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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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 장에 들어가기에 앞서 채 사장은 귀빈실에서 임요한 당 총재와 독대 시간을 가졌다. 고작 삼십 분의 알현 시간이었지만, 채 사장은 아예 사라질뻔한 기회를 잡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시간을 변경해가면서까지 친히 자리를 내어주었다는 것은 오찬 회동의 결과와 상관없이 로얄 호텔 쪽에 무언의 힘을 실어주는, 재도약을 향한 청신호의 암시와도 같았다. 작은 선물을 준비해왔다는 보좌관의 귀띔까지 더해져, 채 사장의 기대심리는 확신에 확신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소파 상석에 등을 푹 기대앉은 임 총재 맞은편에 등을 곧추세우고 정자세로 앉아 희소식이 떨어지기를 채 사장은 초조하게 기다렸다. "이번 서울 국제 비즈니스 종합 대 단지 건설에 서울시가 거는 기대가 매우 높습니다. 로얄 호텔이 큰일을 해주길 기대해 봅니다." "아. 큰일을 할 기회만 주신다면, 호텔컨벤션센터를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비즈니스 센터로 만들기 위해 총력을 다하겠습니다. 저희 로얄 호텔이 중추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총재님께서 마지막까지 힘을 보태주시길 바랍니다." "음. 그런데 말입니다, 채 사장. 내가 뭐 잘은 모르지만, 측근을 통해 얼핏 듣기로는 파라다이스 그룹이 유력한 후보자라고 하던데. 이게 어마어마한 규모의 국책 사업이다 보니, 건설 초기 단계부터 유지 관리 시스템까지 비용적인 측면에서 파라다이스 그룹에 비견될 경쟁사가 아직은 없어 보인다고 합디다." 채 사장은 마른 침을 삼켰다. 국토부 장관을 역임한 임 총재가 국가의 중대한 공공 건설 분야 전반에 손을 대지 않는 곳은 없었다. 여야를 막론하고 당 총재 후보 1순위의 물망에 올려놓고 장관 임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렸을 정도로 임 총재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한 검증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이 관문만 통과하면 후보자 지명은 따 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었다. 채 사장은 회심의 표정을 만면에 띄웠다. "그 점이라면 저희 쪽에서도 만전을 기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기 저희 호텔과 협력하게 될 호텔 및 기업 명부와 재무 지표 현황입니다. 긍정적으로 검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채 사장은 컨소시엄 세부 보고 자료를 앞에 내려놓았다. 임 총재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것으로 검증 절차가 낙관적으로 끝났음을 내비쳤다. "저희 쪽에 힘을 몰아 주신다면, 총재님의 은혜는 반드시..." 똑 똑 똑 노크 소리에 채 사장이 입을 다물었다. 오늘 독대의 하이라이트를 기대하던 임 총재가 앞으로 기웃이 일으키던 몸을 등받이에 다시 푹 뉘었다. 곧 문이 열리고 보좌관이 급히 들어왔다. "말씀 도중에 대단히 죄송합니다. 총재님. 이것 좀 보십시오." "음? 이게 뭔가?" 임 총재는 전에 없이 허둥대는 보좌관의 손에서 서류 봉투 받아 들었다. 별일이라고 해봐야 국회 본회의 파행에 대한 책임 촉구 결의안 따위일 테지. 임기를 얼마 남기지 않은 당 총재 자리였다. 그 이후를 준비하고 있는 임 총재에게는 이제 국회 일은 강 건너 불구경일 뿐이었다. 성가신 속내를 진지한 낯으로 가장해, 봉투에서 문서를 꺼내 들었다. 근엄한 표정으로 서류를 훑어 내려가던 임 총재가 서서히 등을 곧추세웠다. 그리고 서류를 홱홱 넘겨 발신인을 확인했다. 파라다이스 그룹 대표 박찬혁! 임노아 마약 밀반입 및 유통 관련 제보 보도 자료 말미에 찍힌 직함에 임 총재의 입이 황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허 벌어졌다. "총재님. 무슨 일이라도 생기셨습니까? 안색이..." "... 이거 어쩌나. 내가 지금 급히 국회에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채 사장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봅시다." 