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소리가 뚝 끊겼다. 매트리스 위에 옹색 맞게 앉아 있던 아영이 흠칫 얼어붙었다. 화장실에서 나올 찬혁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상상이 너무나 적나라해서 얼굴이 다 발개졌다.
"그 몸에... 이게 소용이나 있으려나?"
갈아입을 옷이라고 꺼내놓은 샤워 가운이 쫄쫄이 가디건처럼 보였다.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웃기거나 야하거나. 어느 것이 되어도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예. 뭐라구요? 하... 예."
찬혁의 통화 소리가 밖으로 웅웅 새어 나왔다. 한숨 소리가 깊고 무거웠다. 호텔 안팎의 상황이 다시 떠올랐다. 아영은 화장실 앞으로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없습니다. 보상도 물론 없습니다. 여론몰이에 휘둘릴 생각 없습니다. 사태 해결 방안은 이미 말씀드렸을 텐데요. 예. 지금 들어갑니다. 준비해놓으세요."
통화가 끝나자 찬혁의 한숨 소리가 다시 터졌다. 아영이 문에서 물러났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화장실 문이 열리자 아영이 샤워 가운을 들었다. 그런데 찬혁이 커피 얼룩이 진 셔츠를 그대로 입고 나왔다.
"지금 가봐야 할 것 같다."
"무슨 일인데? 호텔 주변에 취재 차량 몰려있는 거 봤어. 심각한 일이야?"
"취재 차량 봤으면 심각한 거 알 거 아냐. 9시 뉴스 안 봤어?“
"티비가 없어서."
변명이 너무 구차해서 아영이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사실 텔레비젼이 있어도 볼 시간도 없지만, 오늘은 볼 정신도 없는 날이었다. 그런데 9시 뉴스라니. 걱정이 왈칵 밀려왔다.
”심각한 일도 있는데, 뭐하러 여기까지 왔어. 가방은 나중에 줘도 되는데.“
“나한텐 네가 더 심각해. 항상 그랬어.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러니까...”
찬혁이 신발을 신고 돌아섰다. 아영의 손에 들린 샤워 가운을 보았다.
"그거 입으라고?"
"어? 어... 마땅한 게 이것뿐이라."
"마땅한 거? 야한 거 좋아해? 없으면 웃통 벗고 있어도 되는데. 웃통 벗은 거 처음도 아니잖아. 벌어진 옷 사이로 가슴 부풀어 오른 걸 보는 것보다 안 나은가?"
"됐거든! 심각하다며. 가 얼른."
대화 내내 아영의 눈이 찬혁의 입술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건 아닐까. 도망가려고 미쳐 날뛰다가 물었으니 상처가 깊을 것이다. 아영의 시선에 찬혁이 입술을 스윽 쓸었다.
"하마터면 그게 마지막 키스일 뻔했다."
"입술은... 괜찮아?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냐? 사람한테 물려도 위험할 수 있거든."
"알면서 이 지경을 만든 거야? 뜯어 먹는 줄 알았잖아."
"그러게 누가 그런 야만적인 짓을 하래? 안 뜯긴 게 다행인 줄 알아."
"그러니까 반항하지 말고 순순히 좀 따라오라고. 나 원한다며. 그 말 하러 왔다며. 즉흥적으로 던진 소린 아닐 거 아냐. 그런 놈이 왜 그렇게 죽기 살기로 내빼냐고. 사람 미치고 환장하게. 잘못했어, 안 했어."
차라리 주관식이면 답을 할 텐데. 아영은 억울하게 혼나는 아이처럼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찬혁이 불쑥 다가왔다.
"......!"
허리를 와락 당겨 한쪽 팔로 휘감고 찬혁이 입을 맞췄다. 또다시 갑작스럽게 달려든 찬혁을 밀어내려고 어깨를 붙들었다. 몇 번 버둥대던 팔이 이내 그의 목에 감겼다. 앉으라고 자리를 내어줄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아니 기대한 것 같다. 아영의 입술이 흐물흐물 열렸다. 순식간에 입술을 가르고 찬혁이 밀고 들어왔다. 제멋대로 물고 맛보고 탐닉했다. 고작 몇 걸음 밀려났는데 벽에 부딪혔다. 벽에 밀어 넣을 기세로 밀어붙였다. 숨이 막혔다. 늘 이런 식이다. 그러나 아영은 헤어나오지 못하고 허우적대며 원했다. 아. 겨우 참고 있던 신음을 흘렸다. 찬혁의 입술이 목에서 물러갔다. 그리고 새빨갛게 달아오른 아영을 눈으로 집어삼킬 듯 내려다보았다.
