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음에 풍랑을 일으킬 만큼
이천이십일 년 십이월 둘 째 주 금요일 여섯 시 삼십 분.
짙은 베이지 컬러 롱 코트를 입은 여자가 직원들은 모두 퇴근해 아무도 없는 십칠 층 복도를 조심스럽게 걸어 부사장실 문 앞에 도착해 숨을 깊이 몰아 쉬고는 가볍게 사무실 문을 노크했다.
똑똑똑. 조용하던 사무실에 노크소리가 울리자 경영본부에서 올린 내년도 사업계획 파일을 확인하고 있던 태준이 머리를 들어 사무실 문을 잠시 바라보다 재차 노크소리가 들리자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사무실 문이 열리자 문 앞에 서 있던 소아는 쿵쿵 요동치듯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슴 위에 올리고 있던 손을 내리고 태준을 올려다 보았다.
“퇴근 시간 지났는데 무슨 일이에요?”
"...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잠깐 시간 내 주실 수 있으세요?”
“들어오세요”
문 앞에서 서 있는 소아가 들어 올 수 있게 태준이 옆으로 살짝 비켜나 주었다.
“감사합니다”
소아가 조심스럽게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자 태준은 문을 닫고 소파로 걸어가며 그녀에게 앉으라 권했다.
“앉아요. 퇴근시간이 지났으니까 업무 관련된 일은 아닌 듯한데 무슨 일이에요?”
소파에 앉은 소아는 마른 침을 삼키며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저희 팀장님이 송년회 겸 생일파티에 부사장님을 초대했다고 들었어요”
손에 들려있던 펜을 테이블에 내려 놓으며 태준은 소아와 눈을 맞춘 채 머리를 끄덕였다.
“오늘 참석 안 하시면 다음주에 ‘소개팅’ 을 한다는 걸 말씀 드려야 할거 같아서 왔어요”
‘소개팅’ 이라는 단어가 들리자 태준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사라지면서 소파에 기대고 있던 상체를 세우고는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내려 놓았다.
“참석여부가 소개팅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지극히 사적인 대화에 태준은 존칭은 버리고 살짝 굳어진 표정과 약간의 긴장감이 섞인 낮은 목소리로 이유를 물었고, 소아는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답을 기다리는 태준을 보고 잠시 숨을 고르다 이내 답을 했다.
“부사장님이 저랑 '썸'을 타는 사이니까 미리 알고는 계셔야 할거 같아서요”
마흔넷 인생 처음 들어보는 ‘썸’ 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는 태준은 소아에게 설명을 부탁했다.
“방금 말한 ‘썸’이 뭔지 알려주면 좋을 거 같은데..”
“아! 아주 쉽게 설명을 하면 남자랑 여자랑 사귀기 전에 간 보는 단계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대답을 듣기는 했지만 더 모를듯한 말에 태준이 상체를 앞으로 살짝 기울였다.
“내가 너랑 그런 사이였어?”
“썸은 아닌가...!"
태준의 말에 생각을 하는 듯 소아가 혼잣말을 했다.
“썸 아니면 남자친구!?”
제 말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태준을 보며 소아가 다시 말을 이었다.
“둘 다 아니면 그냥 지인이거나 상사와 직원 둘 중 하나인데,
상사와 직원 사이에 이런 얘기를 주고 받지는 않고 그럼 남은 건 지인뿐인데 지인하고도 이런 얘기는 안 하는데..”
질문도 제가하고 답도 제가하는 동안 소아 얼굴은 실망한 듯 마른 나뭇잎처럼 생기가 사라져 갔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스스로 답을 낸 소아는 조용히 일어나 그만 가보겠다며 태준에게 인사를 건넸다.
“앉아. 질문도 네가 하고 왜 답도 네가 혼자 다해”
앉으라는 말에 소아는 다시 자리에 앉아 저를 보고 있는 태준과 눈을 맞췄다.
“안소아!”
“네..”