임 총재는 서류를 보좌관에게 넘기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귀빈실을 나갔다. "아. 총재님. 그럼 오늘 오찬은, 아니, 그럼 언제 다시 뵐 수 있을는지요? 저희 쪽 자료에 대한 총재님의 고견은 언제쯤 들을 수 있겠습니까? 총재님? 저기, 총재님!" 보좌관과 수행원에 막혀 더는 다가가지 못하고 채 사장은 임 총재를 애타게 불러댔다. 그러나 귀빈실을 나가자마자 임 총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급히 호텔을 빠져나갔다. 호텔 입구에 대기하고 있는 차에 오르자 임 총재는 보좌관에게 다급하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노아 당장 퇴원시켜. 집에 가둬. 외부 접촉 일체 못하게 차단하고, 도망 나가지 못하게 철저히 감시해. 경호 팀 붙여놔. 언론이건 어디건 인터뷰 요청은 무조건 다 잘라. 집사람 어디 있나?" "예! 해오름 장애인 복지 재단 이사회에 참석 중이십니다." "당장 들어오라고 해." "예!" "그 여자 누구라고 했지? 낙원에 들어가서 사진 찍어 보냈다는 그 여자?" "신아영입니다. 한국을 빛낸 100인의 작가 중 한 명이라고 합니다." "노아 개인 교습 선생으로 왔다고 했지?" "예. 맞습니다. 이번 가을 제일 갤러리 정기 특별전 초대 작가라고 합니다. 민 대표가 신아영의 후견인으로 나서서 사모님께 합의를 받아냈습니다." "민 대표 당장 불러들여." "예!" 임 총재의 수심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임기 말년에 악재가 아닐 수 없었다. 정계를 떠나 말년을 유유자적하며 대대손손 대물림할 황금알을 낳아줄 거위를 잡으려는 순간이 아닌가. 하필 이 찰나에 박찬혁이라는 마가 끼어도 단단히 끼어버렸다. 노아의 마약류 관련법 위반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수차례 돌려막아 놓은 게 제대로 크게 터질 판이다. 그것도 발뺌할 수도 없게 증거와 증인까지 대동하고 박찬혁이 총대를 멨다. "단순 폭행 시비로 합의까지 해줬는데 이게 지금 뭐 하는 수작이야! 배은망덕한 놈! 호텔컨벤션센터 후보 지명에 압력을 넣겠다, 이건가?" 노아 사건을 시작으로 잘못하면 과거 각종 건설 입찰 과정에 개입해 거둬들인 비자금 비리가 하나하나 드러날 수도 있는 일이다. 분개해 벌겋게 달아오른 임 총재의 안색이 이내 잿빛으로 변해갔다. *** "저희야 파라다이스 그룹과 협력관계를 맺을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시작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한국 시장으로 진입 하려는 이유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한류 붐의 위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죠." 한류 붐을 타고 국내 유입 해외 관광객의 수가 해마다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한 증가 추세를 반영하기라도 하듯, 한국 내 입점을 희망하는 해외 유수의 숙박 업계에서 파라다이스 그룹으로 보내는 러브콜이 쇄도하고 있었다. 몇몇 후보 중에 찬혁은 영국의 클럽 상그리아를 협력 업체로 선택했다. 남태평양과 인도양 등, 해외 각 지에 리조트를 보유하고 있는 국제 규모의 대기업이었다.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는 파라다이스 그룹 입장에서는 파트너 선정권을 쥐고 이미 협상의 우위에 올라 서 있는 유리한 상황이었다. "국내 숙박업 현황은 현재 포화 상태라 경쟁이 치열하긴 합니다만, 차별화 전략만 잘 갖춘다면 오히려 성공하기 쉬울 수 있죠. 차별화라는 게 아시다시피 아이디어만 가지고 되는 건 아니잖습니까." "재정 지원을 염려하시는 거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 상그리아는 차별화 전략으로 고급화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최고의 시설에서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최대의 이익을 남기는 것. 이것이 클럽 상그리아의 영업 방침입니다." "그 점에서는 우리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군요. 거기에 더해서 천상의 휴식을 제공하는 것. 그것이 파라다이스 그룹의 일관된 목표죠. 