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안은 변함없이 분주했다. 일층 오픈 전시장에서는 모 방송국 어린이 프로그램 촬영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유치원생쯤 되어 보이는 꼬맹이들이 그림을 앞에 들고 카메라 앞에서 잘도 재잘거렸다. 아영은 빙 둘린 카메라들 뒤를 재빨리 지나쳐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신 작가님 여기요 여기!"
숨죽여 부르는 소리를 찾아 아영이 목을 빼고 사람들 속을 두리번거렸다. 촬영 세트장으로 임시 제작된 전시 벽 한쪽에 갤러리 직원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그 사이에서 1층 전시장 윤 큐레이터의 손이 파닥파닥 아영을 불렀다. 손을 마주 흔들었다. 윤 큐레이터의 손가락이 브이를 만들어 2층, 2층 위를 가리켰다. 네. 네.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누가 보면 조연출쯤 되는 것 같다. 뒷전에 서 있던 스태프가 뒤를 홱 돌아보았다. 아영이 후다닥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2층 난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밑에서 볼 때와 달리 촬영장은 유기적이고 체계적으로 움직였다. 볼만했다. 아영은 난간을 따라 아래층을 구경하며 윤 큐레이터가 가리킨 동편 전시실로 향했다. 참 재미있는 구조다. 건물 중앙이 2층까지 원형으로 뚫려 난간을 따라 빙 돌면 아래층 전시 조형물이나 행사를 관람할 수 있는 구조였다. 벽에는 각종 미디어 아트 스크린과 디지털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그야말로 멀티 디스플레이 효과를 극대화한 공간이 아닐 수 없었다.
'여기 2층에 카페 하나 있으면 딱 인데. 종일도 앉아있겠네.'
아영은 또 한 번 아쉬웠다.
동편 전시실 문이 떼어지고 있었다. 드디어 오픈하나? 아영은 인부들을 빗겨나 안으로 들어갔다.
"와 여긴 이렇게 생겼구나..."
유럽 어느 소도시 원형 극장 같기도 하고 미니 오페라 하우스 같기도 했다. 특히 천장에 그려진 'Ceiling of the Apollo Room' 은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지게 할 만큼 장관이었다.
"아영씨. 입에 먼지 들어가요."
화들짝 입을 닫고 아영이 고개를 내렸다. 민 대표가 무대처럼 보이는 야트막한 단상에서 껑충 뛰어내렸다. 물 회색 슬랙스에 하얀 오버핏 린넨 셔츠가 경쾌하고 세련돼 보였다. 소매를 둥둥 걷어 올린 게 멋짐까지 플러스다.
"아 대표님. 안녕하세요."
"어서 와요. 모사 아니고 오마주."
민 대표가 천정을 가리켰다.
"이태리 피렌체 Pitti Palace 갔을 때 나도 그랬어요. 아영 씨처럼 입을 떡 벌리고 올려다봤네요."
"실제로 보셨다고요?"
"네. 경외심과 존경심에 온몸에 전율이 쫙 끼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바로 엄숙해지죠. 경의를 표하게 돼요. 이건 거기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이지 뭐."
"실제로 보면 그럴 것 같아요. 승천할 것 같은 환각에 빠지겠죠. 이것도 충분히 멋진데요. 저 입 벌린 거 보셨잖아요."
"우리 갤러리가 밀어주는 대표 작가 입 벌렸으면 성공인데요. 올라갈까요?"
"아... 네. 그런데 여기 오랫동안 닫혀 있던데, 드디어 오픈하시네요? 특이한 구조예요. 무슨 전시 준비 중이세요?"
"카페요."
"카페요?"
아영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민 대표가 찡긋 윙크를 해 보인다. 알면서. 내지는 맘에 들어요? 하는 것 같다. 천정을 올려다볼 때보다 턱이 더 주책없이 떨어지려 했다. 지나가듯 한마디 중얼거렸었다. 혼잣말이었다. ‘꿈은 이루어진다.’도 아니고, 현실이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아영은 적절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아영 씨 아이디어 덕분에 이 공간이 드디어 빛을 보네요. 시청각실로 쓰던 공간이라 전면 스크린은 그대로 둘 생각이에요. 디지털 쇼룸 겸 카페로. 아영씨 생각은 어때요? 의견 있으면 내봐요."
