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다발을 들고 아영의 머리를 후려치던 김 여사의 손이 찬혁에게 턱 낚아채여 뒤로 홱 돌아갔다.
"악! 내 팔! 자네! 이 보게! 박 서방! 이 손 좀! 아야야야!"
"이게 뭣들 하는 짓입니까! 채 리나 너 정말 이것밖에 안 되는 놈이었어!"
박 사장이 박 서방으로 둔갑해버린 호칭에 찬혁의 이마가 와락 구겨졌다. 이런 비인간적인 만행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는 근저에 자리 잡은 야욕을 드디어 봐버렸다. 김 여사의 오랜 염원이 부지불식 간에 입 밖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찬혁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려 애원을 하면서도 김 여사의 다른 손은 아영을 한 대라도 더 치겠다는 일념으로 허우적댔다. 제대로 보여줘야 할 쇼였다.
"이 손 좀 놓으래도! 이참에 저 파렴치한 년을 당장에 내쫓아버릴 거야!"
"여기 박 서방이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을 바닥에 눕혀놓고 뭐 하자는 겁니까 대체! 이러고도 파렴치하다는 소리가 나옵니까? 지금?"
"아니 박 사장! 지금 나한테 그게 할 소린가?"
찬혁이 김 여사의 손목을 뒤로 내던져버리고, 몸을 일으키는 아영에게 달려갔다.
"어머머머! 아야야야!"
"엄마!!"
김 여사가 와다다 뒷걸음질 쳐 주저앉았다. 소스라치게 놀란 리나가 달려가 부축해 자리에 앉혔다.
"엄마! 괜찮아? 일어나봐 엄마!"
혼절이라도 하려는지 이마를 누르는 연기는 너무도 그럴싸해 리나마저도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혼신의 연기 중에도, 아영을 끼고도는 찬혁의 꼴이 기가 막혀 김 여사는 어금니를 악다물었다.
김 미자. 호텔 업계 부동의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파라다이스 그룹의 안주인. 지금은 저세상 사람이 된, 정신분열증으로 오락가락하던 그 여자 곁을 그림자처럼 지키며 리나를 찬혁과 정략결혼 시키려고 총력을 기울였다.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찬혁이 문제를 일으켜 학교를 옮길 때마다 리나도 메뚜기처럼 학교를 건너뛰어 다녀야 했다. 그렇게 각고의 노력을 쏟아부었는데, 시골에 요양 간 그 틈에 찬혁에게 성가신 껌딱지가 하나가 붙어버렸다. 겨우 떼어 놨더니 기어이 나타나? 다 된 밥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리나의 처지가 닭 쫓던 개 신세로 전락할 판이다. 까맣게 타들어 간 속앓이가 저절로 김 여사 입에서 어구구 터져 나왔다.
아영을 부축해 일어선 찬혁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서슬 퍼런 두 눈이 경멸에 가득 차 있었다. 경악한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리나와 김 여사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이게 아닌데! 찬혁이 달라졌다. 순간 리나의 등골을 따라 싸늘한 한기가 훑고 올라왔다. 증오와 혐오가 찬혁의 눈동자를 기묘하게 집어삼키고 있었다. 악의 화신으로 우뚝 일어섰다. 리나는 흔들리는 정신 줄을 부여잡았다. 믿는 구석이 있으니, 돌파구는 늘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 시커먼 아우리를 뿜어내는 그는 공포 그 자체였다. 찬혁이 이사이로 짐승처럼 낮게 으르렁댔다.
"분명히 경고했지! 나 만나기 전에 아영이 만나면 가만 안 둔다고! 그런데 이렇게 한다 이거지 지금. 이거 보여주려고 나 불렀나? 잔머리 이따위로 굴리지 너! 어!"
아영의 눈앞이 하얘졌다. 찬혁의 등장은 이 비극의 엔딩씬이었다. 리나가 꾸민 각본은 언제나 이처럼 한 치의 오차도, 극적 반전도 허용하지 않고 전개되었다. 리나가 터뜨릴 결말은 불 보듯 뻔했다. 돈을 챙겨 잠적해버린 아빠를 폭로할 테지. 삼자대면은 아영에게 또 하나의 치욕만 남긴 채 끝날 것이다. 아영은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찬혁의 팔을 뿌리쳤다. 그러나 찬혁은 절대로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영의 허리가 찬혁의 팔에 감겨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품에 끌어안고 찬혁이 온몸으로 냉기를 훅훅 뿜어내고 있었다.