남태평양이나 인도양 쪽으로 눈을 돌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클럽 상그리아는 최고의 파트너가 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잘해봅시다." "파라다이스 그룹과 협력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기대가 큽니다. 클럽 상그리아를 선택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5시부터 시작된 미팅이 8시가 다 되어 끝이 났다. 레스토랑으로 이동하며 찬혁은 김 실장으로부터 휴대폰을 넘겨받아 혹시 아영으로부터 연락이 온 게 있나 먼저 확인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였다. 가기만 해보라고, 가만 안 둔다고, 문자로 날린 엄포에 여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 후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갔다. '여태 자는 거야?' 아영이 집에 있는지 당장에라도 달려가 확인하고 싶어 가슴이 갑갑해졌다. 일어나는 거 보고 나온다고, 꼼짝 말고 기다리라는 신신당부를 반드시 해야겠다고, 나오기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렸지만, 결국 자는 걸 보고 나와야 했다. 저녁 식사는 강남에 위치한 500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한식 레스토랑, 경복궁에서 이어졌다. 비즈니스 접대에 최적화된 최고의 레스토랑답게, 전통과 멋, 그리고 고유의 맛까지 겸비해, 외국 손님을 접대할 때 찬혁이 늘 방문하는 곳이었다. 역시나 화려한 궁중 코스 요리의 향연은 클럽 상그리아 대표 마틴 옝을 매료시키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저녁 식사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무르익어 가는 와중에도 찬혁의 머릿속은 온통 아영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케이크는 좀 먹었으려나...' 민 대표와의 통화 때문에 마트고 뭐고 흥이 다 깨져버렸다. 제풀에 씩씩대느라 아영이 먹을 거라곤 아무것도 해놓지 못하고, 나오기 전에 김 실장 편에 받은 블루베리 케이크 하나 두고 온 게 다였다. 미안했다. 종일 빈속으로 누워 있었을 그녀를 생각하자, 눈앞의 산해진미가 자갈 같고 모래알 같았다. 입안이 껄끄러웠다. '아직도 잔다고? 설마. 지금 시간이 몇 신데. 간 거야? 설마. 나도 안 보고 그냥 갔다고? 민 선배와 통화 했겠지. 와서 데리고 간 거 아냐? 아 씨. 민 영환 이 인간이 진짜!' 혼자만의 문답이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접대까지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니 시간이 이미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간절한 바람은 이미 하얗게 날아가 버린 후였다. 기다릴 사람이면 전화를 받았겠지. 문자에 답이라도 했겠지. 그러나 부질없는 짓임을 알면서도 찬혁은 포기하지 않았다. "윤 비서. 일산 집으로 가지." "예? 아, 예. 사장님." 윤 비서는 호텔로 향하던 차를 돌렸다. 일산 집에 도착하니 나갈 때 켜놓고 나온 그대로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아영이 소파에, 아님, 침대 끝에 우두커니 앉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 정원을 가로지르는 걸음이 빨라졌다. 기대감이 부풀어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한껏 부풀어 올랐던 가슴이 폭삭 무너졌다. 아영의 신발이 보이지 않았다. 가버렸다. 맥이 탁 풀렸다. "차아." 기가 차 헛웃음이 터졌다. 언제 일어나 가버린 건지, 식탁 위에 준비해 둔 케이크는 손도 대지 않았다. 허탈함이 밀려옴과 동시에 울화가 치밀었다. 기어이 민 대표 집으로 기어들어 간 아영의 속내가 의심스러워지기까지 했다. 넥타이를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겨 벗겨버리고, 침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벽에 쿵 부딪히고 도로 홱 닫히는 문을 턱 붙들고 찬혁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너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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