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부(68)-1
천둥과 번개로 요란하던 하늘은 어느새 조용해진 채 비만 쏟아내기 바빴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앞으로 뻗어보기도 하며 컨디션을 체크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세 사람이 나를 멍하게 바라보는 모습이 보인다. 김지연과 박현지, 카밀라가 서로 옹기종기 붙어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지우야.”
“네.”
“무슨 일 있었어?”
잠긴 목소리로 대답하자 김지연이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되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어요?”
“왜 그래? 얼마 안 지났는데. 방금 우리 식사한 시간 정도?”
“그래요?”
생각보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모양이다. 잠시 한숨을 내쉬고 차분하게 걸음을 옮긴다. 아까 만들어둔 작은 지붕 아래로 들어가서 엉덩이를 붙인다. 이미 젖어있는 흙바닥이라 찬 기운이 올라오지만 별수 없었다.
“별일 없었어요?”
“응. 천둥, 번개 때문에 카밀라가 많이 무서워하긴 했는데 엄청난 천둥이 갑자기 몇 번 내리치더니 조용해지더라고. 피뢰침 역할도 한다더니 정말인가 봐.”
“진짜였죠. 아주 그냥 죽여줬어요.”
“……?”
내 의미심장한 말에 김지연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 옆으로 카밀라와 박현지가 덜덜 떨고 있는 게 눈에 잡힌다.
“많이 추워요?”
“네, 조금요. 미안해요. 빗속을 뛰어다닌 사람도 있는데…….”
“미안하긴요. 카밀라는 좀 어떤 것 같아요?”
박현지의 품에 안긴 카밀라도 추위 때문에 덜덜 떨고 있었다. 심지어 입술 색이 점점 어두워지는 게 아무래도 위험해 보인다.
“안아주고 있기는 한데 나아지질 않네요.”
“다들 서로 더 가까이 붙죠. 아무래도 금방 그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이러다 감기라도 들면 더 큰일이에요.”
물론 채수연이 주고 간 의약품이 있었지만 약을 먹을 일 자체를 방지하는 게 최선이었다. 내가 지붕 밖으로 내리는 비로 손을 뻗으며 입을 열자 김지연은 기다렸다는 듯 내 허벅지 위에 앉으며 내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그 말을 기다렸지.”
약간이나마 헤프게 느껴지는 웃음을 지으며 날 올려다보는 김지연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심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김지연 덕분에 조금 더 풀리는 것 같다. 그때 김지연이 내 눈치를 보며 망설이다가 박현지에게 들어오라는 듯 손을 흔들며 입을 열었다.
“언니, 그냥 들어와요.”
“미안해요.”
“매번 미안하대. 그냥 들어와요. 이 정도는 별거 아닌데요, 뭘.”
“네. 불편하셔도 비 그칠 때까지만 버티죠.”
“불편…하지는 않은데…….”
그렇게 망설이며 말을 잇던 박현지가 슬그머니 엉덩이를 움직여 내 곁으로 붙였다. 그리고 카밀라는 본능적으로 나와 박현지 사이로 파고들며 내 허벅지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 카밀라를 본 김지연이 감싸 안으며 등과 팔뚝을 쓸어주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내 곁에 제대로 붙지 못하는 박현지의 어깨를 감싸 안으로 당겼다. 순간 흠칫 놀란 박현지가 마지못해 끌려오며 내 옆구리에 몸을 기댄다.
“훨씬 낫네요.”
“그쵸? 추울 때 서로 붙으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가 봐요.”
“그러네요.”
그렇게 김지연이 어색해하는 박현지를 배려해 이것저것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여전히 내 곁에 붙은 채 몸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던 박현지는 김지연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점점 긴장을 풀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등을 감싸고 있던 내 팔뚝에 닿은 등이 딱딱했는데 조금은 풀어지며 부드럽게 느껴졌다. 둘이 소곤거리며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보는 나도 조금은 기분이 풀어지기 시작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확실히 명경지수가 있다 하더라도 단번에 떨쳐내기 어려운 것 같다. 김지연은 박현지와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카밀라의 몸을 쓸어주었고 내 품에서 눈을 감은 채 쌕쌕 숨을 쉬고 있던 카밀라의 얼굴에도 조금은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조금 괜찮아지나 보네요.”
“그러게. 그래도 이 와중에 잘 자네.”
“잔다기보다 거의 기절한 거 아니에요?”
“아무튼 내일 카밀라는 걱정 없겠어. 문제는 우리지.”
“어떻게든 잠을 자야 내일 또 걸을 텐데 걱정이네요.”
“그러니깐 말이야. 캠프는 진태 오빠랑 동걸 오빠가 배수로까지 다 파놔서 걱정은 없는데…….”
“그랬어요?”
“어. 영철 오빠가 한국에서 목수였다더라고.”
“아, 그랬어요?”
이미 나는 박영철의 정보를 확인했을 때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취미겠거니 생각했는데 직업일 줄은 몰랐다.
“어. 너 캠프 떠나고 나서…….”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시선이 느껴져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가 흠칫 놀랐다.
‘설마…….’
박현지와 눈이 마주쳤는데 매번 내 시선을 피하던 박현지가 내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그 순간 박현지의 눈동자가 풀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나와 눈이 마주칠 새가 없이 자꾸 내 시선을 피하며 눈치를 보던 박현지였기에 이렇게 제대로 시선이 마주친 적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내 의심이 확실하다 느껴진 건 박현지의 등이 점점 내게 더욱 깊숙하게 기대고 있었고 팔에 실리는 무게가 무거워지고 있었다. 거기다 피부에서 느껴지는 체온이 점점 뜨거워졌다.
‘큰일인데…….’
예전에 염려했던 상황이 발생한 것 같다. 색욕의 눈 자체도 이성을 유혹하는 데 어마어마한 효과를 발휘하지만 그래도 50 정도 오르는 건 정신력이 높은 여자들은 어떻게든 참아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유혹안이 중복된다는 걸 알게 된 이후 조심할 필요가 있었는데 배유빈을 제외한다면 내 주변 여성들이 대부분 잘 참아냈었다.
그렇기에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다 방금 전까지 별일이 다 있었기에 하필 지금 내 주의가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