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베리 케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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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호텔 로비는 귀빈 맞이 준비로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고 어수선했다. 재기를 꿈꾸는 염원과 기대에 힘입어 전에 없이 호텔 안팎에 활기가 넘쳐났다. 반면 채동욱 사장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아침에 한빛 갤러리에서 일어난 해프닝에 대한 보고를 받은 때문이다. "왜 하필 지금 그런 짓거리를. 쯧. " 로얄 호텔의 미래에 또다시 먹구름이 끼고 있는 것만 같아, 채 사장의 미간이 심란하게 일그러졌다. 호텔 투숙률이 전년도 대비 30프로나 하락한 여파로 수익을 투자로 전환해 이익을 재창출해야 하는 경제 순환 구조가 파행으로 치닫고 있은 지 벌써 수년째였다. 80년대 파라다이스 호텔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로얄 호텔이었다. 그 기세를 몰아 제2의 부흥을 도모하기 위해 건설 분야로 사업 확장을 꾀했지만, 건설업은 호텔에서 거둬들인 이익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거대한 블랙홀이 되어갔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분별한 문어다리식 프렌차이즈 오픈은 자금 순환을 원활히 돌리지 못하는 악순환을 초래하더니, 결국 IMF의 직격탄을 맞고 도산 위기에 빠져버렸다. 그런데 죽으란 법은 없는가. 아니면 살 운명이었던가. 난데없는 돈벼락이 떨어졌다. 파라다이스 그룹이 소유한 숙박 시설 중, IMF 중에도 호황을 누리던 경주 콘도 매각 자금이 그대로 수중에 떨어진 것이다. 이런 게 기사회생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 큰일을 해낸 일등공신이 바로 김 여사와 리나였다. 가까스로 부도를 막고, 건설업을 접은 후 호텔 사업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난파 직전까지 기운 배가 순항을 할 수 있기까지는 아직은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리나와 찬혁의 결합설을 대외적으로 흘려 보려는 찰나에 난데없이 신화당 그룹의 외동딸 신아영이 재등장 한 것이다. 채 사장의 입에서 시커먼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통유리 너머, 길 건너에 웅장하게 솟아오른 파라다이스 호텔의 위용을 탐욕의 눈으로 응시하며, 채 사장은 뒷짐 진 두 손 마디가 하얘지도록 쥐락펴락 거듭했다. 똑 똑 똑 "들어와." 채 사장이 창에서 눈길을 거두고 돌아섰다. 박 실장이 들어왔다. "오늘 비정기 모임 참석자 명부와 오찬 회동 주요 세부 논의 사항입니다. 그리고 오찬 이후 임요한 의원과의 독대 자리가 성사되었습니다. 임요한 의원께서 아들 앞으로 보내신 선물을 매우 흡족해하셨다고 하십니다. 자그마하게 보답을 준비하셨다고 보좌관의 귀띔이 있었습니다." "그랬겠지. 아무리 개망나니 같은 아들이어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자식 위해주는 사람 먼저 돌아보는 게 인지상정이지. 그 차가 얼마짜린데. 노아는. 아직 병원 신세라던가?" "예. 전치 8주 진단을 받았다고 하니, 추석 때까지는 병원 신세를 지지 아닐까 싶습니다." "상대를 잘못 만났군. 하필 박 사장을 만나다니. 노아 그 녀석도 운수가 뒤틀린 날이었던 게지. 임 의원이 단단히 벼르고 있다던데. 이번 기회에 박 사장도 철이 좀 들려나. 뭐 어찌 됐든 우린 굿도 보고 떡도 먹게 생겼으니 박 사장에게 감사장이라도 만들어 보내야 할 판이지만 말이야." "오늘 박찬혁 사장은 참석자 명단에 빠져있습니다. 아무래도 임요한 의원을 의식해서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라고 부랴부랴 자리를 만든 거 아닌가. 벼룩도 낯짝이 있지, 후보 선정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위인의 귀한 외동아들을, 그것도 4대 독자라지? 그 지경을 만들어놓고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오겠어. 호텔컨벤션센터 입찰 후보자 중에 유력한 후보자인 파라다이스 호텔이 알아서 빠져 준다면야 우린 고마울 따름이고." 채 사장은 보고 문서를 마저 다 훑은 후, 책상 위에 턱 던져놓았다. 만반의 준비를 마쳤는데, 여전히 그의 안색은 어두웠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오전 내내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그런데 박 사장이 대체 왜 불참하는 건가?" "예? 