"아 저야... 글쎄요. 제 의견이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그래도 말해봐요. 참고할게요."
뭐든 하나는 말해야 할 분위기였다. 가볍게 묻고는 있지만 민 대표는 기대에 차 보였다. 6층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영원처럼 느껴졌다.
"아, 글쎄요. 기념엽서나 카드 명함 뭐 이런 걸 직접 그려서 기념으로 가져갈 수 있게 하면 어떨까, 싶은데요. 이벤트 개념으로요. 갤러리 마크가 찍힌 엽서나 카드, 간단한 그림 도구만 준비 해두면 고객이 이곳에서 받은 영감을 직접 그려보는 체험 공간 같은 거?"
" 으음~ 그거 아주 재미있는 아이디언데요!"
"그러세요?"
"음. 갤러리 홍보도 되고 좋겠어요. 체험 공간. 그 아이디어도 맘에 들고."
"요즘은 그림 도구가 콤팩트하고 간편화돼서 지저분하게 펼쳐놓을 필요도 없고 준비도 번거롭지 않을 거예요."
"나는 잘 모르니까 그 분야는 아영 씨가 책임져요."
"제가요? 아니요. 여기 큐레이터분들께 맡기시는 게 더 나을 텐데요. 아니..."
"이제 와서 발 빼기예요? 최초 아이디어 제공자니까 그러지 말고 좀 도와줘 봐요. 준비 잘해서 오픈해봅시다. 내리죠."
"네..."
‘내리죠.’에 한 대답이었다. 공교롭게도 한배를 타게 되어버렸다. 가을에 있을 개인전이 카페 오픈 준비로 이어달리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그다음 주자는 무엇일까. 리나가 심술궂게 놀려대던 민 대표의 작가 욕심은 끝이 없어 보였다.
"앉아요. 커피 한잔할래요?"
"예. 감사합니다."
아영은 대표실 중앙에 둥글게 배열된 겨자색 소파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머릿속 회로가 과부화 상태라 동작이 저절로 굼떴다. 쪼로록 쪼로록. 민 대표가 직접 커피를 내리고 있다. 곁에 커피 머신이 로봇처럼 버티고 앉아있는데도 민 대표는 아영을 위해 늘 커피를 손수 내렸다.
"향 어때요? 인도네시아 만델링이예요."
"좋습니다. 너트 향 같기도 하고."
"맞아요. 맛이 남성적이고 중후하달까. 브라질 원두 빼고 넣어 봤어요. 나한텐 좀 가벼운 것 같길래. 맛보고 괜찮으면 말해요. 챙겨줄게요."
안 괜찮아야 했다. 어젯밤 찬혁의 앞에서 보란 듯이 내렸던 그 커피도 ‘좋은데요.’ 칭찬 다음에 따라온 커피였다. 그런데 향이 너무 기가 막혔다. 저절로 고개가 향을 따라 돌아갔다.
"커피 맛이 간절해도 조금만 기다려요. 애태우는 맛. 알죠?"
"아, 네."
그 말까지 앵무새처럼 그대로 찬혁에게 했었네. 생각보다 가까워져 있었다. 가랑비에 옷깃 젖듯 민 대표가 제 생활 군데군데 알게 모르게 자리하고 있었다. 아영은 몰랐다. 못 느꼈다고 해야 맞다. 민 대표는 서두르지도 매달리지도 않았으니까. 당연히 보채지도 재촉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지난 3년간 숨 가쁘게 함께 달린 기분이다. 어느 틈에 민 대표와 이어달리기하고 있었다. 2인 1조로.
"자. 마셔봐요."
"네. 감사합니다."
잠시 커피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시간. 음. 한 모금. 두 모금.
"어때요. 아영 씨한테는 좀 무겁나?"
"좀 그러네요. 브라질 원두가 제 입에는 더 맞는 것 같아요. 캬라멜 향이 좋거든요."
"아 이런. 실팬데. 하하. 다음번엔 기대해요."
다행이었다. 공짜 커피 백을 거절하고 나니 커피 맛이 한층 일품이었다. 아영은 맘 놓고 푹 빠져들었다.
"오늘 예정에도 없이 불쑥 와달라고 해서 미안해요. 나 때문에 스케줄 꼬인 건 아니죠?"
