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쐐기(1)

3185 Words
서오 17년, 거위 털 같은 눈이 푸석푸석 내리던 해, 장군인 설강은 끝내 전장에서 운명하게 됐다. 장군의 운명과도 같이 따라서 장군이 수호하려 했던 서오도 크게 휘청이게 되고, 전장에서 별세 소식을 접한 종실의 귀족들은 짐을 싸들고 남쪽으로 도망을 치게 되는데. 하지만 뒤따르는 적군에 파죽지세로 몰려 결국은 갈 길을 잃고 죄다 민탕신궁에 몸을 숨기게 되었다. 민탕신궁은 강남의 민탕산 산허리에 자리하고 있는 중전이었다. 아직 춘설이 녹지 않은 그곳은 새 지저귄 소리가 요란한 곳이었는데, 또한 흩어지는 황혼의 햇살과 바닥에 나 있는 균열들은 이 무너지는 제국을 암시하는 듯했다. 피난을 위해 도망친 일행은 몸이 무거운 말들을 가까스로 잡아당기며 몸을 옮겼다. 바닥에 흩뿌러져 있는 흙들이 유난히 눈을 어지럽혔다. 과거 누리던 부귀영화는 온데간데없고 온몸이 흙투성이로 되어 있었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또한 바닥에 내동댕이쳐질 운명을 피하기 어려울 거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드는 순간이었다. 오로지 머리 위로 쭉 뻗어진 궁전의 한 모퉁이에 달린 방울 소리만 바람에 흐느적거리며 귀가에 울렸다. 그건 예사로운 방울 소리가 아니었다. 조소였다. 처량하고 청승맞은 모습을 한 귀족들에 대한 조소였다. 하지만 보잘것없는 방울 소리에 연연할 때가 아니다. 뒤로는 적군이 손에 칼을 들고 뒤따라오고 있는데, 이 커다란 신궁에서 몸을 떨고 있는 수백 귀족들과 그 족속들은 두려움에 서로 부둥켜안고 있을 뿐이었다. 적적한 공기 속에서 조금씩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궁전은 눈물바다가 되고, 조롱 섞인 방울 소리를 덮어버렸다. 과연 무슨 기분이었을까? 두려움? 아니면 슬픔? 사람 속은 알 길이 없어 당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유일하게 확정할 수 있는 한가지, 그들 모두 나라가 망하는 꼴을 지켜볼 거란 사실만은 인지하고 있는 거 같았다. 서오의 끝을 두 눈 뜨고 지켜보게 될 거다. 나어린 설민의 귀에 한 쌍의 손이 귀를 틀어막고 있다. 을씨년스러운 울음소리와는 격리되었지만, 천진난만한 녀석의 눈에는 여전히 귀족들의 참상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어린 녀석은 몰랐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머리를 들어 앞에 세워진 커다란 한백옥의 신상을 보았다. 과묵한 신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거뭇하게 앞에 세워져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그 앞에서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무능한 제왕을 본다. 그러다 드디어 똘망한 두 눈으로 어머니 품에 와락 안겼다. 어머니는 난데없이 꽃문양의 긴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거기에다 머리며 얼굴이며 갖은 치장을 하고 있었는데, 마치 흐드러지게 피는 봄날의 꽃처럼 눈길을 사로잡았다. “엄마, 또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해?” 설민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물었다. 그 말을 듣고 있는 최아의 맘은 더없이 복잡했다. 이내 고개를 숙이고 아들 녀석한테 찬란한 미소를 보냈다. 웃지 않은 최아는 미인이고 웃고 있는 최아는 더욱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답게 빛나는 꽃이었다. 다만 이 순간만큼은 아들을 더 세게 품으로 끌어안고 있었다. 모두 황제의 옆으로 발걸음을 한 발자국이라도 더 옮기려 했지만, 그 누구도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황제의 창백한 얼굴은 무기력해 보였고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제희의 눈길은 서서히 위로 향했다. 서로 읍소하며 질타하는 대신들의 몸 틈을 비집고 문가로, 그곳에는 엷은 빛깔이 새여 나오고 있는 창문이 보였다. 어둑한 이곳에 얼마 되지 않는 작은 빛줄기였다. 그곳에는 굳게 닫힌 대문도 있었다. 이내 엷은 빛깔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칼날이 부딪히는 소리, 사람의 비명이 들리면서 마지못해 하얀빛도 붉게 물들여지는고. 우중충한 그림자와 더불어 발걸음 소리가 소란스레 울린다. 아까까지 궁중에 요란스럽던 울음소리도 그 발걸음 소리에 모조리 아연했다. 더 세게, 더 세게... 최아는 품속의 설민을 가슴속으로 더 깊게 파묻었다. 본능적인 두려움이었을까, 최아는 저도 몰래 뒤로 한걸음 물러나다 그만 차가운 한백옥의 석상에 부딪히고 말았다. 눈길이 닿아있는 석상은 거위 털을 쳐다본 거처럼 지금 막 쌀쌀맞게 주시하고 있었다. 거기 주시하고 있는 대상은 거위 털이 아니었다. 무너져가는 이 제국을 바라보고 있는 거였다. 그러다 석상의 눈길은 다시 죽음에 쫓기는 사람들을 보는듯하다 어느새인가 더는 영혼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 사람들... 