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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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은 사장실을 뛰쳐나왔다. 퇴근하려 몰려나오던 비서실 직원들이 사무실 앞을 후다닥 지나가는 아영을 보고 뜨아 한눈을 일제히 사장실 쪽으로 홱 돌렸다. "뭐야?" "누군데 저래?" "또 파라오?" "뻔하지 뭐. 재킷 핑계로 어떻게 좀 해보려고 왔겠지. 꼴 좋다." "저러고 싶을까?" 마지막 질문에는 비아냥이 짙게 깔려 있었다. 이젠 대놓고 수군댔다. 웅성거림이 모퉁이를 돌 참이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놓고 기다리던 아영이 바로 옆 비상구로 쏜살같이 몸을 숨겼다. 발에 모터가 달린 듯 다다다다 계단을 내려갔다. 달팽이관처럼 뱅글뱅글 도는 비상구를 미친 듯이 돌았다. 달팽이관이 삐 경고음을 울렸다. 고막이 찢어질 것 같았다. 아영은 가까스로 다리를 멈추고 난간에 매달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야 했다. 심장이 망가진 것 같았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심장 박동에 두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아영은 귀를 틀어막고 쪼그려 세운 무릎에 엎어졌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무릎이 뜨뜻하게 젖어 들었다. "하아! 이러고 싶냐 신아영!" 결국, 그들의 질문을 되물었다. 헛웃음이 터졌다. 파라오는 찬혁을 다시 만났던 룸살롱이었다. 또 파라오? 이렇게 한심한 여자가 처음은 아닌 모양이다. 그가 뻔한 여자를 다루는 방식이었을 테지. "꼴 좋다 신아영." 입술을 아프게 잘근 물었다. 피비린내가 확 끼쳤다. 소스라치게 놀라, 손으로 입술을 더듬더듬 만졌다. 제 상처가 아니었다. 찬혁의 피였다. 아영은 손등으로 입술에 묻은 피를 마구 문질러 지웠다. 할 수만 있다면 입술까지 다 지워버리고 싶었다. "하아. 정말 이러고 싶니..." 그들과 같은 편에 서서 아영은 너덜너덜해진 제 자아를 비웃었다. 우스운데 눈물이 쉴새 없이 흘렀다. "못되게 굴면서 붙들고 안 놓아주는 거 그거 좋아한단 뜻이야." 아영은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십 년간 저를 괴롭혔다는 여자를 괴롭게 만들어 주겠다는 찬혁의 엄포가 어이없게도 다행스러웠다. 괴롭히는 동안은 좋아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도망가려고 발악을 해도 괴롭히려면 붙잡을 테니까. 차 안에서 당한 모욕적인 키스도, 창고에서 당했던 폭력적인 키스도, 좋아하는 것이라 받아들였다. 그러나 자아가 박살 나고 자존감이 짓밟혀도 다행이라고 눈물 글썽 일만큼 싸이코는 아니다. 배 위에 올라타고 짓이기는 야만을 좋아할 만큼 변태도 아니다. 아니고 싶다. 아니어야 한다. 이런 사랑은 더더욱. 아영은 고개를 들었다. 연분홍 린넨 바지 무릎이 눈물에 얼룩지고 그 위에 마스카라가 검게 엉겨 붙었다. 하필 오늘따라 덧칠하고 나온 눈화장까지 사람 기분을 처참하게 했다. 아영은 눈물이 얼룩져 꾸덕꾸덕해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싹싹 문질러 닦고, 휴대폰을 꺼내 카메라를 켜 눈가를 확인했다. 가관이었다. 도망쳐 나온 상황보다 이젠 제 꼴이 더 기가 찼다. 난간을 부여잡고 여전히 후들대는 다리를 일으켜 세웠다. 다리가 연체동물처럼 흐느적흐느적 계단을 흘러내렸다. 1층 복도로 나와 화장실 먼저 들렀다. 휴지에 물을 묻혀 눈가에 번진 마스카라와 아이섀도를 박박 지웠다. 소용없었다. 더 우스워졌다. 코메디가 따로 없다. 아영은 고개를 푹 숙이고 로비를 빠르게 가로질러 호텔을 빠져나왔다. 버스정류장도 전철역도 그대로 지나쳤다. 탈 마음도 없었지만, 다리가 아파도 탈 수가 없었다. 얼룩진 눈가 때문에라도 발가벗겨진 기분이 다 탄로 날 것 같았다. 더 이상의 수군거림도 수치심도 감당할 깡이 남아 있지 않았다. 밤거리를 정처 없이 걸어 마침내 눈에 익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골목 끝에 서서 하늘로 뻗은 언덕길을 굽이굽이 올려다보았다. 추억의 길은 이제 사라졌다. 언덕을 오르는 동안 텅 빈 위가 아우성쳤다. 생각해보니 종일 굶다시피 했다. 그러나 속을 챙겨줄 정신이 없었다. 온 정신이 머릿속에 맴도는 질문 하나 감당하기도 벅찼다. '사랑이 맞을까.' 