제 사무실에 들어 와 패기 있게 말할 때와는 다르게 풀 죽은 듯 실망스런 눈빛을 보이는 소아를 보고 있으니 태준은 미안함과 사랑스러운 마음이 공존했다.
“소개팅을 한다고?”
기분이 좋지 않은 소아는 말 대신 머리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태준의 얼굴에는 살짝 미소가 올랐다.
“이유가 뭔지 궁금한데”
제 입으로 그런 결정을 한 이유를 말하자니 민망하고 부끄러운 생각에 소아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음.. 제가 지금 스물 아홉이고 이십일 정도가 지나면 연도가 바뀌면서 서른이 되요.
그래서 서른이 되기 전에 애인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애인?”
“네, 애인이요”
숫자상 나이가 스물아홉이기는 하나 제 눈에 보이는 모습은 이십 대 초반이건만 ‘소개팅’ 보다 더 충격인 ‘애인’이라는 단어를 들은 태준은 이마를 훑으며 잠시 생각에 빠진 듯 말이 없었다.
말없이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살짝 부담스러워 질 때쯤 가방 안에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일층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김수진 차장 전화였다. 통화버튼을 누르고 수진과 잠시 대화를 나누고는 핸드폰을 다시 가방에 넣었다.
“저.. 팀원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이제 가봐야 해요”
“애인을 만들려고 하는 이유가 뭐야?”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걸어가던 소아는 태준의 질문에 뒤들 돌아 보았다.
제 말이 당황스러웠던지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태준을 보며 소아는 에둘러 말하는 대신 제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하기로 결정했다.
“결혼을 하고 싶어서요”
“결혼!”
“네”
말없이 저를 바라보고 있는 태준에게 예의 바르게 배꼽 인사를 건넨 소아는 그대로 사무실을 나섰고 사라지는 소아를 보면서 태준은 소아가 제게 했던 말들만 계속 되뇌었다.
‘결혼, 결혼..결혼”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니던 소아를 지금까지 지켜 본 그였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을 찾아와 결혼을 하고 싶어 올해가 가기 전에 애인을 만들겠다며 마음에 풍랑을 일으킬 만큼 엄청나게 크고 강력한 돌덩이를 던져 놓고 유유히 사라졌다.
제가 지금 들은 말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는 것인지 정신이 혼미해진 태준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금요일 밤. 참석해야 할 모임이 있었지만 시끄러운 남자들끼리 모여 술 마시는 것도 지겨워져 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폭탄을 받아 든 태준은 심란해진 마음으로는 서류를 볼 수 없어 사무실을 대충 정리하고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일에 관련돼서는 직원들이 정리되지 내용으로 보고를 하더라도 하고 싶어하는 말이 무슨 내용인지 빠르게 이해하는 태준이지만 연애만큼은 정말이지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 보다 모르는 것이 많을 만큼 재능도 눈치도 없는 사람이었다.
‘소개팅’과 ‘애인’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음에도 제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저를 보는 그를 보는 순간 소아는 아주 잠깐이지만 그대로 사무실을 떠나는 게 낫지 않을까 진지하게 생각하기도 했지만 연애에 있어서는 많이 모자란 듯한 태준이 아직은 좋았기에 꼭 해야 했던 말은 잊지 않고 다하고 나왔다.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어 당황한 듯 한 얼굴이었지만, 제가 태준에게 던지고 온 폭탄은 몇 년 동안 ‘썸’도 아니고 ‘사귀는 사이’도 아닌 ‘이상한 관계’로 얽혀 있는 두 사람 사이가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오늘 확실하게 결정 될 것이었다.
“부사장님 사무실에 계셨어?”
“네”
강남에서 맛있기로 소문난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예약한 직원들은 서둘러 식당으로 향했다.
소아가 가족 없이 혼자 생활하는 것을 알게 된 후 매년 생일은 점심시간에 같이 식사를 하면서 생일파티를 했지만 올해는 휴일이 생일이 되어 금요일 밤 송년회 겸 생일파티를 함께 하기로 했다.
