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놈의 기원

3950
찬혁은 침실 커튼을 닫고 에어컨을 적정 온도로 맞췄다. 혹시 살갗에 닿는 감촉이 너무 찰까 싶어, 실크 이불을 살 걷어내고 얇은 면 이불을 꺼내 잔뜩 웅크리고 잠든 몸 위에 살포시 덮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나오자마자 아영은 기절해버렸다. 곁에 모로 누워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눅눅했다. 너무 기진맥진해 드라이를 해 줄 수도 없었다. 수건으로 잘 털어 말린다고 했지만 머리칼이 여전히 축축했다. 찬혁은 손가락 빗을 만들어 머리 결을 살살 빗어주고 또 빗어주었다. 눅진한 머리칼 사이사이로 공기가 통해 조금이라도 더 마르도록. 파리하던 얼굴도, 핏기 잃어 창백하던 입술도 혈색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따뜻한 물에 담가주길 참 잘했다 싶었다. 유난히 투명해진 하얀 살결이 볼부터 서서히 발그레 상기되고 있었다. 살짝 열린 오동통한 입술에도 발갛게 핏기가 돌고 있었다. "입술 거 참... " 거슬렸다. 매우. 찬혁은 손가락으로 도톰한 아랫입술을 살며시 눌러보았다. 말랑 눌렸다 일어나며 발개진다. 묘하게 만족스럽다. 종일도 눌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입술로. 입술로 눌러주고 싶다는 미친 상상의 기원은 한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참 어이없는 순간에 시작되었다. 지금처럼 아영이 잠든 사이에. "나 미친놈 만든 게 너라고." 생각하니 차. 웃음이 일었다. 찬혁은 고 2 여름방학 끝물에 대형 오토바이 사고를 냈다. 자유로에서 무리하게 유턴을 하다가 속도를 제어하지 못하고 반대편 가드레일을 들이받았다. 새로 업그레이드한 배기통을 부앙 대며 선두를 달리다 날아가던 속도 그대로 가드레일에 처박혔다. 그 충격에도 멈추지 않고, 오토바이가 100미터 전방까지 가드레일을 레일 삼아 전차처럼 폭주했다. 결국, 기름탱크에서 쏟아져 나온 휘발유에 스파크가 튀어 오토바이가 펑 하늘로 솟구친 후에야 미친 질주가 끝이 났다. 다행히 가드레일에 돌출된 철책이 오른쪽 종아리를 관통해 오토바이와 분리된 덕분에 목숨은 건졌지만, 찬혁의 병원 신세는 거의 반년간 지속되었다. 그리고 재활 치료 막바지, 고 3 시작과 동시에 병원에서 요양 권고가 떨어졌다. 오토바이 사고의 후유증을 염두에 둔, 말 그대로 일종의 권고였지만 외동아들이 밖으로 나돌다 객사할까 전전긍긍하던 아버지는 권고를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점점 강도를 더해가는 사건 사고를 미연에 방지해 보겠다는 일종의 자구책이었달까. 찬혁은 졸지에 시골구석에 짱 박혀야 했다.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는 시골 생활이 고까울 리 없었다. 안 그래도 열 받아 꼭지가 돌아버릴 지경인데, 시골 학교로 전학 오자마자 짝이라고 배정받은 여자가 수업 종료와 동시에 책상에 머리를 쿵 박아댔다. 쿵 소리에 놀라 움찔했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픽 웃음이 일었다. 밤에 잠 안 자고 뭘 하길래, 학교에서 아영은 쉬는 시간마다 책상에 엎어져 쪽잠을 자곤 했다. 머리를 책상에 대자마자 곯아떨어지는 놀라운 기절능력 보유자답게 일단 누우면 동시에 꿈나라 행이었다. 아무튼, 눈뜨고 있는 꼴을 보기 힘들었다. 뜬 꼴도 못 봤지만 내내 감고 있는 꼴도 보기 싫어 볼일도 없는데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을 다녀왔다. 그날도 볼 거 없는 여자의 자는 얼굴을 한심하게 꼬나 보고 있을 때였지 아마. 입술이 뻐끔 열렸다. 꿈에 뭘 먹기라도 하는지 입맛을 쩝쩝 다셔대는 동그란 입술이 왜 그리 신기하던지. 집중했던 것 같다. 볼이 눌려 오리 주둥이처럼 밀려 나온 입술에 살이 올라 통통했다. 입술에도 살이 찔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동그란 물풍선 두 개가 오물거리는 사이, 침이 입가로 반짝 흘러나와 깔고 누운 책 위에 고였다. 