"채 리나가 결국 사람을 돌아버리게 만드네. 이거 다 감당할 수 있겠어? 준비됐다 이거지."
"찬혁아 너 나한테 이러면 안 돼! 지금 그 소린 내가 아니라 신아영이 들어야 할 소리야! 삼자대면을 어긴 건 내가 아니라 신아영이라고! 막무가내로 쳐들어오겠다는 걸 그럼 어떡해? 난 기껏 모른 척 숨겨줬는데, 비밀에 부쳐버리고 싶은데, 굳이 자기 아빠를 들먹이면서 찾아온다는 걸 난들 어쩌란 말이야! 넌 만나지 말라고 하지, 쟤는 오겠다고 벼르지, 그럼 내가 중간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해? 이러니 내가 어떻게 널 안부를 수 있겠냐고! 안 그래?"
리나는 휴대폰을 꺼내 아영의 문자 메시지까지 열어 보이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 놓고 찾아와서 한다는 소리가 돈 달래! 돈!"
기암을 토하느라 아영의 턱이 덜커덕 떨어졌다.
"우리 엄마가 쟤 아빠한테 뜯긴 돈이 얼만데!"
아영은 필사의 힘을 다해 찬혁을 밀쳐내고 방을 뛰쳐나가 버렸다. 그와 동시에 방안에서는 리나의 눈물 연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아영은 이제야 깨달았다. 제가 빠진 함정은 모래 늪이었다. 빠져나가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가라앉을 뿐이었다. 애초에 그 수렁을 파놓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저를 구덩이에 밀어 넣고 아빠는 사라져버렸다. 다 밝히고 사죄하고 죗값을 받아야 할 사람이, 그렇게 해서 저를 이 수렁에서 건져줘야 할 사람이 종적을 감췄다. 온갖 오물을 뒤집어쓴 채 늪 속으로 가라앉아도 건져줄 사람이 없다. 악다문 입에서 흐흐흡 울음이 터졌다. 돈벼락에 치를 떠느라 온몸에 일었던 경련이 여전히 아영의 사지를 무기력하게 했다. 겨우 내달려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닫힘 버튼을 미친 듯 눌러댔다.
철컹!
찬혁이 닫히는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벽에 의지에 겨우 버티고 서있는 아영에게 성큼 다가왔다.
"아영아.."
"나가 줘... 나 좀.. 혼자 있게 해줘... 나 좀... 울게 내버려둬 제발... 미칠 것 같아... 죽을 것 같다고... 나 좀... 어떻게 좀 해줘... "
가슴을 움켜쥐고 구석으로 뒷걸음질 치는 아영을 찬혁이 와락 끌어다 가슴에 안았다. 종이 인형처럼 펄럭 딸려와 맥없이 안기는 아영을 온 힘을 다해 끌어안았다. 흐느끼는 아영의 머리를 감싸 안고, 찬혁이 비상 정지 버튼을 눌렀다.
철컹!
엘리베이터가 공중에 매달렸다.
"여기서 울어. 내 품에서."
아영이 온몸으로 울었다. 찬혁은 그녀의 처절한 몸부림을 온몸으로 부둥켜안았다.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공감 이백프로의 분노가 찬혁을 집어삼켰다. 이를 악물었다. 아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
찬혁은 아영을 차에 태웠다. 달리는 내내 그녀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던 경련은 잦아들었지만, 눈물은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쉴새 없이 흐르고 또 흘러내렸다. 찬혁은 초점 없는 눈으로 차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아영을 돌아보았다. 고개를 돌렸다. 전방을 주시하며, 손을 뻗어 볼에서 눈물을 걷어냈다. 아영은 미동조차 없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품에 안겨 집에 가고 싶다고 흐느끼던 아영이었다. 찬혁은 그녀를 데리고 일산 집으로 왔다. 그년가 돌아갈 집은 없었다. 그런데도 집에 가고 싶다고 흐느끼는 아영이 가슴 아팠다. 찬혁은 알았다. 그녀가 말하는 집이란 산꼭대기 반지하 방도, 호텔도 아니라는 것을. 민 대표의 팬트하우스는 더더욱 아니어야 했다. 아영의 집이란 다름 아닌 안식. 그 추상의 안락함과 평온함 일 테니. 그게 제품 이길. 찬혁은 믿고 싶었다.