“안소아 대리 이십 대 마지막 생일 축하하고, 이제 우리처럼 삼십 대에 들어서게 된 것도 축하해”
“올해도 이렇게 잊지 않고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바에 도착한 태준은 주석과 진수가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술을 마시고 있지만 머릿속은 소아가 한 말들로 복잡하기만 했다.
평소에도 말수가 많지 않은 태준이지만 뭔가 복잡한 표정으로 안주는 손도 안대고 술만 마시고 있는 것을 지켜보던 진수가 태준과 주석을 데리고 사람들이 없는 조용한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온더락 잔에 얼음을 넣고 술을 따라 태준에게 건네면 진수가 먼저 말했다.
“일하겠다고 사무실에 남았던 놈이 죽을 상을 하고 나타나서 술만 마시는 건 왜일까?”
“내가 뭘.. 술이나 드셔”
“지금 네 얼굴은 뭔가.. 여자한테 차인 남자 같은 사연 있는 얼굴이야”
“주석아 내 예상이 맞지! 태준이 일하다 충격 받고 술 마시러 온 게 맞네”
아무 말없이 잔을 들어 술을 마시는 사이 슈츠 안쪽에 있던 핸드폰 진동이 짧게 울렸다.
태준은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일차 끝나면 오늘은 이차로 ‘아테나 클럽’ 갑니다.
송년회식이기도 하니까 잠깐이라도 참석하셨으면 합니다.
안소아 대리 생일촛불은 열한 시에 끌 예정입니다]
“무슨 일인데 얼굴이 그렇게 복잡한 거야?”
“ … ”
말없는 태준 때문에 답답해진 진수는 떠보는 것을 포기하고 직설적으로 다시 물었다.
“여자 친구가 헤어지자고 그랬어?”
“내가 여자친구가 어디 있어”
“안소아 대리!”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지고 가던 태준이 잔을 그대로 테이블에 내려 놓으면서 진수를 바라봤다.
“안소아 대리는 네 들도 알다시피 가족이 없어서 내가 보호자로서 챙겨주는 것뿐이야.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너무나 쉽게 두 사람의 관계를 부정하는 듯한 말에 주석과 진수는 동시에 태준을 바라 보았다.
“두 사람을 보는 모두가 사귄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너는 왜 그렇게 생각을 안 하는 걸까!”
어딘가 조금 부족한 놈이라는 듯 태준을 쳐다보고 있던 진수가 주석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연애에 ‘연’자도 모르는 연애 고자랑 연애하느라 안소아 대리가 고생이 많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네가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
“주석아 태준이 마지막 연애가 언제였지?”
“연애라고 부를 만큼 불꽃 튀거나 알콩달콩 한적도 없지만 마지막으로 만났던 여자가 졸업반이었을 때니까 십 년은 되지 않았을까”
진수는 주석이 말을 끝내자 바로 이어 말했다.
“태준아, 너 안소아 대리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심장이 찌르르한 느낌도 들고 안보이면 궁금하고 그렇지?”
진수 질문에 태준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부정을 안 하는 거 보니 정곡을 찔렸나 보네”
“안소아 대리랑 나이차가 얼마나 나는데 그런 생각을 해”
술을 마시던 진수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지금 세상에 나이차가 무슨 상관이야.
미혼 넷에 너 정도 비주얼이면 스무 살하고 결혼을 한다고 해도 뭐라 할 사람 없을 만큼 완벽한데 답지 않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그래”
“그런 생각해본 적 한번도 없어”
“너 말만 그렇지 네 눈은 그렇지 안다는 거 모르지!
대외본부 직원뿐만 아니라 다른 부서 직원들이 떠들고 다니지 않을 뿐 이미 사내커플이라고 소문 날대로 났는데 이제 와서 발 빼면 제수씨 쪽 팔려서 회사 못 다녀”
“제수씨가 쪽 팔릴게 뭐 있어 둘이 깨졌다고 하면 나이 많은 태준이가 당연히 차였다고 생각 할 텐데”
“갑자기 왜 제수씨야”
소아에 대한 호칭이 바뀌니 투덜거릴 뿐 다른 말은 하지 않고 태준이 술을 마시자 주석과 진서는 서로 눈을 맞추고 웃었다.
