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정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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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나서 그랬다. 기어이 도망가버린 아영이 기가 막혀 열이 있는 데로 뻗쳐 머리꼭지가 활화산처럼 열려버렸다. 뭐든 하나는 깨고 봐야겠기에 대뜸 방문 먼저 밀어젖혔다. 쿵 벽을 찍고 튕겨온 문틈으로 아영을 본 건 정말이지 뒤통수를 후려치는 반전이었다. 심장마비를 일으킨 사람처럼 입이 먼저 헉 벌어졌다. 벌컥 열리는 문에 놀라 침대 끝에서 화들짝 튀어 오르던 아영이, 그 기다림이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찔끔 비어져 나오기까지 했다. 놀라운 반사신경의 소유자답게 그 모든 반응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그런데도 찬혁은 버럭 소리를 질러버렸다. "뭐야 너! 왜 전화 안 받아! 메시지 못 봤어! 왜 사람 걱정하게 만들어!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그건 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어." 제가 한 걱정이 분해 못 견디겠는지, 찬혁이 한 대 칠 기세로 씩씩 다가왔다. 부연 설명 따위는 그의 분노를 잠재울 효력을 이미 잃은 듯 보였다. 그런데도 입을 닫을 수 없었다. 그의 시퍼런 서슬에 굴하지 않고 아영도 한발 성큼 나섰다. 버티고 기다린 이유를 말해주고 싶었다. 그 말 몇 마디 해주겠다고 온 저녁 내내 연습했다. '아' 다르고 '어' 다른 한 끗 차이로 말실수라도 할까 봐, 그럴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일어나지 않을, 그 쉬운 몇 마디를 맹연습했다. 마음의 준비라고 해야 맞다. 후 폭풍이 어떻게 불어 닥칠지 가히 짐작고도 남았으니까. "찬혁아. 나 이제 너랑 있고 싶... 흐읍!" 찬혁은 가차 없이 아영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입술 사이로 빨려 들어간 마지막 어 소리가 그의 입속에서 공명해 두개골이 다 울릴 지경이었다. 온몸의 신경 세포에서 증폭된 전압이 일제히 폭주하기 시작했다. 모세혈관이 터질 것처럼 팽창했다. 흥분을 주체하지 못해 말초신경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중심부부터 꼿꼿이 일어섰다. 시작도 하기 전에 절정에 도달한 사람처럼 찬혁은 몸을 떨었다. 아영의 고백은 그만큼 간절했던, 그가 죽기 살기로 매달린 이유였으니까. 지금이 바로 그에겐 절정의 순간이었다. 아영의 얼굴을 감싸 쥐고 굶주린 짐승처럼 입술을 허겁지겁 집어삼켰다. 500년 전통의 한식 레스토랑에서 맛본 산해진미의 저녁 만찬을 송두리째 잊게 만드는 오동통한 입술을 야무지게 돌려 물었다. 다디단 입술이 이제 완전히 제 것이라니 돌아버릴 것 같았다. 물고 터뜨려버리고 싶은 충동이 잇몸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그 쾌감에 다리 사이가 걷잡을 수 없이 부풀었다. 아랫배 어디쯤, 정확히 배꼽 밑에서 거대한 생명체가 용트림하고 있었다. 아영이 두려움에 몸서리를 쳤다. 이미 단단히 각오하고 기다린 후 폭풍이었다. 엄청나게 벼르고 기대했던 것도 같다. 그러느라고 말 몇 마디에 목숨 걸고 맹연습을 했다. 그런데 다리 사이를 겨냥한 이 생경한 꿈틀거림에 아영은 소스라쳐버렸다. 공포 그 자체였다. 작용을 기대하는 작용의 생체리듬으로 뒤바뀐 몸뚱이가 겁에 질려, 일순 뻣뻣하게 굳었다. 온몸을 뜨겁게 적시던 열감이 바짝 건조해져 버렸다. 경직되는 아영이, 그 긴장이 흥분돼 찬혁은 미쳐버릴 것 같았다. 머리를 감싼 손이 목을 끌어당기고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엉덩이를 움켜쥐고 와락 당기는 힘에 아영이 탄탄한 가슴에 납작 붙었다. 목을 휘감고 대롱대롱 매달린 아영을 안고 침대 위로 풀썩 넘어졌다. ***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하나가 된 두 사람의 몸짓이 단전에서 끌어올린 거친 신음과 함께 끝이 났다. 