최아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 순간, 뭐라 하면 좋을지... 그럴수록 품속에 있는 아이만 꼭 틀어잡은 채 시선은 저 멀리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뻗어져 나갔다. 품에 있는 설민도 이미 이 예사롭지 못한 기류를 눈치채고 있었다. 목을 타고 오르는 이 질식할 거만 같은 느낌... 그도 어머니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최아의 옷깃을 세게 잡았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유별나게 크게 궁중에 울렸다. 그 문틈 속으로 어둑하던 궁을 비추는 한줄기의 강한 빗발이 서오 제왕인 최현의 몸에 세차게 쏟아졌다. 몸에 걸치고 있는 황포는 이미 허름해져 있고 영준하던 얼굴도 오석산 때문인지 전처럼 정정해 보이지 않았다. 되려 좌우로 괴상하게 일그러져있는 표정으로 하여금 최현은 이미 이빨 빠진 호랑이임을 증명하는 듯싶었는데. 그리고 황포도 허름할 뿐만 아니라 어지럽게 구겨지고 흙과 먼지가 묻어있는 모습에 이 나라의 제왕이었던 그가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이기도 했다. 그래서도 문을 열고 앞서 들어오고 있는 사람과 더 비교가 되었다. 하얗게 질려있는 얼굴을 들고, 핏기가 돋아있는 두 눈을 떠서 앞을 바라보는데, 최현은 웬걸 이상한 웃음을 띠고 있는 거였다. “한... 한강류 아니냐? 네가 왔구나.” 그 말에 밑에 있는 사람들도 모조리 아연실색해지고. 무릇 서오의 사람이라면 모두 야진국 임금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사람을 가르치는 선생이든, 아니면 일반 서민이든, 하물며 길가의 거지들까지,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야진국 임금에 대해 혀를 놀렸다. 그가 지옥에서 온 저승사자이고, 산채로 사람을 잡아먹는 귀신이라며. 심지어 백 년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하던 사오의 장군인 설강도 그의 곡도 아래 처참해 패하였다는 둥 구설수가 많았다. 살기가 그득 묻어나는 곡도 아래 수많은 영혼이 부르짖고 있었다. 끝없는 전쟁 속에서 무뎌질 만도 할 곡도는 오늘따라 유난히 번쩍거리며 한강류의 하얀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하얀 얼굴 위에 한줄기 흩뿌려져 있는 핏자국은 망령들의 혼을 가득 떠안은 그를 되레 요염하게 가꾸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조화로운 한 폭의 핏빛 수채화를 그려놓고 있었다. 몸 위로 복잡한 문양이 수놓아져 있는 검은색의 비단옷을 걸쳐져 있었고 보일 듯 말 듯한 금색의 팔찌가 팔목을 감쌌다. 시선을 계속 아래로 향한다면, 이윽고 미끈한 곡선을 자랑하는 하체가 보인다. 강하게 바닥을 내리꽂고 있는 두 다리는 역동적인 미가 더 돋보였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전장을 같이 누비고 다녔던 그 곡도가 흔들거리며 위엄을 자랑하고 있었다. 한강류는 빛을 등지고 궁중으로 자박자박 걸어 들어갔다. 얼굴에 아무런 감정도 실려있지 않은 채로. 금테를 두르는 듯한 금발 머리카락은 페르시아의 비단결처럼 역광에 한결씩 빛이 났으며 정갈하게 머리 뒤로 묶여 있었다. 짙은 색의 동공, 그리고 옆으로 길게 째진 눈과 더불어 산봉우리처럼 오뚝 솟은 콧대까지. 이 모든 건 한강류였다. 피 묻은 얼굴은 한치의 웃음기도 서려 있지 않았다. 앞에는 거룩하게 깎아진 한백옥의 신상이 쓰러져가는 이 나라의 제왕보다 먼저 눈에 포착되었다. 아주 잠깐의 침묵과 시선 교환이 이루어지고. 영을 잃었던 신상은 또다시 이름 할 수 없는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인간세상 속의 성인과 지옥에서 피로 몸을 적시고 온 악마의 마주침이었다. 주위에 조용히 이 장면을 지켜보는 이들 중 아주 소수만이 잠깐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 알고 있었다. 최현의 입은 이 순간 슬며시 귓가에 걸렸다. 음흉하게 가로 찢어진 저 미소는 보는 이마다 등골이 서늘하게 만들었다. 드디어 최현과 눈이 마주치게 되고, 한강류는 곡도를 몸 뒤로 치워버렸다. 길게 자란 눈썹 아래에는 차분한 눈빛이었다. “어떻게 죽고 싶은가요?” 살기를 품은 곡도는 한강류가 몸뒤로 가져간다 해도 숨겨지는 것이 아니었다. 예리한 날은 여전히 빛을 발하면서 제왕을 노려보았다. 돌연 최현의 미친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자네는 이 모든 것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고 있는가? 그곳은 묻고 싶지 않은가 말이야? 왜... 왜 그렇게 자네를 대했는지! 내가 만약 죽으면, 자네는 또 누구한테 이 해답을 들을 수 있지?” 그곳은 소리와 함께 최현은 자신의 머리 위에 쓰여있는 왕관을 아래로 내리쳤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잃었다는 거처럼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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