그거야 말씀하신 대로가 아닐는지요. 감히 나타나지 못할 자리라고 보는데요. 이 정도면 중도 하차로 이어지지 않을까 낙관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흠." 박 실장의 낙관에 기대를 걸어보지만, 한편으로는 보란 듯이 당당하게 고개 쳐들고 밀고 들어올 찬혁이 꼬리를 내린 속내가 의심스러운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한빛 갤러리에서 벌어진 소동 이후에 받은 불참 통보가 아닌가. 채 사장은 오늘 불참 이면에 찬혁이 준비한 밑그림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불안 해졌다. "특히 오찬 준비를 철저히 하도록 해. 입맛 까다롭기로 유명한 사람이니. 나가봐." "예. 알겠습니다." 박 실장이 나가자, 채 사장은 곧바로 김 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어디야." "... 갤러리에 있어요. 리나와." 무겁게 깔리는 채 사장의 음성에 김 여사가 움찔 주저앉는 목소리로 답했다. "거기서 여태 뭐해! 오늘이 무슨 날인 줄 뻔히 알면서 뭔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망하라고 염병을 떨고 있구만! 당장 건너오지 못해!" ".... 아이. 여보 좀 고정하시고..." "잔말 말고 리나 데리고 당장 호텔로 들어와!" 채 사장은 수화기를 던지다시피 내려놓았다. 묘책을, 아니 차선책을 마련해야 했다. 찬혁의 그림자 자리에 리나를 붙이는 건 지금 상황으로 봐선 더는 불가능한 헛짓거리가 되었다. 이로써 담합이건 협약이건, 승승장구하는 파라다이스 그룹과 물밑 작업을 시도해볼 그 어떤 여지조차도 남김없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재도약에 걸림돌이 생긴 건 분명해 보였다. 채 사장은 과연 남은 수가 무엇인지 고심했다. 김 여사가 쥔 마지막 패가 뒤집어 볼 만한 패인지, 두고 볼 일이다. *** 몇 번의 움척임 끝에 아영이 잠에서 깨어났다. 오전 내내 울어서 퉁퉁 부어버린 눈꺼풀이 겨우 묵직하게 열렸다. 시간대를 가늠해보려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실크 커튼이 오렌지빛으로 물들고 방안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이런! 아영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7시!" 벽에 걸린 디지털 시계의 숫자는 이미 퇴근 시간을 넘긴 지 오래였다. 반 차 겨우 받아 놓고, 무단결근을 해버리다니. 아영은 낭패감에 이불을 걷어 내고 화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가방! 어디 있지? 어?" 침대 주변과 침실 안을 돌며 샅샅이 살펴도 가방은 보이지 않았다. 아영은 방문을 빼꼼히 열고 바깥 동태를 살폈다. "... 찬혁아... 박찬혁..." 대답이 없었다. 집안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머리만 내밀고 밖을 살피던 아영의 눈에 식당 테이블 의자에 걸린 가방이 보였다. 냉큼 달려가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갤러리에서 온 연락은 없었다. 그런데 민 대표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찬혁이 받았다!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찬혁의 티셔츠를 걸치고 있는 제 모습을 민 대표에게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아영은 어쩔 줄을 몰랐다. 찬혁이 뭐라고 하면서 전화를 받았을지는 불 보듯 뻔했다. 잔다고 해서 민 대표의 상상력을 발동시켰겠지. "그럼 난 뭐가 되냐고! 아 진짜!" 옷을 갈아입으려고 급히 방으로 돌아서다 말고, 아영이 천천히 식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휴대폰을 확인하기 바빠 식탁 위에 놓인 케이크를 보지 못했다. 블루베리 케이크. 그리고 하얀 접시와 그 옆엔 투명 유리 손잡이가 달린 식기가 노란 폴카닷 냅킨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찬혁이 준비해두고 나간 모양이다. 아영은 의자를 빼고 식탁 앞에 조용히 앉았다. 다시 휴대폰을 확인했다. 아무리 봐도 찬혁에게서는 전화도 메시지도 없었다. 오전에 그 꼴을 다 보고, 민 대표의 전화까지 받고 나갔으니 뭐라도 한마디가 있어야 그 다운데, 그게 정상인데, 내내 침묵하고 있다. 그의 무표정만큼이나 심란함이 담긴 무반응이었다. 모두 저 때문이라, 무슨 말로 어떻게 걱정을 해줘야 할지 몰라 난감하기만 했다. 