"좀 빠듯해지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닙니다. 무슨 일이신데요?"
"아 한가지 확인할 것도 있고, 부탁도 있고 해서..."
말끝을 흐리는 게 민 대표답지가 않았다. 말을 얼버무릴 정도로 무리한 부탁은 안 하는 사람이다. 듣는 당사자는 무리한 듯싶어도 민 대표의 부탁에는 늘 지원이 세트로 포함되어 있어서 부탁도 당당하게 했었다. 아영은 긴장했다.
"부탁이라면 무슨.."
"인터뷰 관련해서 확인 먼저 할까요?"
"네. 말씀하세요."
"아침에 채 대표 전화를 받았는데, 채 대표 기억하죠? 한빛갤러리 채 리나 대표."
"예? 예."
아영의 심장이 바닥으로 무섭게 쿵 떨어졌다. 불과 한 시간 전에 반지하 방에 다녀갔다. 번쩍이는 고가의 에나멜 구두부터 눈앞에 번쩍 터지던 별까지, 영상이 머릿속에 빠르게 재생되었다. 리나 말 그대로였다. 성격이 급한 게 맞았다. 아니, 그러기로 작정을 한 게 틀림없었다.
"음. 다른 게 아니라.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아영 씨가 했던 말. 그거는 인터뷰에서 빼달라고 요청을 하는데."
"제가 한 말이라면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찬혁이 별장 별채에 살았다고 했던 거."
"......"
"흠. 내 생각에는 아영 씨 일대기에서 빠지면 안 되는 스토리 같기는 한데, 당사자도 아닌데 내가 결정할 사항도 아니고 해서 일단은 재고해보겠다고는 했거든."
"왜 빼달라고 하던가요.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요."
"찬혁이 얘기가 아영 씨 인터뷰에 간접적으로나마 조금이라도 노출되는 게 싫은 눈치예요. 그 녀석 찬혁이 끔찍이 챙기거든. 어릴 때부터 유명했다니까. 오죽하면 둘을 바늘과 실이라고 놀렸을까."
들어주기 어려운 요구였다. 불가능했다. 제 인생에서 그 부분을 빼버리면 저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제 삶의 집대성이고 예술혼의 정점이 찬혁이었다. 찬혁을 빼라고 한다. 리나의 의도는 명확했다.
신아영의 인생에서 박찬혁을 지우는 것.
"한 일 년 정도 찬혁이랑 가까이 살았으니, 아영 씨도 찬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는 알 거로 생각해요. 찬혁이가 아영 씨 식성까지 기억하고 있는 거로 봐선 둘이 꽤나 가까웠던 것 같은데, 찬혁이가 얘기 안 해줬어요? 어머니에 대해서?"
"......"
"가정환경이 많이 불우했거든. 재력으로야 찬혁이 따라갈 사람이 없지. 태어날 때 입에 물고 나온 게 금수저도 다이아몬드도 아니고 최연소 주식 부자 타이틀이었으니까. 본인 없는 데서 이런 소리 할 건 아니지만, 중학교 때부터 오토바이 타고 다니면서 통제 불능 상태까지 삐뚤어 질만큼 힘들어했어요. 뭐 결국엔 사고 크게 당해서 폭주족 생활도 강제 청산하고 병원에 살다시피 하다가 요양 내려갔으니까."
"... 몰랐습니다."
"그래요? 몰랐으면 이 정도로 하고. 리나 말은 아영 씨가 그 시절 얘기를 언급하면 분명히 찬혁이 역사도 재조명될 거고, 한꺼번에 딸려 나올 스토리가 방대해진다나 뭐라나. 알면 다친다나? 아무튼, 틀린 말은 아니죠. 아영 씨 생각은 어때요. 겨우 일 년 기간이니까, 빼도 무방해요?"
겨우 일 년. 뺀다는 생각만으로도 아영의 인생이 텅 비어 버렸다. 십 년을 버티게 해준 일 년이었다. 없는 척하는 것과 없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숨기는 것과 삭제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리나는 삭제를 강요하고 있다.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거부한다면, 줄줄이 딸려 나올 방대한 대서사시의 서두를 저가 여는 꼴이 된다. 다치는 사람은 찬혁이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영은 수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