“그러니까 얼굴이 왜 그런지 제대로 말해야 우리가 조언을 해줄 거 아니야”
“소개팅 해서 서른 전에 애인을 만들고 싶데”
진수와 주석은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와우, 제수씨 패기 있네”
“제수씨가 그렇게 말했으면 네가 있는데 애인이 왜 필요하냐고 물어보지 그랬어?”
태준이 고민하는 이유가 이해가 안 된다며 주석이 말했다.
“사귀지도 않는데 내가 뭐라고 하지 말라고 해”
듣고 있던 진수가 마시던 술잔을 던지듯 테이블에 내려 놓았다.
“어이구! 일만 잘하면 뭐하나 정작 중요한걸 못하는데.. 쯧쯧”
“야야, 성질내지 말고 동생 가르친다 생각하고 차근차근 설명해 줘. 오죽하면 제수씨가 그런 말을 했을까”
아직까지도 천사처럼 해맑고 청순한 소아가 나이만 많고 무식한 놈 몇 년 동안 끌고 오느라 고생했다면서 주석은 태준이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진수는 주석 말대로 차근차근 태준을 가르치기로 하고는 잔에 든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크게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태준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잘 생각해서 대답해!
너 제수씨한테 마음도 있고 좋아하는 거 맞지?”
웃음기 쫙 뺀 질문에 태준이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둘이 같이 여름 휴가도 가고, 주말에 따로 만나서 영화도 보고 놀러도 다니고 그랬지?”
태준이 다시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면 사귄 거야.
너는 보호자로서 혼자 있는 제수씨 외로울까 그렇게 한 거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진짜 마음은 제수씨랑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그랬던 거야"
"너 제수씨 입사해서 얼마 안됐을 때부터 이미 마음 넘어간 거 알만한 사람들 다 알아.
둘 사이에 걸리는 거 없이 다 좋은데 딱하나! 나이 많아서 죄짓는 기분이라 밀어 부치지 못하고 있는 거면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
제수씨가 너한테 시한폭탄 던진 거 보니까 마음 정했다는 뜻이야 밀어 붙여”
“나도 주석이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주석은 태준이 마시던 술잔을 뺏어 테이블에 내려 놓고는 다시 한 소리 했다.
“오늘 받은 시한폭탄 제대로 처리 못하면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두 번 다시 제수씨 못 봐.
아예 이직을 할 가능성이 크지 얼굴 마주치면서 근무하기는 힘드니까”
“꼭 결혼을 해야 잘 산 인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앞날 창창한 제수씨 붙들고만 있을 거면 차라리 확 놔줘!
좋은 남자 만나라고”
“제수씨 이제 활짝 피기 시작하는 나이야. 너랑 헤어져도 타격 일도 안 받을뿐더러 너랑 헤어졌다는 소문나기를 기다리는 남자들 우리 회사만 해도 한 트럭 넘치도록 많아. 대학동기에 친구 기타 등등까지 포함하면 더 많겠지만..”
“제수씨 인물에 지금까지 왜 사내 연애 소문이 한번도 안 났겠어.
너는 그런 마음 아니라고 우기지만 네가 애지중지 하는 걸 옆에서 다들 봤기 때문에 누구도 선뜻 대쉬 하지 않아서 그런 거야”
“마음 넓은 제수씨가 통 크게 먼저 손 내밀었으니까 감사합니다 하고 달려가서 넙죽 잡아.
안 그러면 너 혼자 늙어 죽어. 눈도 드럽게 높아서는 아무나 만나지도 않으면서..”
“다른 남자랑 소개팅 하고 연애해서 결혼하는 거 볼 자신 있으면 거기 앉아서 술 마셔도 돼”