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니다. 선배."
"... 찬혁이니? 네가 왜 아영 씨 전화를 받아. 아영 씨한테 무슨 일 있나? 아영 씨 바꿔라."
"지금 전화 못 받아요."
잔다고 해서 더는 헛물 켜지 못하게 원천 차단할까도 싶었지만, 찬혁은 그만두었다. 아영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고 싶진 않았다. 기껏 남자 하나 떼어내자고 그녀의 위신까지 떨어뜨릴 일인가 이게. 그러나 민 대표는 분위기를 짐작하기라도 했는지 묵묵부답으로 불쾌한 심기를 표출했다.
"......"
"전할 말 있으면 해요. 선배. 전해줄 테니."
"찬혁아."
"왜요."
"쥐고 흔들지 마라. 통제하려 들지 마. 아영 씨 내버려 둬. 돌아올 사람이야."
"그건 제가 할 소린데요. 사기 협박범으로 몰려 가뜩이나 겁먹은 애를 빼돌려서 보호관찰 중인 거. 그게 바로 구속이고 통제죠. 선배야말로 뭐 하는 겁니까?"
"사기 협박범으로 내몰리는 지경까지 만든 장본인이 할 소린 아닌 것 같구나. 아영 씨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 나락으로 떨어지는 거 인제 그만 볼까 하는데."
"나락으로 떨어지긴 누가 떨어져요! 어디에 떨어지건 아영이 저와 같이 갑니다. 협업인지 뭔지, 전시회 빌미로 작가 유인해서 동거라니요."
"말조심해. 아영 씨 한두 살 먹은 어린아이 아니다. 아영 씨가 선택한 일이야."
"뒤로 사기 협박 합의까지 해버려서 사람 꼼짝 못 하게 만들어 버리니 어쩝니까. 그럼. 아영이를 위해서라면 거기서 선배가 합의를 해주면 안 되죠. 애가 졸지에 뭐가 됩니까! 선배 곁에서 찍소리 못하게 해놓고 사람 구제한 것처럼 말하는데, 수법이 너무 졸렬해요. 선배. 그래서 못 보내요. 선배는 그냥 갤러리 대표만 해요. 선 넘지 말고."
"무모한 거는 여전하네. 사람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으면서 끝까지 가겠다니. 살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보고 같이 죽자는 거냐. 말에 어폐가 심하다 찬혁아. 사리분별력이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하게 떨어지네. 이럴 때 보면 네가 아영 씨를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이란 게 있는 사람인지 의문이 들어."
"진심 없이 어떻게 십 년 동안 한 사람을 미친놈처럼 찾아 헤매요. 안 그래요?"
"하아... "
민 대표의 한숨 소리가 낮고 짙게 깔렸다. 숨 끝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보아하니 화를 삭이는 게 분명했다. 찬혁은 어쩌다 민 대표와 이런 통화까지 해야 하는 건지, 언제부터 둘 사이가 한 여자를 두고 설전을 벌여야 하는 밀접한 관계로까지 발전하게 된 건지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중고등학교를 같은 사립학교에 다녔다는 것 외엔 민 대표와의 사이에 유대감을 형성할만한 그 어떤 매개체도 없었다. 성향 자체가 극과 극이었다. 어울릴만한 구실도 없었지만, 자로 잰 듯 반듯한, 전형적인 모범생이던 민 대표 쪽에서 개망나니처럼 날뛰던 찬혁을 집안 차원에서 멀리하도록 했으니까. 그랬던 둘이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온 건지.
'차. 이것도 리나네.'
기가 차 속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민 대표는 리나가 가까이 어울리던 사람이었다. 미술로 연결된 두 사람의 유대관계는 의외로 끈끈했다. 찬혁의 생활 반경 안에 민 대표가 자연스럽게 발을 들여놓은 것도 어찌 보면 리나의 집착을 방임한 결과일 테지. 돈다발로 아영을 후려치는 쇼를 꾸민 리나도, 작가 사랑을 가장해 집요하게 달라붙는 민 대표도 찬혁은 더는 용납하지 않기로 했다.
"제 진심 알았으니 선배 인제 그만하시죠. 아영이 안 돌아갑니다. 전시회 끝날 때까지 출퇴근시킬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짐은 오늘 중으로 윤 비서 보내 가져오겠습니다. 그렇게 아세요."