"원하는 거 맞네."
"뭐? 저리 가!"
그러나 민다고 밀려날 찬혁이 아니었다.
"괜히 힘 빼지 말고. 이러고 잠시만 있자. 나 곧 가야 해."
아영이 버티던 손을 멈추고 찬혁을 마주 보았다. 단 몇 분의 격정으로 후끈 달아오른 숨이 뜨겁게 섞이고, 맞닿은 가슴이 훅훅 오르내렸다. 찬혁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네가 하고 싶다는 말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진심을 속이진 마라. 어차피 알게 된 바에야 속일 순 없는 거야. 알아?"
"......"
"라면은 달아놔. 목포 다녀와서 먹을게. 난 무조건 곱배기야."
라면 두 그릇이 중의적인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는 것에 아영은 놀랐다. 그걸 모른척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았다. 그렇다고 낯부끄러워 할만큼의 순진함이 아주 없진 않았다. 아영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동그래진 눈을 들여다보며 찬혁이 픽 웃었다.
"말귀 못 알아듣는 거 아니네. 신아영. 모른척한 거 맞네."
"아. 몰라. 가 얼른!"
"어쭈. 쥐방울만 한 게. 귀여운 자식."
"어머!"
빠져나가려 용을 쓰는 아영을 번쩍 들고 찬혁이 입술을 내밀었다. 눈을 흘기면서도 쪽 입술을 부딪쳤다. 어느 틈엔가 반항이 귀여운 앙탈로 탈바꿈했다. 설레는 짓이 되어버렸다.
"간다. 문 단단히 걸고 자. 내 꿈 꿔라."
"어..."
대답이 자판기 캔커피처럼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자동으로 나왔다. 고장 난 게 분명했다.
***
언덕 끝에 올라선 리나의 하이힐 앞 코가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톡톡톡톡 두드렸다. 고갯마루를 넘으며 거세진 산들바람이 실크 스커트 자락을 부풀리며 지나갔다. 헤어 라인을 따라 앞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이 손끝에 묻어나자 미간이 짜증스럽게 오그라들었다.
"그렇게 알아듣게 일러줬는데 감히 보란 듯이 나타나?"
악다문 이 사이로 숨까지 씩씩 사나워졌다.
또각 또각 또각
샤워 후 머리를 말리고 있던 아영이 드라이기를 끄고 바깥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날카로운 구두 굽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찬혁이라 하기엔 구두 굽 소리가 너무 뾰족했다. 아영은 축축한 머리를 털며 현관으로 나갔다. 손잡이를 돌린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어머! 누구...!"
문밖에 리나가 서 있었다.
"신아영 작가님. 안녕하세요."
"여긴 어떻게 알고..."
"좀 들어가도 되죠?"
대답을 기다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미 리나는 안으로 들어선 후였다. 문 앞을 막고 서있는 것은 거부 의사로 부족했나 보다. 아영의 어깨가 팩 밀쳐졌다.
"어디 앉을 데가... 없네요?"
방 중간에 송곳처럼 서서 리나가 미간을 찡그렸다. 앉을 데만 없을까. 있는 게 없는 반지하 방이었다. 아영은 씽크대 옆에 세워둔 접이식 간이 의자를 펼쳐 리나 앞에 놓았다. 앉으며 동시에 다리를 꼬는 게, 영화의 한 장면처럼 드라마틱했다. 단단히 벼르고 온 자세다.
"작가님도 좀 앉으시죠. 설마 의자가 이거 하나는 아니죠?"
"긴말 필요 없을 것 같으니 난 서 있을게. 초면도 아닌데 말 놓는 게 어때?"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주려고 한 건데. 거북했니?"
아영이 성큼 다가가 리나의 에나멜 구두를 벗겨냈다.
"어머! 지금 무슨 짓이야? 매너없게?"
"방에 들어올 땐 신발을 벗는다. 이게 최소한의 예의고 매너지."
아영은 구두를 문 앞으로 던졌다.
"야! 너 저게 얼마짜린 줄 알아!"
"하아!"
헛웃음이 터졌다. 최소한의 예의도 모르는 사람이 얼마짜린지 가늠도 안 되는 고가의 구두를 신고 코메디를 하고 있다. 구두 굽에 싸구려 비닐 장판이 뚫릴까 무서워 신발을 벗겨낸 사람보고 빌라는 건지, 막장 드라마도 아니고, 아영은 순간 리나가 가소로워졌다.
