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먹고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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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 똑 똑 머리를 털다 말고 아영이 화장실 문을 열었다. 삼단 같은 머리칼을 한쪽 어깨 앞에 모아 수건으로 탁탁 두드리다 말고 귀를 쫑긋 세웠다. 똑 똑 똑 물소리 때문에 잘못들은 게 아니었다. 아영은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 틀어 올렸다. 고무 슬리퍼를 파닥파닥 벗어 던지고 화장실을 뛰어나왔다. 심장이 요동쳤다. 무섭게 널을 뛰었다. 동시에 서늘한 냉기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쫙 끼쳤다. 아영은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아영아." "허!" 나쁜 예감은 늘 찰떡같이 들어맞았다. 삼재의 굴레는 어김없이 굴러왔다. 아홉 수의 저주가 풀리려면 아직 반년이나 남았다. 찬혁이 입구에 버티고 서있다. 도망칠 뒷문도 없다. 사면초가란 딱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문 앞으로 한 발짝도 다가가지 못하고 아영은 두 개의 갈등 사이에서 갈대처럼 휘둘렸다. 열어? 말어! 열어도 무섭고 안 열어도 무서웠다. 밖이 잠잠해졌다. 간 거야? 아영이 발소리를 죽이고 문짝에 귀를 딱 붙였다. 똑 똑 똑 "허!"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문 좀 열어줘. 허리 아퍼." 아프다는 말에 아영이 반사적으로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얼굴에 확 끼치는 술 냄새가 아까보다 더 독했다. 계단 마지막 칸에서 내려오지도 못하고 찬혁이 노크 자세로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문이 열려 마침내 내려설 공간이 생기자, 찬혁이 비틀 내려섰다. 내려서니 이미 방안이었다. 아영이 뒤로 펄쩍 물러났다. "또 술 마셨어?" 아영은 제 입에서 툭 튀어나온 첫마디에 소스라쳤다. 그 험한 꼴을 당하고 와놓고, 못 끝낸 걸 마무리하러 쫓아 온 것인지도 모르는데, 왜 왔냐도 아니고 꺼져도 아니고 술 마셨냐니. 걱정이 웬 말이냐고. 달려가 부축하지 않은 게 용했다. 기가 차고 한심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영의 본능이다. 그에게만은 이성보다 본능이 한발 앞서 나갔다. 찬혁에게는 늘 그랬다. 아영이 아랫입술을 잘근 물었다. "응. 마셨어." 찬혁이 웅얼거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손바닥이 날아올 줄 알았다. 그럴 줄 알고 두 볼에 만반의 준비를 시켰는데. 또 술 마셨냐고 묻는다. 그 꼴을 당하고도 걱정이 앞서나 보다. 공개연애 같은 거 하기만 해보라고, 전시회도 다 때려치우라고, 민 대표한테서 떨어지라고 한바탕 흔들어 줄 기세로 왔는데. 아영의 걱정 한마디에 찬혁이 무력해져 버렸다. "미안해서." "미안한데 술은 왜 먹고 와?" "미안하니까." 어느새 전세가 역전되어 있었다. 비좁은 반지하 방이 찬혁 하나로도 꽉 차 보였다. 그 자체로도 충분히 위협적이고 공포스러웠다. 그런데 찬혁이 저자세로 나왔다. 미안해서. 미안하니까. 찬혁이 사과하는 방식이다. 미안할 때면 늘 그랬다. "오늘 네가 저지른 만행을 미안하단 말로 무마하려는 거야? 난 정말 널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리라 믿었는지, 그런 생각을 했다는 자체가 기가 막힌다고." "미안해 말고 알려줘. 사과할 수 있게. 진심이다." "하아!" 사과도 참 당당했다. 그러나 아영의 두려움이 거짓말처럼 차츰 가라앉았다. 미안하다는 찬혁의 말이 개망나니 아이의 고해성사처럼 감격스럽게 들리기까지 했다. 문제는 늘 저였다. 찬혁을 저버리지 못했다.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이거 놓고 갔더라." "내 가방!" 아영은 앞에 내민 화백을 팩 받아 들었다. "중요한 거 같길래 가져왔어." "굳이 들고 온 이유가 뭐야? 