고통에 몸부림쳤다면서도 찬혁은 추격을 포기하지 않았다. 못되게 굴면서도 놓아주지 않았다. 사랑인 줄 알았다. 그러나 오늘 찬혁의 행동은 애증과 집착의 결과이다. 왜곡된 사랑의 증거이자, 폭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가슴이 아팠다. 그의 사랑을 왜곡시키고 그의 사랑 방식을 일그러뜨린 책임이 저에게 있음을 아영은 모르지 않는다. 그렇다 치더라도 분노와 실망을 감출 수가 없었다. 뻔한 여자 취급당하고 보니, 사랑해서 어쩔 수 없이 떠난다는 신파가 측은하기 짝이 없었다. 가소롭고 비참했다. "거길 다시 찾아가면 내가 인간이 아니다!" 악연으로 전락해 버린 게 서글펐다. 아영은 겨우겨우 언덕 끝에 올라섰다. 배가 등가죽에 달라붙어 허리가 저절로 휘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곧 주저앉을 것 같은 두 다리가 펄쩍 돌아섰다. "허! 내 가방!"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악이라도 빽 쓰고 싶었다. 삼재의 굴레이거나 아홉 수의 저주가 분명했다. 아니면 둘 다이던가. 화백을 거기, 찬혁의 책상 옆에 두고 와버렸다. *** 찬혁은 주섬주섬 셔츠 단추를 채우고 소파 끝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랫입술이 쓰라렸다. 손끝으로 쓸어 보았다. "아! 아..." 손끝에 피가 묻어났다. 테이블 위에서 티슈를 뽑아 손을 닦고 입가를 눌렀다. 그러고 우두커니 앉아 서재 문밖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미친놈." 자괴감이 밀려왔다. 미안하다는 말, 어차피 십 년 동안 하루에도 수백 수천 번 했는데, 한 번 더 해주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들고 억울했냐. 치졸한 새끼. 티슈를 구겨 테이블 위에 신경질적으로 던져 버렸다. 지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겨 놓고 제 입술 아파하는 꼴이 혐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행어에 걸린 자켓을 보니 다시 열이 뻗쳤다. 저거 핑계로 여기까지 겨우 왔을 애를 그 지경을 만들어 쫓아 버렸다. 말귀를 못 알아 처먹는 건 바로 저였다. 책상 위에 뒹구는 위스키병을 괜스레 탁 세웠다. 차라리 떡이 되게 마실걸. 이젠 술맛도 떨어져 버렸다. 홱 돌아서서 창에 손을 짚고 한데 엉켜 번쩍이는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 불야성 너머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는 아영의 뒷모습이 눈에 선했다. 길가 포장마차 구석에 찌그러져 어묵 국물에 소주 푸고 있는 건 아닌가. 밥은 먹고 마시나. 스테이크 타르타르는 예의상 깨작깨작 몇 번 뒤집어만 봤을 게 뻔한데. 여기 온 시간을 보니 저녁도 거르고 왔을 텐데. 빈속에 소주. 잘하는 짓이다. 그러고 울면서 언덕을 꾸역꾸역 올라갈 아영을 생각하자 가슴이 욱신 조였다. 가증스러운 놈. 그러라고 만신창이를 만들어 보내 놓고 인제 와서 신파를 떨고 있는 게 역겨워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아!” 피비린내가 확 끼쳤다. 혀끝에서 비릿한 쇠 맛이 났다. 찬혁은 책상 위에서 티슈를 뽑아 입술을 누르며 의자에 털썩 떨어졌다. 등받이에 푹 기댔다. 멀거니 뜬 눈에 책상 옆에 가방이 누워있는 게 보였다. 가방이 꽤 컸다. 부시시 몸을 일으켜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렸다. 신아영. 가방 아래쪽 귀퉁이에 이름이 그려져 있고, 채색돼 있었다. 별도 하트도. 유치한 건 여전하네. 픽 웃음이 일었다. 찬혁은 가방을 내려다보며 잠시 망설였다. '100인의 아티스트 축하도 아직 못 해줬네...' 아영이 그림을 그리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림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뭔가를 끄적이다가도 기웃이 넘겨다 볼라치면 후다닥 가리기 바빴다. 그걸 어떻게든 보겠다고 노트를 뺏으려 엎치락뒤치락 몸싸움을 벌이곤 했다. 그러나 가슴 앞에 노트를 꽉 쥐고 바짝 웅크린 아영을 안고 구르는 동안 그림은 어느새 하얗게 잊어버렸다. 쥐방울만 한 게 힘은 얼마나 센지. 오그린 팔 하나 펼치는데도 이마에서 땀이 다 삐질삐질 비어져 나왔다. 동작은 또 얼마나 잽싼지. 다른 팔 붙드는 사이에 겨우 펼쳐놓은 팔이 도로 또르륵 오그라들었다. 