나른한 열기가 침실 안에 달큰하게 감돌았다. 번들대는 두 나신이 구겨지고 일그러진 침대 시트 위에 포개진 채, 맥없이 늘어졌다. 아영은 땀에 젖은 등을 꼭 끌어안았다. 여전히 성난 근육이 불끈댔다. 찬혁이 아영의 어깨에 파묻은 머리를 들어 올렸다. "분명히 말했다. 곱배기라고." "뭐! 난 못해 더는..." "못 들었잖아." "뭘..." "좋았어?" "......" "비명 질러댈 때까지야." 라면 곱배기가 무제한 먹방으로 이어질 판이었다. 이런 경험은 삼십 평생 처음이라 소리를 지르는 건 고사하고 숨소리마저 입속에 가두어 버린 아영이었다. 몸이 자지러질 때마다 저절로 신음이 비어져 나왔지만, 그마저도 앙다물고 모두 집어 삼켜버렸다. 미리 리액션 메뉴얼이라도 숙지했으면 좋았을걸. 목구멍으로 삼키기 바빴던 원색적인 소리가 찬혁이 벼르는 목표일 줄이야. 감히 입을 벌리고 새빨간 비명을 지르는 상상만으로도 얼굴이 수치심에 토마토처럼 익어버렸다. 붉게 상기된 얼굴을 준비 완료 신호라고 받아들였는지, 찬혁의 허리가 다시 바지런을 떨기 시작했다. 돌처럼 단단하게 올라붙은 엉덩이에 힘이 모였다. 준비 따위는 날 때부터 하고 나온 사람 같았다. 두 눈이 시작도 전에 야릇하고 음험하게 아영을 집어삼켰다. "아 잠깐만! 나 배고파!" "아. 너 종일 굶었지. 이런. 충전 먼저 하는 거로." 찬혁이 벌떡 몸을 일으켜 침대 끝에서 내려섰다. 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거실 불빛을 등지고 선 찬혁의 실루엣은 용사의 위용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위풍당당했다. 반면 부스스 몸을 일으키기 무섭게, 아영은 꾸깃꾸깃한 이불을 끌어다 가슴 앞을 가리기 바빴다. 중학교에서 성장을 멈춘 빈약한 가슴이 이렇게 남 보이기 부끄러운 몹쓸 것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드레스 룸에서 편안한 실내복을 걸치고 티셔츠를 챙겨 들고 온 찬혁이 필사적으로 가슴을 가리는 아영을 보고 픽 웃었다. 그리고는 이불을 와락 당겨 벗겨냈다. "어머! 뭐야!" "입으라고." 납작 웅크린 아영의 머리 위로 티셔츠를 포댓자루처럼 씌워놓고 찬혁이 밖으로 나갔다. "먹을게 케이크뿐인데. 어떡하지? 아영아, 뭐 시켜줄까? 아니면, 나가볼래?" "아니! 케이크 먹을래. 단 게 땡겨. 너무." "하하하 겨우 그거하고 당 떨어지면 난 어쩌라고 자식아." 찬혁의 웃음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포근하고 안락해서, 너무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래서 기억마저 아스라이 멀어진 스위트 홈 같아서 아영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가 따스한 집처럼 양팔 벌려 든든한 울타리를 치고 저를 감싸 안은 것만 같았다. 코끝이 찡 아렸다. 티셔츠를 입고 쭈뼛쭈뼛 식당으로 나갔다. 아영이 헐렁하고 긴 티셔츠를 걸치고 쑥스러운지 방문 앞에서 뜸을 들이다 나왔다. 태연함을 가장하느라 어설퍼진 걸음이 바짝 오므려 붙인 무릎 때문에 어정어정 식탁으로 다가왔다. 앞판인지 뒤 판인지 구분도 안 되는 가녀린 몸이 제 몸보다 두 배나 더 큰 티셔츠를 뒤집어쓰고 있는 게 이렇게도 야할 일인가. 찬혁의 시선이 아영을 위아래로 샅샅이 훑었다. "그만 봐. 쑥스럽게..." 냉큼 의자에 앉으며 쏘아붙이고는 찬혁이 잘라준 블루베리 케이크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영은 급히 파먹었다. 얼마 만에 맛을 음미하며 음식을 먹어보는 건지. 음. "볼 게 있어야 보지. 등에 얼굴 달린 줄 알았구만." "하아!" 부지런히 케이크를 찍어 입으로 나르던 포크가 순간 우뚝 멈췄다. 마지막 한 덩이를 꾹 찍어 입에 넣고 아영이 뾰로통하게 웅얼댔다 "아 진짜. 싫으면 말던가. 남의 약점은 기가 막히게 찔러대지." "약점? 가슴? 콤플렉스였어?" "어. 오늘부터. 너 때문에. 등에 얼굴 붙은 줄 알았다며. 앞뒤 구분 명확히 돼 있거든?" "하하하 아 자식. 그렇게 생긴 걸 그럼 뭐라 그래. 나만 좋으면 되는 거 아냐? 너무 섹시해서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자 봐. 