중요해 보였다면 굽히고 들어갈 때까지 기다릴 사람이? 가방은 핑계겠지. 원하는 게 뭐야." "재켓 들고 찾아온 거랑 뭐가 달라. 말귀도 못 알아듣더니, 이젠 눈치도 없어진 거야?" 자켓을 안고 간 저나 가방을 들고 온 찬혁이나 다를 게 무엇인가. 그 진심을 알면서도 고맙다는 말 대신 아영은 벌처럼 쏘아 부쳐버렸다. "봤어?" "어." "뭐? 남의 걸 왜 허락도 없이 맘대로 봐!" 그림 몇 장이 고작인데, 일기장이 읽힌 것처럼 부끄럽고 쑥스러웠다. 제 진심이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봤지." "뭐?" "안 보여주려고 그거 끌어안고 버틸 거잖아. 그럼 또 달려들어 붙들고 뒹굴어? 뭐야. 그거 원한 거야 설마?" "뭐? 하아!" 헛웃음을 터뜨렸지만, 아영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찬혁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게 뭐라고 한번 보자는 걸 기를 쓰고 감췄었다. 그러면 어김없이 찬혁이 달려들었다. 이게 진짜 뭐라고 찬혁은 늘 집요했다. 빼앗으려고 등에 악착같이 감기는 찬혁이 좋았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버텼다. 영영 못 보게. "근데 그거 나야? 나 같이 생겼던데." "어딜 봐서 너야? 인물화 아니거든? 전부 추상화야. 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내가 추상적으로 생기긴 했지. 잘 그렸더라. 그림은 잘 모르지만 보자마자 난 줄 알겠던데 뭐." "무슨 술주정이야..." 아영은 더는 얼굴을 똑바로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홍당무가 된 얼굴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가방을 치우는 척 돌아서 버렸다. 치워봤자 등 뒤였다. "늦었지만, 한국을 빛낸 100인의 아티스트 된 거 축하한다."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다 말고 아영이 주춤 멈췄다. "진심으로 축하해. 대단하네, 신아영." "....... 고마워." 눈물이 핑 돌았다. 아영은 슬로우모션으로 느리게 일어섰다. 대단하네, 신아영. 가슴이 뭉클해졌다. 참 고단했고 고달팠었지. 순식간에 그 모든 날이 과거형이 되어버렸다. 찬혁의 한마디에 뿌듯한 추억이 되어 밀려왔다. 어쩌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염치없게도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이. 아영이 돌아섰다. "...... 좀 앉을래?" "응..." 찬혁은 안도했다. 이제 용건 끝났으면 가라고 할까 봐 순간 조마조마했는데. 가방 핑계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가슴 졸였는데. 가라고 꺼지라고 몰아내 버리면 또 쥐고 흔들 수밖에 없잖아. 그런데 아영이 곁을 내주고 있다. 얼마나 다행인지, 아영이 앉으라고 권하는 매트리스가 요람처럼 안락해 보이기까지 했다. "뭐 좀 마실래? 술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시원한 거 한 잔 줄까? 정신 좀 들게?" "정신 멀쩡해. 술주정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물 한 잔만 줘." "어..." 어색해 죽겠는데 좀 더 복잡한 걸 시키지. 아영의 동작이 굼떴다. 씽크대 캐비넷에서 컵 하나를 꺼내 바로 옆 냉장고로 이동하는데 몸이 로봇처럼 움직였다. 팔다리가 어색하게 굳어버렸다. 뒤통수가 따가웠다. 돋보기 아래 하얀 점을 모아놓고 찬혁이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타 죽을 것 같았다. "저기, 나 커피 마실 건데 너도 한잔할래?" "어 그럼 한 잔 줘. 커피 생각이 간절하긴 하다." "그랬어? 진작 말하지. 잠깐만 기다려. 내려줄게." 아영이 그제야 분주해졌다. 손이 집중할 게 있으니 맘도 부담을 한결 덜었다. 포트 스위치를 켜고 물을 끓이고, 서버에 드리퍼를 올려 필터를 끼웠다. 원두 백을 열자 커피 향이 확 풍겼다. 음. 저절로 추임새가 흘러나왔다. 필터에 평평히 눌러 담고 펄펄 끓어 오른 물이 뜨거운 김을 빼도록 포트 뚜껑을 열고 빙글빙글 돌렸다. 