"네 진심. 집착으로밖에 안 보이는데. 혹시 십 년을 버티게 해준 사람이 너일 거라는 과대망상에 빠진 건 아니니. 그랬으면 인터뷰에 언급했을 텐데 말이야. 나도 궁금해서 기대 무척 했었는데, 네 얘긴 아예 없더군. 놀랐지 뭐냐."
찬혁은 잠시 숨이 턱 막혔다. 휴대폰을 쥔 손이 흥분으로 가늘게 떨렸다. 월간 아트 잡지를 분해하다시피 헤집어도 아영의 인터뷰에 제 얘긴 없었다. 그녀의 일대기에서 송두리째 지워졌다. 그때의 황망함과 가슴 철렁함이 또다시 욱하고 치밀었다. 치고 나갈 말을 잃고, 애꿎은 어금니만 질끈질끈 물었다. 반박하기 힘든, 막다른 길에 몰린 기분이었다. 찬혁은 손끝으로 일그러진 이마를 신경질적으로 밀어냈다.
"......"
"치한 얘기 들었겠지. 그날 내가 거기 없었다면 어쩔뻔했을까. 그런데 말이다. 사람 살리겠다고 뛰어든 지하 방에서 내가 뭘 목격한 줄 아니. 그런 궁핍은 살면서 처음 봤어. 치한을 맞닥뜨린 것보다 더 당황스러웠다. 사람이 어디까지 비참해질 수 있나, 그 끝을 본 날이었거든. 아영 씨 힘겹게 내 손 잡은 사람이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 거다. 이제 기껏 일어서보려는데 이런 식으로 주저앉히면 곤란하지."
"손잡았다고 선배 사람이라고 착각은 하지 마시고. 아영이 알아봐 준 거, 물심양면 키워준 거는 고마운데, 딱 거기까지만 해요. 선배. 전시회 지장 없도록 외조 잘해드리죠. 그럼 그만 끊습니다."
"네 사람이라고 착각하지도 마. 빚에 허덕이느라 작품활동조차 감히 꿈도 못 꾸던데. 너 때문인 거. 굳이 지적을 해줘야 알아듣는 거냐? 아영 씨 성공하고 싶어 한다. 어떻게든 도와주려는 사람 방해하지 마라. 찬혁아. 아영 씨한테 전해. 이따 집에서 보자고. 들어가."
"민영환! 아 씨. 미치겠네. 선배로 모실 때 그만 해요! 예! 아영이 내가 책임집니다. 선배가 관여할 일도 입에 올릴 일도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보세요! 듣고 있어? 야! 민영환! 이 개새 "
민 대표는 더는 듣지 않고 통화를 종료했다. 찬혁의 입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자타가 공인하는 쌍욕 폭격기였다. 그의 상스러움에 대적할 자신도 없었지만, 체질적으로 저속함을 대하는 데엔 비위가 약했다. 저속한 언어를 입에 담는 건 고사하고 지나가다 남들의 쌍욕 시비를 흘려듣는 것조차도 마치 제가 당한 치욕인 양 상처를 받았다. 그런 사람이 찬혁을 말로 상대한다는 것은, 그것도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하. 뿅망치에 정수리를 후드려 맞으면서도 죽기 살기로 튀어 오르는 두더지 꼴로 찬혁의 욕에 난타당할 게 뻔했다. 자아가 회복 불능 상태로 너덜너덜해질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조금 전 급히 차단한 찬혁의 뒷말을 감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같은 급으로 엮여 진흙탕을 구른 것 마냥 민 대표는 치를 떨었다.
찬혁의 거친 입은 학창시절부터 유명했다. 누구든 수틀리는 사람 앞에선 시뻘건 쌍욕을 가감 없이 날려버렸다. 영혼이 피폐해질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입만 삐딱한 게 아니었다. 늘 뭐가 불만인지 사람 자체가 삐딱했다. 자세도 복장도 행동거지도. 불우한 가정사 때문이었다는 걸 리나를 통해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동정이든 연민이든 그런 찬혁에게 선뜻 다가가고 싶은 맘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제일 그룹 꼬리표를 달고 줄을 서 있는 배다른 형제들 사이에서 서열 상위에 올라가기 위한 고군분투만으로도 민 대표는 좌우는 물론 뒤조차 돌아볼 겨를이 없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교 1학년 시작하고 얼마 되지도 않아 찬혁이 오토바이 사고를 내고 오랜 결석 끝에 학교로 돌아온 그 날. 그의 주변으로 아이들이 몰리고, 그의 일 거 수, 일 투 족에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집안 배경 믿고 똥 폼 잡는 놈이던 찬혁의 존재가 하루아침에 신비주의 베일에 휩싸인 냉 미남으로 탈바꿈되어버린 것이다. 여학생들이 쉬는 시간마다 복도 창문에 달라붙었다. 바람의 아들이라나. 오토바이 뒤에 한 번 타보는 게 졸업 전 미션이라며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는 여학생들을 보는 건 예삿일이 될 정도였다.