"용건이 뭐야?"
"신아영. 너 정말 뻔뻔해졌다. 강산이 한번 바뀌었다고 네 상황이 바뀐 줄 아는 거야?"
"아니. 변함없네. 숨어있어도 안 바뀌는데, 설마 보인다고 바뀔까? 궁금해졌어."
"그래서 나타났다? 내연녀 딸이라 그런가. 뻔뻔한 건 대물림인가 봐?"
"말조심해!"
"첫사랑의 순애보라. 평생 찬혁이 어머니 괴롭힌 것도 모자라,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게 몰아가더니. 근데 그거 간접 살인 아니니?"
"채리나!"
"그래 놓고 장례식장에 와서 상주 품에 안겨 우는 건 너무 속 보이는 짓 아닌가?"
"뭐? 그게 무슨 소리야... "
"그날 네 엄마랑 장례식장에 같이 왔으니까 네가 더 잘 알 거 아냐. 아님, 그건 계획에 없었나? 근데 그걸 찬혁이가 봐버렸네? 나도 기절할 뻔했는데 찬혁은 오죽했겠니. 아버지의 내연녀가 돌아가신 어머니 장례식장에 와서 그러고 있는데 말이야. 안 그래?"
"하아!"
아영은 몰랐다. 그런 일이 있은 줄은 까맣게 몰랐다. 장례식장에서 꺼지라고 밀쳐내던 찬혁이 떠올랐다.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은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신화당 부도 막겠다고 경주 콘도를 팔았으니, 찬혁이 어머니가 어떻게 안 미칠 수 있겠어? 그거 우리 엄마 앞으로 안 돌려놨으면 너희 아빠가 크게 한몫 챙겼을 거 아냐. 진짜 무서운 사람들 같아."
"...... 가줄래. 지금 좀 가줘. 가."
"진짜는 지금부턴 데. 안 궁금해?"
"...... 뭐?"
두려움이 엄습했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끔찍한데 진짜는 지금부터라고 한다. 아영은 듣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모르는 일이다. 모르면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
"아니. 안 궁금해. 지금까지 네가 한 모든 얘기 새로울 거 하나도 없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야. 그때 나는 몰랐고, 앞으로도 알고 싶지 않아. 중요한 건 나와 찬혁이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거야. 우리 사이에서 생긴 문제였다 해도 그건 우리 문제야. 리나 네가 나설 일이 아니지. 낄 입장도 못 된다고. 알았으면 이제 그만 가줄래."
"그래 그럼. 궁금하면 찾아와. 그런데 서둘러야 할 거야. 나 성격 급하거든."
리나가 일어섰다. 간이 의자가 삐걱 소리를 내며 애처롭게 넘어졌다. 구두를 신고 우쭐 높아진 시선이 돌처럼 굳어버린 아영에게 날아간 순간, 벽에 기대놓은 화백을 보았다. 찬혁의 책상 옆에 서 있던 가방이 거기 있었다. 찬혁이 다녀갔다. 밤에! 성큼 다가서는데, 성난 하이힐이 싸구려 장판에 사정없이 박혔다.
짝
"아!"
순식간이었다. 아영이 볼을 감싸고 매트리스 위로 넘어졌다.
"가방 놓고 갈 때 알아봤다 신아영. 그 엄마에 그 딸이니? 남의 거 가로채보니 어땠어? 재밌디? 내가 낄 자리가 아니라고 했니? 네가 찬혁에 대해서 뭘 알아? 너야말로 이렇게 당당할 자격이 있는 줄 알아? 찬혁이 곁을 지킨 건 나였어!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난 찬혁의 바람막이, 찬혁의 방패로 살아왔어. 엄마 때문에 미친 애처럼 방황하는 거를 겨우 잡아놨더니, 요양 내려가 있는 사이에 작업을 걸어? 뭐가 이렇게 딱딱 들어맞지? 그 이후에 파라다이스 호텔에 신화당 자리 찜해놓고? 실적 좋은데? 곧 제일 갤러리 정기 특별전 작가 인터뷰 있다며? 멋진 스토리 기대해도 되는 거지? 찬혁이 반응이 궁금하네."
리나의 실크 스커트가 매몰차게 돌아섰다. 화락 끼지는 서늘한 바람이 섬뜩했다. 문가에서 마지막 말이 날아왔다.
"신아영. 네가 없어졌으면 좋겠어. 영원히!"
진심으로 들렸다. 그래서 더 끔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