아영은 케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SALAD BOWL BAR에서도 블루베리 케잌을 가져다 주더니. "별걸 다 기억하고 있니. 너는..." 시골로 전학 간 후 맞이하는 첫 생일을 앞둔 어느 날, 찬혁이 물었다. "뭐 해줄까?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뭐든? 말하면 다 들어줄 거야?" 기다린 사람처럼 얼굴을 반짝 들이밀고 되묻는 저를 보고 찬혁이 픽 웃었다. 물어볼 땐 언제고, 어이없다는 듯 웃고 마는 그가, 그의 빈말이 얄미워서 그랬던 것 같다. 촛농같이 두꺼운 크림으로 감싼 케이크와 생크림 케이크 일색이던 시골에서 듣도 보도 못한 블루베리 케이크를 찾은 건. "블루베리 케이크?" "응. 난 케이크는 그것만 먹어. 생크림은 으. 생각만 해도 혀가 다 아려." 그래 놓고 잊어버리고 있었다. 빈말 그럴듯하게 던진 벌 좀 받으라고, 고민거리 얹어놓고 생각 자체를 말아버렸다. 그런데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방과 후, 오두막에 들렀을 때 아영은 입구에서 그만, 할 말을 잃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오두막 한편에 멋들어지게 조립되어 있던 이젤과 드로잉 보드도 놀라웠지만, 작고 동그란 원탁 위에서 앙증맞은 초를 태우며 기다리고 있던 블루베리 케이크는 정말 감격 그 자체였다. "생일 축하한다." ".... 이게 다 뭐야..." "자식. 벌레 들어가. 입 다물어. 뭐 이 정도에 놀라고 그래. 호텔에서 공수해왔다. 특별히 널 위해서. 좋냐." 우쭐하는 것도 잊지 않은 찬혁이었다. 그러더니 촛불을 끄기 전에 소원을 빌어야 한다고 우겨댔다. 그 바람에 수줍어 죽겠는데도 하는 수 없이 두 손 꼭 잡고 두 눈까지 꼭 감고 난생처음 케이크 앞에서 소원도 빌었다. 아니나 다를까, 촛불을 끄기 무섭게 소원이 뭐였냐고 집요하게 캐물었다. 말해줄 때까지 안고 안 놔줄 기세였다. 영원히 비밀로 할까도 싶었다. 그의 품이 너무 좋아서. 그걸 노린 사람처럼 집요하게 달라붙는 찬혁을 더는 감당하기 벅차 그만 털어놔 버렸다. "진짜야?" "...어..." 의외의 소리여서 놀란 건지, 바람이 들어맞기라도 해서 신기했던 건지 찬혁은 애매한 표정으로 한동안 말없이 저를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는 픽 웃었다. 당연하다는 듯. 아영은 블루베리 케이크를 바라만 볼 뿐, 먹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성의를 봐서 한입만이라도 먹은 티를 내줘야겠지만, 도저히 삼킬 수 없을 것 같았다. 종일 굶어 헛헛한 속이 울렁거렸다. 오전에 겪은 일이 좀처럼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역겨운 제 가족사 생각에 연쇄 작용을 일으키듯 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왔다. 뒤집힐 것만 같았다. 바닥까지 다 드러났고, 바닥을 뒹구는 꼴까지도 다 보여줬다. 이젠 더는 감춰야 할 비밀도 없었다. 나락으로 곤두박질칠 수치심도 일말의 자존심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니 차라리 후련한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 부모의 업을 양어깨에 짊어진 모양새로 한없이 고개 숙여야 할 앞날이 그저 암울하기만 했다. 그렇게라도 살아가야 하는 날들이 너무도 까마득해 아영은 멍해져 버렸다. 기가 막혔다. '어디로든 멀리, 단 하루만이라도 바람처럼 사라질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기엔 제 앞에 놓인 과제가 산처럼 높았다. 당장 다음 주에 갚아야 할 회원비도, 대출금도, 그리고 전시회도. 돌아가야 할 일만 남았다. 일상으로. "하아..." 결국 블루베리 케이크는 손도 대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방으로 들어가 찬혁의 티셔츠를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 티셔츠를 접다 말고 아영은 옷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체취가 아스라했다. 서늘하게 날 세워놓은 풀 향이 아련하게 감돌아 그의 가슴에 안겼던 모든 순간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찬혁의 가슴인 듯, 옷에 얼굴을 묻고, 그날처럼 빌어본다. '와줘. 포기하지 말고.' 옷을 반듯하게 접어 침대 위에 올려 두고 돌아섰다. 띠링~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찬혁의 메시지였다. “가기만 해. 가만 안 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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