꿀이라도 발렸는지 찬혁의 주위로 벌떼처럼 꼬이는 여학생들과 달리, 여전히 냉랭하고 아니꼬운 태도로 재벌 가 자제들을 길에 나뒹구는 개똥 차듯 무시하는 찬혁의 곁으로 선뜻 다가가는 남학생들은 없었다. 명색이 내로라하는 집안 자제들 눈에는 한순간에 놈에서 님으로 위신이 격상한 찬혁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선망과 부러움 그리고 질투가 들끓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민 대표는 간파할 수 있었다. 부러우면 지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그랬다. 지지 않으려고 민 대표는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 그림에. 그런데 그 끝이 찬혁과 닿아 있을 줄이야.
손가락 마디마디에 곱은 긴장과 흥분을 이완시켜보려고, 민 대표는 깍지 낀 손 마디를 우드득 거린 후, 손을 가볍게 털어댔다. 그리고도 몇 번을 쥐락펴락 빈손 운동을 하고 나서야 수화기를 들었다.
"네 대표님."
"윤 큐레이터 지금 어디 있죠?"
"제1 갤러리에 있습니다. 신아영 작가님 전시작 설치 벽 디스플레이 작업 중인데요. 연결해드릴까요? 대표님?"
"아닙니다. 내가 올라가죠. 그리고 내일 자선 파티 참석 준비는 어떻게 돼가고 있습니까?"
"차질 없이 진행 중입니다. 디자이너 샵과 살롱에는 내일 시간 엄수해주길 당부해놓았습니다."
"음. 좋아요."
"아. 그리고 대표님. 방금 한대식이라는 분이 전화 주셨습니다."
민 대표의 안색이 순간 시퍼렇게 얼어붙었다.
"..... 연락처... 받았어요?"
"아니요. 그냥 그렇게만 전해드리라고 하시고 급하게 끊으시는 바람에 발신자 조회도 안 돼서. 죄송합니다."
"......알았어요."
수화기를 내려놓는 민 대표의 손이 마구 떨렸다. 머릿밑에서 식은땀이 쭉 배어 나왔다.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끝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려왔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퀴 달린 육중한 가죽 의자가 드르륵 굴러가 등 뒤 캐비닛에 쿵 부딪혔다. 민 대표는 서랍을 열고 속을 헤집어 약병을 꺼냈다. 손끝이 떨려 플라스틱 뚜껑이 벌컥 열리고 동그란 알약이 쏟아져 바닥에 흩어졌다.
"아, 이... 하아..."
허둥대는 구둣발에 알약이 짓이겨져 하얗게 가루가 되었다. 민 대표는 그 길로 응접실로 뛰쳐나가 바에 매달려 알약을 입에 털어 넣고 포트 물을 컵에 콸콸 부어 입에 쏟아부었다. 목젖이 벌컥벌컥 상하로 격하게 요동쳤다.
탁
물잔을 바에 내려놓고 바에 의지해 서서 그제야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며 숨을 몰아쉬었다. 약 기온이 오르는지 금세 팔다리 근육이 나른하게 이완되었다. 민 대표는 응접실 중앙 겨자색 가족 소파에 풀썩 주저앉아 등을 뉘었다.
"하아... 하아... 뭐야... 쥐도 새도 모르는 곳에 납작 숨어있으라니까!"
다시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고막을 울려댔다. 가슴을 움켜쥐고 약 기운에 의존해보려 소파에 모로 쓰러졌다. 허사였다. 만성적으로 찾아온 신경쇠약을 잠재우기에는 더는 신경안정제 몇 알로는 불가능했다.
먼저 선수를 쳐야 한다. 발각되기 전에.
민 대표는 비틀비틀 소파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