"... 여긴 어디야..."
차고로 들어가는 차 안에서 아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마른 낙엽처럼 메말라 갈라지고 부서졌다.
"집. 우리 집."
"......"
차고 문이 닫히자 실내 등이 팟팟 켜졌다. 시동을 끄고 찬혁이 돌아보았다. 아영이 맥없이 돌아보았다. 고개를 돌리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 많은 질문을 담은 그녀의 눈이 그를 멀거니 응시했다. 기력을 다 소진한 채, 그저 하염없이 찬혁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영의 눈 속에서 제 입맛에 맞는 질문 하나를 뽑아 답을 했다.
"출퇴근 귀찮아서 호텔로 들어갔어. 여긴 주말에 가끔 와. 전원주택. 자연. 휴식. 됐어?"
찬혁이 차에서 내려 조수석으로 빙 돌아왔다. 문을 열고 안전벨트를 풀어 아영을 부축해 차에서 내렸다. 차고에서 집 안으로 들어가는 계단 입구에서 비밀번호를 누르자 자동문이 열렸다.
"들어가자."
"......"
집안으로 들어서자 정원과 산책로가 있는 뒷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천정이 높은 단층 목조 건물이 전면 유리창으로 에워싸여 격조 있고, 세련돼 보였다. 조용하고 쾌적했다. 위로 쌓아 올릴 집을 바닥에 펼쳐놓은 방갈로답게 집 내부는 광활했다.
찬혁이 갑자기 아영을 번쩍 들쳐 안고 침실로 들어갔다. 두 눈을 휘둥그레 뜰 힘도 없이 아영이 찬혁을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침실 가운데 널찍한 침대, 하얀 시트 위에 아영을 살포시 내려놓고, 혼이 다 날아가 서늘해진 아영의 이마를 쓸어 넘기며 찬혁이 속삭였다.
"잠깐만."
그리고는 양복 상의를 벗어 소파에 던져 놓고 욕실로 들어갔다. 원형 자쿠지에 쏴아 물을 받았다. 라벤더와 시트린 파우터를 골고루 뿌려 거품을 일으켰다. 찬혁이 드레스 룸으로 가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침실로 돌아오자 아영은 어느새 자리에 누워 눈을 무겁게 감고 수마에 휩쓸리고 있었다.
"아영아."
찬혁의 속삭임이 아영의 귓가에 아스라이 스며들었다. 눈도 뜨지도 못하면서, 찬혁의 속삭임이 간지러운지, 아영의 목이 미미하게 움츠러들었다.
"옷 벗자."
"......"
아영이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렸다. 눈앞에 한가득 찬혁의 얼굴이 아스라했다. 희미하게 끔벅이는 아영의 눈을 들여다보며 찬혁은 이번에도 제 입맛에 맞게 질문을 뽑아 답을 달았다.
"안 잡아먹어. 오늘은."
"......"
"물 받아놨어. 따뜻한 물에 몸 담그라고. 그리고 푹 자자."
지금도 충분히 기절 일 초 전이었다. 그러나 아영은 찬혁이 이끄는 대로 따랐다. 의사의 손에 몸을 맡기는 환자처럼. 저를 위해 품을 내어준, 도피처가 되어준 은인에게 보내는 무한 신뢰로. 아영은 무너져버린 제 영혼을, 일말의 움직임조차 거부하는 제 심신을 찬혁의 손길에 고스란히 내맡겼다.
찬혁은 축 늘어진 아영을 부축해 일으켜 앉혀놓고 드레스 룸에서 챙겨온 제 티셔츠를 아영의 머리 위로 자루 입히듯 뒤집어씌웠다. 아영이 두 명은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티셔츠는 길고 헐렁했다. 찬혁이 티셔츠 속으로 손을 넣어 아영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 뭐 하는 거야..."
"옷 입고 물에 들어가게?"
"... 부끄러워..."
"그럼 눈감아."
이상한 주문이었다. 부끄러우니 보지 말라는 뜻이었다. 벗기는 사람이 두 눈 뻔히 뜨고 눈을 감으라고 한다. 그런데도 주문에 걸린 사람처럼 아영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