한소끔 김을 뺀 더운물을 필터 위에 동그랗게 부어 원두를 적시자 지하에 커피 신선한 향이 가득 찼다. "음. 향 좋다. 무슨 커피야?" "좋아? 이거 콜럼비아, 브라질, 에티오피아, 과테말라 원두를 4대3대2대1로 블랜딩 한 거야. 콜롬비아 커피는 시금털털한 끝 맛이 싫었는데 브라질 원두가 달콤한 캬라멜 향이 나서 신맛을 중화시켜줘서 좋더라고. 그리고 에티오피아랑 과테말라 원두는 독특한 풍미를 더 해준 달까?" 쪼로록 쪼로록 더운물을 부어가며 아영이 제법 전문가답게 설명을 했다. 텅텅 비어있던 냉장고를 생각하면 커피 믹스만 타줘도 감지덕지할 판인데, 제법 갖추고 프로다웠다. 아영의 잘록한 뒷모습을 감상하는 건 커피 향보다 더 좋았다. "어디서 배운 거야? 제법인데?" "아는 사람한테. 이렇게 내리고 있으면 나도 내가 그럴듯해." 민 대표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배운 걸 찬혁의 앞에서 보란 듯이 시연해 보이는 꼴로 괜한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은 진심이니까. 커피에도 찬혁에게도. "뭐가 없어도 너무 없길래 커피 믹스 타줄 줄 알았지. 여기서 제대로 된 커피를 마실 줄은 몰랐네." "커피 믹스? 그것도 좋지. 근데 내가 커피엔 진심인 편이거든. 커피 한 잔의 여유. 이 순간만큼은 여유롭고 싶은." "알겠는데. 근데 언제 맛볼 수 있는 거야? 여유 맛보려다 목타 죽겠어." "그래서 더 맛있는 거야. 애태우는 맛까지 더해서. 이제 거의 다 됐어." 두어 번 더 물이 쪼로록 쪼로록 부어지고 중간중간 기다리는 단 몇 초의 시간이 찬혁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차라리 커피 믹스가 더 나을 뻔했다. 찬혁이 기다리는 건 어차피 커피가 아니었으니까. "자. 다 됐어. 마셔봐. 뜨거워." "음. 향 좋다." 찬혁에게 긴 머그컵을 넘기고 동그란 커피잔을 양손에 모아들고 아영이 조금 떨어져 앉았다. 그리고 둘은 동시에 호로록 커피를 들이켰다. 한 모금. 두 모금. 세 모금. 말없이 커피만 음미했다. 방안을 가득 채운 커피 향이 달달 해졌다. 너무. "머리 감았어? 이러고 있는 건 여전하네." "어? 어머!" 아영이 화들짝 머리를 만졌다. 잊고 있었다. 수건이 터번처럼 감겨 있었다. "이리와 봐. 내가 벗겨줄게. 커피 마셔." "아니야! 내가 할게. 괜찮아." "아 뜨거!" "어머!" 찬혁의 손을 쳐내며 머그컵까지 날려버렸다. 가슴에 뜨거운 커피 세례를 받자마자 찬혁이 스프링처럼 벌떡 튀어 올랐다. 그 와중에도 매트리스를 버렸을까 봐 퍼뜩 돌아본다. “어머! 어떡해! 괜찮아? 데인 거 아냐?” 셔츠를 벌려서 볼 수도 없고, 아영은 미안해 어쩔 줄을 몰랐다. “아 뜨... 아 다 젖었네. 나 좀 씻을게.” “어 찬물로 얼른 씻어! 데였는지 확인해봐. 수건 차게 적셔서 대고 있고.” 찬혁이 화장실로 들어갔다. 문밖에서 아영이 안절부절못하고 서성였다. “어때? 데였어? 괜찮아?” “아 빨간데... 괜찮을 것 같아. 갈아입을 옷 있어?” “어? 갈아입을 옷은... 왜?” 샤워기가 쏴 틀어졌다. '대충 눌러 닦고 나와서 그만 가지? 사이즈 보면 모르나? 내줄 옷이 어디 있다고!' 그러나 찬혁은 갈 마음을 접은 것 같았다. 적어도 당분간은 안 갈 심산인 게 분명했다. 커피 한 잔의 여유가 불러온 대참사였다. 아영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커피 내리는 것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리는 걸 찾아야 했다. '셔츠 대충 마를 때까지 둘이 하면서 시간 끌 만한 게 뭐지? 종일 빈속이었는데 뭘 좀 시켜 먹을까? 주문해놓고 둘이 멀거니 앉아 기다린다고?' 생각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 분주해야 했다. '뭐든 해 먹자! 그래. 겸사겸사.' 후다닥 달려가 냉장고를 열었다. 케비넷을 순서대로 열어 보았다. 씽크대까지 구석구석 뒤졌다. 제대로 해먹을 수 있는 건 라면 두 봉지가 다였다. "하아..." 아영은 화장실 앞으로 주뼛 다가갔다. 문에 입을 바싹 갖다 대고 소심하게 웅얼거렸다. "저기... 찬혁아, 라면 먹을래?..." "라면? 좋지~!" 세찬 물소리에도 찬혁이 귀신같이 알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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