에이씨! 모르겠다! 늘 먼저 포기한 건 저였다. 애벌레처럼 동그랗게 말린 아영을 안고 뒹굴어 버렸다. 어쩌면 그게 목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품속에서 꺅꺅 항복을 외칠 때까지 놔주지 않았다. 항복을 받고도 오래오래 뒹굴었다. 결국, 매번 노트도 못 뺏고 그림도 못 봤다. 찬혁은 가방 지퍼를 열었다. 똑 똑 똑 지퍼를 닫고 가방을 책상 옆에 세웠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문이 열렸다. 리나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들어왔다. "찬혁아! 괜찮아?" "괜찮을 리가 없잖아. 여긴 뭐하러 왔어? 밖에 취재진이 진을 치고 있는데 함부로 들락거리지 마." "왜 오긴. 걱정돼서 왔지. 혼자 술 마셨니? 나 부르지 그랬어! 어머! 입술은 왜 그래? 누구랑 싸웠어? 어디 봐." 리나가 입술로 손을 뻗었다. 찬혁이 손을 밀어냈다. "별거 아냐. 나 내일 목포 현장 내려가 봐야 해. 준비할 것도 있고, 얼굴 봤으니 그만 가라." "저녁은 먹었어? 점심도 못 먹고 갔잖아. 식사할 정신도 없었지. 뭐 좀 먹을래?" "생각 없어. 속도 거북하고. 신경 쓰지 말고 가." "신경이 어떻게 안 쓰여. 우리가 하루 이틀 만난 사이도 아니고. 너야말로 나 신경 쓰지 말고 할거해. 끝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릴게. 속 좀 가라앉게 차 한 잔 줄까?" 리나는 자켓을 벗어 소파에 던져 놓고 서재 바로 향했다. "너 말조심하고 다녀. 같은 학교 다닌 거로 하루 이틀 만난 사이 어쩌고 하면 듣는 사람 오해해. 그러니까 민 선배가 우리 볼 때마다 공개연애니 이딴 소리 하는 거 아냐." 리나가 서재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컵 두 개를 들고 나왔다.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같이 다녔으면 그런 소리 할만도 하지 않어? 보통 인연이 아니라고 본다 나는. 쿨 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다른 사람 말은 왜 그렇게 신경 쓰는데? 그러려니 해버리면 되지. 너처럼 발끈발끈하는 게 더 수상해 보이겠다. 자 한잔하고 일해." 찬혁은 컵을 받아 들고 소파에 앉았다. 리나가 곁에 나란히 앉았다. "근데 민 선배 말야. 아영씨한테 진심이더라. 곁에 꼭 붙여놓으려고 맘 단단히 먹었더라고. 우리 갤러리에도 한 번 초대 하려고 하는데 철벽 방어하더라니까." "......" "말끝마다 우리 아영 씨, 우리 아영 씨 하는데, 완전 푹 빠졌더라니까. 아영씨도 싫은 눈치 아닌 것 같고. 곧 열애설 나는 거 아닌지 몰라. 벌써 3년이나 같이 일했다던데, 혹시 비밀 연애 중 아냐?" "안가?" "응?" "그만 가라고. 그딴 얘기 듣을 시간 없어. 나 일해야 해. 가봐." "왜. 아영씨 얘기 듣기 거북해? 아직 못 잊은 거야?" 찬혁이 돌아보았다. 리나가 태연하게 차를 호로록 들이켰다. "아영씨 언제 다시 만났어? 오늘 처음 다시 본건 아닌 것 같던데." "그게 왜 궁금한데. 너랑 상관없는 일에 신경 꺼라." "너랑 상관있으니까. 신경 쓰여. 민 선배랑 같이 나온 거 보면 아영씨도 맘이 없진 않은가 봐?" "가. 멀리 안 나간다." 찬혁이 먼저 일어나 책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뭐해. 가라니까." "알겠다고. 간다고 가. 쌀쌀맞기는. 응? 근데 이런 게 왜 여깄어? 설마 네가 그림을 시작한 건 아닐 테고. 누구 거야? 신아영? 아영씨 여기 왔다 갔어? 오늘?" "채리나. 가란 말 못 들었어? 너까지 일부러 와서 스트레스받게 하지 말고 가라고." "아이. 알았어. 소릴 지르고 그래. 일해. 그럼 난 간다~" 리나가 소파에서 자켓을 낚아채 어깨에 휘릭 둘렀다. "아. 우리 갤러리 1주년 기념 자선 인의 밤 이벤트 있어. 올 거지?" "봐서." "다음 주 금요일인데." "시간 없어." "민 선배 올 거야. 아영씨 데려온다던데? 공개하려나 봐. 첫 공식 석상이 되겠네. 공개연애. 뜻깊은 자리가 되겠어. 너도 시간 내서 와줘. 나 짝없거든. 간다~" 리나가 경쾌하게 손을 흔들며 방을 나갔다. 찬혁이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삐딱하게 섰다. 자세보다 기분은 더 삐딱했다. “공개연애? 차아!” 헛웃음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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