저절로 미간이 일그러지는 와중에도 찬혁은 오직 한가지 일념에 사로잡혀 버렸다. 입술 한번 만져봤으면. 찔러보면. 그럼 터질까? 상상만으로도 손끝이 짜릿했다. 이사이에 문 것처럼 잇몸이 저릿거렸다. 그때부터였다. 아영이 엎어져 자는 시간을 기다린 것도, 볼 거 없는 여자의 자는 얼굴에 묘하게 이끌리기 시작한 것도. 예나 지금이나 보기 좋게 살집 오른, 봉긋 튀어나온 그녀의 입술은 두고두고 감상하기에 전혀 지루함이 없었다. 어느새 붉은 기가 차올라 관능적이기까지. 몽환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입술에 몰입하다 말고 갑자기 찬혁이 피식 웃었다. 원피스 지퍼가 스르르 열리자 소스라치던 아영이 떠올라서였다. 사실 제 꼴이 우스워서라고 해야 맞지 싶다. "... 내가 할게..." 결국, 아영은 옷을 벗기려는 찬혁의 손길을 거부했다. 허리 근처까지 원피스 지퍼를 내리는 동안에도 살갗 위에 쉴새 없이 잔 소름이 파도처럼 일어났다. 손끝이 등을 스칠 때마다 소스라치는 통에 더는 못 버티고 티셔츠 밖으로 얼른 손을 빼야 했다. 탄성 좋은 저지 팬츠가 속절없이 일어섰다. 상황파악 못 하고 때아닌 텐트를 쳤다. "너 살리려다 나 죽을 뻔했잖아 자식아. 이거 아주 위험한 놈이네." 저 혼자 하겠다고 포댓자루처럼 티셔츠를 뒤집어쓰고 욕실로 뒤뚱뒤뚱 들어가 버린 아영이 어찌나 고맙던지. 그러나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찬혁은 자신할 수 없었다. 그놈의 라면 곱배기는 기다리다 다 불게 생겼다. 참는 거, 기다리는 거, 딱 질색인데. 부아가 치밀었다. 쩝. 별수 없어 픽 웃어버리고 아영의 하얀 이마에 입을 맞추고 나직이 우쭐댔다. "나만 믿어. 나 아니면 누가 널 챙겨. 안 그래?" 침실을 나와 문을 살짝 닫아주고, 찬혁은 곧장 서재로 갔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다. "예. 김 실장님." "아. 사장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IBC 호텔 컨벤션센터 입찰 후보 간 비정기 간담회 및 오찬이 곧 있을 예정인데요. 전화도 안 받으시고 아주 진땀이 다 났습니다. 어디 계십니까?" "일산 집입니다. 오늘은 출근 못 하니 그렇게 아세요. 재택 합니다." "아, 예. 그럼 오찬 참석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기간담회 한지 얼마나 됐다고 비정기 모임이죠? 왜 또 한답니까?" "새로운 안건 발의나 공문에 대한 질의응답 자리가 아니라, 이번에는 새천년 미래 한국당 임 요한 당 대표를 모시고 오찬을 나누는 자리라고 합니다. 비공식 석상인 만큼 후보 선정에 대한 언질이 흘러나오지 않을까, 다들 상당히 귀추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당 대표가 시 사업에 무임승차도 아니고, 이제 대놓고 얼굴을 들이밀겠다. 아들 하나도 컨트롤 못하는 위인이 무슨. 차. 낙원은 어떻게 돼갑니까? 민혁이 사진 받았죠? 그날 방에 있던 놈들 다 만나봤어요? 사진에 얼굴 빼박이라 순순히 한다고 할 텐데?" "예. 다 만나서 회유해놓았습니다. 임 노아가 낙원 방 마약 밀반입과 공급책이었다는 증거와 증언도 법무팀이 배석한 가운데 모두 받아 수집해 놓았습니다. 언론 보도 자료도 이미 준비를 마쳤습니다." "사기 협박이 뭔지 제대로 교육 좀 시키렸더니, 임요한 의원이 또 이렇게 설치네. 언론이 쉬쉬하게 입막음해놨다 이건가." "낙원 사태가 조용히 넘어가긴 했지만, 그 사건이 우리 쪽에 불리하게 작용할 거라는 입소문이 암암리에 나돌면서 경쟁사들은 반색 중입니다. 오늘 오찬에 호텔 관계자들이 몰릴 것으로 예상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거야 두고 보면 알 일이고. 사기 협박범도 잡고 당 대표도 사퇴시키는 일거양득이 될지, 담합하고 로비해대는 호텔들까지 싸잡아 일망타진하게 될지. 오늘 오찬은 어느 호텔에서 주최한답니까?" "로얄호텔입니다. 사실 오늘 임요한 의원을 모시기로 한 것도, 간담회를 비공개로 돌린 것도 로얄호텔의 의사였다고 합니다." 찬혁의 수려한 이마가 일순 와락 험악하게 구겨졌다. 돈다발로 아영의 머리를 보란 듯이 후려치던 로얄호텔 김 여사의 저속한 행태가 뇌리를 깊숙이 후벼 팠다. 