞으로 유서를 다 남기셨을까. 찬혁이 잘 부탁한다고. 찬혁이 재산 잘 좀 지켜달라고." "... 그게 우리 아빠랑 무슨 상관인 거야." "유서 안에 너희 가족의 만행이 세세히 기록되어 있었거든. 너희 아빠의 빅 픽쳐 말이야. 우리 엄마가 그 사실을 알고 완전히 패닉에 빠지셨었거든. 사랑하는 동생이 목숨을 끊은 이유. 너희 가족. 참 뻔뻔한 게, 그래 놓고 너희 아빠가 어떻게 했는 줄 알아?" "......" 아영은 할 말을 잃었다. 더는 묻고 싶은 것도 없었지만, 있다 해도 물을 의지마저도 잃고 말았다. 인간말종의 팩트는 팩트일 뿐이었다. 파헤치겠다고 손을 대자 구정물만 솟구쳤다. 아영은 토악질이 날 것만 같았다. "벌여놓은 거 다 접고 순순히 물러나는 대가로 돈을 요구했더라고. 네 아빠란 사람이. 사기 협박으로 당장이라도 고소 고발하고 싶었지만, 그때 우리 엄마랑 나는 오직 찬혁이 보호할 일념뿐이었거든. 안 그래도 상처투성이인 찬혁이가 네 가족의 파렴치한 만행 때문에 언론에 가족의 흑역사까지 까발려지는 거 원치 않았다고. 알아?" 아빠의 실체는 상상을 초월했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걸. 기어이 제 무덤을 파고 아영은 그 자리에 누웠다. 차라리 이대로 영원히 눈을 감고만 싶었다. "이제 됐니? 이게 네 뿌리고 근원이야. 네가 무슨 꿍꿍이를 하고 뻔뻔하게 날 찾아왔는지는 모르겠다만, 난 우리 엄마처럼 호락호락하게 돈 안 줘. 못 줘. 그러니까 찬혁이 핑계로 돈 요구할 생각이라면, 그만 꺼져줄래. 또다시 사기 협박범 되긴 싫잖아. 사기 협박도 유전인가 봐. 안 그러니?" "하아!" 아영은 눈물을 삼켰다. 아랫입술이 이 사이에서 짓이겨져 찝찔한 피비린내가 혀끝에 감돌았다. 더는 못 버티고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리나는 자선 파티 주최자답게 마지막 적선도 잊지 않았다. "그것만 아니라면 언제든 도와줄 의향 있어. 상부상조 아직 유효하거든. 갤러리 대 작가로. 난 공과 사는 확실한 사람이야. 도움 필요할 땐 언제든지 연락해." "고맙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갈게." 다 짓밟힌 자존심을 그 한마디로 겨우 살려놓고 아영은 힘겹게 돌아섰다. 눈물이 맺혀있지 못하고 흘러내렸다. 무릎이 와들거려 하마터면 소파에 볼썽사납게 주저앉을 뻔했다. 가까스로 몸을 가누고 나가려는데 육중한 철문이 엄청난 힘에 벌컥 열렸다. 열리는 문을 피하느라 아영이 휘청 뒷걸음질 친 순간, 정신 차릴 겨를도 없이 눈앞에 섬광이 번쩍 터졌다. 아영이 얼굴을 감싸고 바닥에 넘어졌다. "이 년이니? 내 동생 죽인 년 딸이?" 난데없이 얼굴을 후려친 여자의 정체를 알게 된 충격에서 헤어나오기도 전에 아영은 때아닌 돈벼락을 맞았다. 머리를 후려치는 돈다발이 낱장 낱장 날아가 흩날렸다. 카펫 위에, 머리에 쌓였다. "거지 같은 년! 근성이 틀려먹었어! 이 망할 년! 그 아비에 그 딸 아니랄까 봐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찾아와 어? 자! 자! 먹고 떨어져! 자! 돈!"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찬혁이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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