이러면 된 거잖아. 안 그래? 찬혁이 증명이라도 하듯 제 다리 사이를 턱으로 가리켰다. 안 그래? 에 그렇다고 손이라도 번쩍 치켜든 것마냥 저지 팬츠가 불끈 일어섰다. 아영이 눈 둘 바를 모르고 케이크를 통째로 끌어다 시야를 가려놓고 파먹기 시작했다. "다 먹어. 오늘 밤샐 거니까." 이런 미친! 그러면서 설레는 건 몹쓸 기대심리 때문이었다. 기대한다. 또. 계속. 포크가 빨라졌다. "자 차 마셔. 천천히 먹어. 시간 많아. 체할라." 시간 많다는 소리에 목이 메어 차를 들이켰다. 친절이란 친절은 다 베풀 것 같은 선한 매너에 그렇지 못한 음탕한 눈을 하고 곧 잡아먹을 때를 기다리는 맹수처럼 앞에 버티고 있는 찬혁이 부담스러워 아영이 분주해졌다. 찍어 먹으랴 들어부으랴 정신을 못 차리는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찬혁이 뒤끝 있는 사람처럼 처음 질문으로 되돌아갔다. "기다릴 거면서 전화는 왜 안 받은 거야? 문자는 왜 맨날 무시하지?" "말했잖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고." "무슨 생각. 따지고 재볼 게 또 뭔데. 뭐가 더 있어?"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어서. 과연 내가 너한테 기다리겠다고 말해도 되는 사람인지..." "기다린 건. 된다는 확신이 생겼단 소리야?" "아니. 그래서 가려고 했어. 그런데. 가만 안 둔다는 네 메시지가 날 붙들어 세웠어. 네 문자 아니었으면 아마 나 어디로 증발해버렸을지도 몰라. 고마워. 잡아줘서." "뭐? 가긴 또 어딜 간다는 거야! 갈 데도 없는 게 매 도망이야 왜. 너 그거 습관이야. 아주 못 돼먹은 습관." "안 그러면 죽겠는 걸 어떡해 그럼. 여기도 안되고 저기도 싫은데. 단 하루만이라도 훌훌 다 털어버리고 바람처럼 자유로워지고 싶었어. 네 문자 아니었으면 지금쯤 어딘가에서 깃털처럼 떠다니고 있을 거야. 먼지가 되어 사라졌거나. 분명히." 방랑 시인 같은 뜬구름 잡는 소릴 해놓고 아영이 고개를 떨구었다. 미친놈처럼 물고 늘어지는 저를 버젓이 앞에 놓고도 그 오랜 시간 바람이 길 꿈꾸며 방황해야 했을 그녀가 안쓰러워 찬혁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새 입맛이 달아났는지, 먹지도 않을 거면서 애꿎은 케이크만 깨작대는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던 그가 가라앉은 분위기를 깨고 산뜻하게 일어났다. "2차 가자. 일어나. 옷 입고 차고로 나와." "어? 지금? 어디 가게?" 씩 의미심장하게 웃고는 찬혁이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아영도 꾸물꾸물 일어나 침실로 들어갔다. 바닥에 허물처럼 널린 옷가지를 주워 입는데 손끝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를 때까지 이어질 2차 생각에 흥분돼 심장이 난리가 났다. 허둥대는 걸음을 종종 재가며 차고로 나갔다. "신발이 여기 있었네. 현관에 네 신발이 없어서 너 도망친 줄 알고 열 받은 거 생각하면. 아 진짜." "근데 어디 가려고? 이 시간에? 벌써 새벽... 허!" 주춤대는 아영의 앞으로 공 하나가 날아왔다. 깜짝 놀라 받아 안고 보니 헬멧이다. "이게 뭐야? 너. 설마 저거 타자고?" 전시용인 줄 알았다. 흡사 갤러리를 연상시키는, 인간미라곤 찾아볼 수 없는 반듯한 차고 한쪽에 오토바이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한 마리 재규어처럼 매끈한 검은 자태를 뽐내고 서 있는 오토바이로 아영을 이끌며 찬혁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한다. 자기가 무슨 램프에서 나온 지니냐고! "바람이고 싶다며. 바람 제대로 느끼게 해줄게." "뭐? 오토바이 타다가 사고 엄청나게 냈다며! 죽을 뻔했다면서! 근데 지금 나보고 저걸 같이 타자고?" “봐. 아직 안 죽었잖아. 너무 멀쩡한데? 아까 보여준 거로는 부족해? 가서 마저 보여주지.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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