공감 200프로의 분노가 화르륵 재점화되었다. "일망타진으로 갑시다. 오늘 불참합니다." "예. 불참 의사 전달하겠습니다. 그리고 태양건설 측에서 목포 호텔 완공을 3주 후로 전망한다고 하는데요." " 3주? 왜 늦춰졌죠?" "주차장 인근 바위산과 방파제 보수 공사가 예상과 달리 난항이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관광지로 포차 거리를 조성하려다 보니 안전상의 문제를 간과할 수 없어서, 안전점검 과정에서 시간이 지체됐다고 합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포차 거리에 한해서 입니다. 그게 호텔 완공과 맞물려 호텔까지 개장이 지연 돼야 한다는 건 수긍 못 합니다. 계약대로 기한을 지키던가, 아니면 지연된 부분에 대해서는 손해배상을 청구할 테니 별도로 처리하라고 하세요. 이런 식이면 태양건설의 IBC 컨소시엄 참여 여부는 불투명해진다 전하시죠." "예. 알겠습니다." "신우영 회장 관련 제보자와 연락은 됐습니까? 소재파악 못 했어요?" "비밀리에 접촉하기를 희망해서 사람을 보내놨습니다." "어디서 봤답니까." "삿포로입니다." "삿포로 라면... 연락 오는 대로 바로 연락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뭐가 더 남았습니까?" "비공식 오찬 스케줄 미정으로 오후 시간을 비워놓은 상황이어서, 오후 5시까지는 일정이 없으십니다. 오후 5시에 클럽 상그리아 리조트 마틴 옝 대표와 미팅 후 정찬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알겠습니다. 아. 낙원 보도자료 브리핑용으로 만들어 놓은 거 있죠. 그거 임요한 의원한테 오찬 전에 보내세요. 반응 좀 봅시다. 밥맛이 기가 막히겠군." "예 지금 처리하겠습니다." "결재서류 빨리빨리 보내세요. 바로 처리하고 좀 쉬게." "예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럼 들어가십시오." 찬혁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쿠션 좋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한껏 누이고 기지개를 켰다. 모처럼 갖는 반짝 개인 시간이 이렇게 꿀맛일 수가. 아영과 점심을 같이 먹을 생각만으로도 신이나 배가 다 불렀다. 물 찬 제비처럼 날쌔게, 지체없이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나갔다.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 "아 이런. 뭐가 있을 리가 없지." 찬혁은 침실 문을 살 열고 안을 비죽이 들여다보았다. 아영이 새근새근 잘도 잔다. 제 침대 위에 누워있는 그녀가 꿈만 같았다. 도망을 사명으로 타고난 사람처럼 내빼기 바쁘던 아영이 순순히 따라와 준 게 기특해 절로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일었다. 서둘러 마트에 다녀오기로 했다. 라면을 끓여줘서라면 곱배기를 재 각인시킬까 짓궂은 장난기가 발동했지만, 초주검이 되어 온 사람한테 부릴 장난으로는 시기적절치 못했다. 그렇다고 죽을 사 오자니, 병자도 아닌데 죽 앞에 놓고 한숨 쉬어대는 꼴도 못 봐줄 것 같았다. 집밥의 감동을 선사하기로. 쉽게 가자. 파스타. 찬혁은 서둘러 차고로 나가 차에 올라탔다. 콧노래가 절로 흥얼흥얼 흘러나왔다. 차고 문을 열고, 시동을 켰다. 띠리링 띠리링~ "응?" 조수석 밑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영의 가방이 거기 있었다. 가방을 집어 올렸다. 띠리링 띠리링~ 휴대폰을 꺼냈다. 민 대표였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영씨. 어디예요? 우리 점심 데이트 잊은 거 아니죠? 연락이 없네?" 찬혁의 미간이 구겨졌다.
신규 회원 꿀혜택 드림
스캔하여 APP 다운로드하기
Facebookexpand_more
  • author-avatar
    작가
  • chap_list목록
  • like선호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